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육영수 (문단 편집) === 사망하지 않고 대통령 배우자로 계속 있었다면? === 박근혜는 어머니 육영수를 여의고 난 뒤 [[영세교]] 교주인 [[최태민]]과 [[최순실]] 부녀에게 극도로 헤어나올 수 없을 정도로 빠지게 되었기 때문에 일각에서는 육영수가 [[문세광]]의 총탄에 암살당하지 않고 1970년대 후반기까지 더 살아 있었다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육영수는 야당 인사들이나 반대자들에 대해 고문, 납치, 암살 등을 향한 정치 공작으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던 [[박정희 정부]]에 대한 여론을 부드럽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또한, 박정희의 정치적 감각에는 육영수의 조언이 한 몫했다는 얘기도 있는 만큼 남편 내조를 잘 한 것을 보면, 2인자들의 상호견제를 통한 1인자의 권력을 유지한다는 벼랑 끝 체제를 장기간 유지해온 이면에는 육영수가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전인권의 <박정희 평전>에서는 박정희는 겉으로는 안 그래보였지만 속으로는 아내에게 내심 굉장히 의지해서 자신을 죽이려던 문세광의 테러로 부인이 사망한 충격 탓에 마음이 극도로 약해졌다. 인간이 받는 [[스트레스]] 중 가장 큰 것이 배우자나 자녀의 사망에 의한 트라우마라는 연구 결과도 있을 정도이다. 이는 박정희 경호를 명분으로 자신의 권한을 넘어서는 월권을 행사하여 주변의 원성을 사던 [[차지철]] 같은 사람에게 흔들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추측은 유신정권 후기 [[박정희]]의 행보를 설명하려는 가설에 불과할 뿐, 실제로 당시 박정희의 심리가 어땠는지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육영수가 1974년 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 당시 문세광의 총탄에 사망하지 않고 가벼운 총상만 입은 채 살아남았거나 혹은 1970년대 중, 후반기까지 생존하여 대통령 배우자 자리에 남아 있었다고 해도 이미 1970년대 후반기에 정권의 기반이 흔들렸다는 것을 들어 별로 달라지지 않으리라는 의견도 있다. 2차 오일쇼크 등으로 경제성장이 둔화되고 [[YH 사건]] 등으로 박정희 정부에 대한 정치적 압박이 시작되고 있었고, 동시에 민주화에 대한 요구가 나타나기 시작했기에 박정희 정권이 언젠가 무너질 가능성은 있었지만, 적어도 [[김재규]]의 총탄에 급격하게 붕괴될 정도로 막장스럽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부에서는 육영수가 이 사건에서 총탄에 맞아 사망하지 않고 남편 박정희가 암살당하던 1970년대 말까지 생존하여 [[청와대]]를 나갔다면 대한민국이 민주화된 이후에 딸 박근혜가 아니라 육영수가 남편 박정희의 후광을 앞세워 정치계에 입문해 정치를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박정희의 아내이던 육영수도 그 시기까지 살아있었다면 충분히 박정희의 후광을 업고 정계 진출이 가능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