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의평군 (문단 편집) == 생애 == 의평군 이원생이 정확히 언제 태어났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정종의 장남이라는 것으로 보아 최소 숙부 정안대군의 장남 [[양녕대군]]보다는 나이가 많을 것으로 보이므로 조선 건국 이전에 태어났을 가능성이 높다. 그의 아버지 이방과는 태조의 적차자라서 정통성이 가장 높았고 만일 태조가 순리대로 이방과를 세자로 정했다면 이원생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숙부 정안군이 일으킨 [[무인정사]]로 아버지 영안군이 왕이 되었고 정종의 원자 책봉 시도까지 있었으나 이미 모든 권력은 숙부가 차지하고 있어 부왕은 힘이 없었고 그렇게 이원생은 적자가 아닌 서자라는 이유로 세자가 되지 못하고 세자 자리를 숙부에게 빼앗긴다. 1412년([[태종(조선)|태종]] 12년)에 부정윤(副正尹)이 되었고 1417년(태종 17년)에는 원윤(元尹)을 거쳐 의평군에 봉해졌다.[[http://sillok.history.go.kr/id/kca_11709012_002|#]] 1419년([[세종(조선)|세종]] 즉위년) 아버지 [[정종(조선)|정종]]이 죽자 [[상주]] 대리가 되어 정종에게 소렴전을 올렸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0109027_002|#]] 1422년(세종 4년)에는 태종의 상 중에 말을 타고 백관 앞을 지났다하여 [[사헌부]]에서 탄핵당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0410007_002|#]] 1425년(세종 7년)에는 [[태조(조선)|태조 이성계]]의 [[도장]]을 베껴서 사패를 위조할 때 공모했다는 죄로 직첩을 몰수당한 뒤 [[유배]]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0703028_002|#]] 1427년(세종 9년) 자유의 몸이 되었고 1454년([[단종(조선)|단종]] 2년)에 다시 의평군에 봉작되었다. 즉 군호를 되찾은 게 거의 30년만이라는 거다.(...) 태종 계열의 임금들이 서장자였지만 어쨌든 정종의 장자였던 그를 경계했던 것으로 보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