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원로원 (문단 편집) ==== 대중정치의 영향 ==== [[12세기]] 말, 콤니노스 선전체제가 붕괴된 이후 제국의 거버넌스는 중심을 잃고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때를 기하여 각 지방의 유력자들은 각지의 도시 참사회(Boule)의 여론을 장악하였으며 이를 기반으로 지방군의 통제까지 손에 넣기 시작했다. [[안드로니코스 1세]]의 과격한 [[찬탈]]과 폭정으로 시작된 이 흐름은 [[이사키오스 2세]] 시대에 격화되었다. 많은 지방이 정부의 통제를 벗어나고 [[반란]]에 가담했다. [[알렉시오스 3세]]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한 방식으로서 지방의 유력자들에게 중앙정치에 참여할 수 있다는 '[[당근]]'을 제시하기로 한다. 그것은 바로 '원로원 참여'의 가능성이었다. 그의 시대에 제국정부는 세바스토스(Sebastos) 품계를 저렴한 값으로 여러 지방 유지나 상인들에게 판매하기 시작했다. 이 세바스토스 품계는 원래 [[알렉시오스 1세]]가 [[동생]]들을 높여주기 위하여 특별히 만들었던 것이다. 알렉시오스 3세는 이 특별한 직위를 제공함으로써 지방을 중앙의 [[정치]]에서 이탈시키지 않도록 묶어두고자 했다. 그리고 그 조치는 성공적이어서 이후 점차 지방의 반란이나 불복종은 감소하는 추세를 보인다. 안드로니코스 1세의 통치는 또한 원로원이 엮여 있는 의사결정구조의 변화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원로원은 그 특성상 상당수의 [[법관]]들과 [[성직자]]들이 포함되며 당연히 이들의 보수적인 태도 때문에 안드로니코스의 급격한 찬탈은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레온 모나스테리오스(Leon Monasteriotes) 대법관과 같은 사람은 당당하게 원로원 회기 중에 안드로니코스에게 호통을 치는 등 반대의사 표시에도 거리낌이 없었다. 안드로니코스도 레온을 '원로원의 입'이라고 부르기만 하고 감히 손을 대지 못하는 것이 당시의 상황이었다. 이에 맞서 안드로니코스는 궁정으로 시민들을 적극 초청하여 늘 자신의 곁에 두고자 하였으며 그때마다 수시로 유세와 연설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주장을 시민들에게 전달하였다. 평소에는 애써 감춰왔던 원리였으며 콤니노스 왕실이 거의 100년 동안 [[타협]]과 [[선전]]으로 잘 묻어두었던 시민의 적극적인 정치참여가 이로서 폭발하게 된다. 안드로니코스는 이들에게 자신이 처한 상황을 국가적 위기와 결부하여 호소하는 전략을 택했다. 시민들의 강력한 요구와 이따금의 폭력적 개입은 매번 원로원과 정부, 군대도 무력화시키곤 했다. 그는 이러한 방식으로 숱한 폭정에도 불구하고 거의 3년 가까이 집권할 수 있었다. 알렉시오스 3세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이렇듯 팽배한 시민집단의 힘으로 인해 정국운영이 더욱 쉽지 않은 일이 되었다. 그리하여 특별세를 걷어야 하는 등 국가중대사가 있는 [[1196년]]의 경우처럼 콘스탄티노폴리스 전 시민을 대상으로 하는 '전체 민회'가 개최되기 시작했다. [[알렉시오스 4세]]가 실망스러운 행보를 지속적으로 보였고, 그가 데리고 온 [[4차 십자군|십자군]]이 조건 이행 문제로 계속 웅거해 있어서 제국이 위기에 빠지자 [[1204년]] [[1월 25일]]에는 시민집단이 원로원과 종교회의소 구성원들까지 함께 소집시킨 가운데 자체적으로 새로운 황제 후보를 물색하여 [[니콜라오스 카나보스]]라는 사람을 황제로 선포하기까지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