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재흥 (문단 편집) === [[일본육군사관학교]] 재학 시절 === || [[파일:유재흥육사예과생도.jpg|width=100%]] || || [[일본육군사관학교]] 예과생도 시절 [br] 유재흥(左), 전원상(中), [[김창규(군인)|김창규]](右) 등 조선인 동기생 || 2400명의 육사 예과 입학동기들 중 조선인은 유재흥과 [[김창규(군인)|김창규]], 전원상[* 태평양전쟁 중 월남 전선에서 전사.] 등과 3명 뿐이었다. 입학시험에 합격한 유재흥은 [[구제중학교]]를 4학년 수료 후 1년 조기 졸업하고 1938년 육사 예과에 들어갔다. 그러나 육사 예과의 교육 과정은 [[구제고등학교]]([[대학예과]])와 마찬가지로 5년 과정 졸업자를 기준으로 짜여져있었기 때문에 유재흥은 초반에 교육과정을 따라가기 힘들었고, 졸업 성적까지도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당시 일본육사 예과 생도들은 [[중일전쟁]]의 여파로 수학 연한이 단축되어 1년 과정을 마친 후 병종, 병과, 부대가 결정되었는데 유재흥은 당초 기병 병과를 희망했으나 신검에서 떨어져 보병으로 분류되었고, 이에 크게 낙심했지만 이시카와 소장의 격려로 마음을 다잡고 남은 과정을 우수한 성적으로 마쳤다고 한다. 육사 시험 보증인이자 후견인으로서 이시카와 소장 내외는 유재흥의 육사 생활 내내 그를 살뜰히 돌보아주었다. 예과 입교시 육사 예과의 교수부장으로 있었고 대부 근무를 나갈 당시에는 [[https://ja.m.wikipedia.org/wiki/%E8%BF%91%E8%A1%9B%E5%B8%AB%E5%9B%A3|근위2여단]]의 여단장으로 재임 중이었던 [[영친왕]] 이은의 배려로 유재흥은 영친왕의 근위보병2여단 예하의 [[https://ja.m.wikipedia.org/wiki/%E8%BF%91%E8%A1%9B%E6%AD%A9%E5%85%B5%E7%AC%AC3%E9%80%A3%E9%9A%8A|근위보병3연대]](도쿄)로 배속되었다. 그는 4개월간의 대부 근무를 마치고 예과를 수료, [[일본육군사관학교]] 본과로 진학하였다. 육사 본과에서는 예과 때와 달리 방황하지 않고, 공부에 매진했다고 하며,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생활 와중에 단비와 같은 일요일 외출을 기다리며, 일요일마다 [[영친왕]]이 마련해준 일요하숙에서 이용문, 박범집, 강석우, 노태순 등의 선배들과 후배 정래혁, 신상철 등 계림회 선후배들과 시간을 보내며 친목이 두터웠다고 한다. 특히 예과 조선인 동기인 김창규와 전원상은 병과가 달라 본과 진학 후 만날 기회가 드물었는데, 일요일마다 계림회에서 모여 외로움을 달랬다고 한다. 또 [[영친왕]]이 매년 계림회 구성원들을 중국집에 데려가 포식하게 해주었으며, 본인이 참석하지 못할 때엔 시종 무관을 대신 보내어서라도 회식을 시켜줬다고 한다. 계림회원들은 매년 명절에 아카사카에 거주하던 영친왕 그리고 [[시부야]]에 살던 [[모모야마 켄이치|이건 공]], [[이우|이우 공]]에 세배를 드렸다고 한다. 본과로 진학하자 [[정일권]]을 비롯한 [[만주군관학교]] 졸업생 30여 명이 편입해왔으나 만주국 생도대로 따로 편성되었고 과목마다 이들은 수업에서 제외되기도 하는 등 별도 취급되어 조선인(계림회)이나 기타 일본육사 생도들과는 교류가 없었다고 한다. 교정에서 마주치면 고개를 돌리게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유재흥은 육사 본과에서 황족인 가야 구니나가(賀陽邦寿)[* 1922~1986. [[가야노미야|가야노미야(賀陽宮)]]의 3대 당주]와 깊이 교류하며, 높은 신분에도 조선인인 자신을 차별하지 않고 친밀하게 대해주었다고 회고한다. 또한 구대장과 중대장 역시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자신을 아껴주어 후일 동기생들로부터 질시 어린 부러움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또 그는 본과 생활을 하면서 생도들 사이에도 파벌이 존재한다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5.15사건과 2.26사건 등 쿠데타의 여진이었는지는 몰라도 "천황께 충성"을 강조하며 정통파를 자처하는 파벌이 하나 있었고, 자신도 그에 동참하라는 권유를 받으면서 엄격한 군율과 상명하복 체제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움직임이 인다는 데 많은 생각을 했고, 자신은 그러한 가입 권유를 거절한 후, 오로지 조선인 생도들의 일요하숙인 계림회와 예과 시절 결정된 자대인 [[https://ja.m.wikipedia.org/wiki/%E8%BF%91%E8%A1%9B%E6%AD%A9%E5%85%B5%E7%AC%AC3%E9%80%A3%E9%9A%8A|근위보병3연대]] 모임에만 참석했다고 한다. 예과 때 휴가에는 질병으로 귀가하지 못했지만, 본과 휴가 때는 평양에 있던 자택으로 가서 보병77연대 평양유수대장으로 있었던 부친 [[유승렬]] 대좌의 친구에게서 일본도를 받아 군도로 패용하기 시작했다. 1941년 4월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상위권으로 졸업(제55기)[* 동기 중 후일 [[육상자위대]] 막료장 長野茂門, [[항공자위대]] 막료장 竹田五郎 등이 배출되었다.]하고 견습사관으로 동기생 3명과 함께 근위보병제3연대 유수대(東京 제6부대) 보병포중대에 배치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