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기붕 (문단 편집) == 여담 == * 실제 왕실의 후손으로 [[효령대군]]의 17대손이며 아버지는 예조판서 이회정의 손자 이낙의다. * 이기붕은 생전에 국어학자 [[한갑수(1913)|한갑수]]와 [[손도심]], [[임철호]], [[오범수]], 최승만, 김영찬, [[김일환]] 등 지인 150여명을 모아다가 '만만클럽'을 만들기도 했는데, 멤버들은 이기붕 사후 1970년에 묘비까지 쓸 정도로 인연을 계속 이어갔다. * 4.19 혁명 직전 "민족의 해와 달"이라는 책이 출간되어 이승만을 민족의 해, 이기붕을 민족의 달로 찬양하였다.[[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bookhunt&logNo=110150742524&referrerCode=0&searchKeyword=민족의%20해와%20달|#]] 출판업계까지 권력에 순종하였다는 증거인데 책이 나온지 1년 만에 혁명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았으니 그야말로 권력무상이다. * [[박마리아]]의 서적도 충격적이라는데 서적을 [[신촌]] 헌책방에서 본 [[마광수]]의 에세이에 보면 "누가 이 글만 알고 박마리아가 나쁜 사람인지 생각할 수 있는가!"라고 한탄했다. [[네이버]] 지식인 같은 곳을 보면 여성 독립운동가인 [[김마리아]]와 혼동하는 글도 발견되는데 전혀 다른 사람이니 주의할 것. 김마리아와 박마리아의 공통점은 [[세례명]]과 여성 교육운동가라는 점 뿐이다. * 이승만의 정치 분석 서적 '[[일본 내막기]]'의 번역에도 이기붕과 박마리아가 관여했다. 책인 'Japan Insideout'은 2차대전 전에 미국에서 영어로 출간되었다. 책을 번역 의뢰받은 분은 기껏 번역했더니 박마리아가 중간에 가져와서 [[최덕신]] 번역으로 먼저 책을 만들어 이승만에게 선물했다. 나중에 책은 동일한 번역자의 손으로 '일본 [[군국주의]]의 내막'이라는 제목으로 1980년대에 재출간된다. * 이기붕의 유산 상당수는 상속인인 사후 양자 이강복이나 연고자 등에게 양도됐으나 이승만 정권 때 부정축재한 자금은 4.19 혁명 이후 환수되어 [[공항대로]]를 건설하는데 쓰였다. 이기붕의 저택은 1960년 4.19 혁명 당시 시위대에게 가재도구 등이 파손된 후 5월 27일부터 '4.19혁명 희생자 유족회'가 사무실로 썼다. 1963년 자택이 국가로 환수되자 4.19 관련 단체에 무상 대여하여 1964년 4.19기념 사설도서관이 개설됐는데 현재의 [[4.19혁명기념도서관]]이다. 1971년에 새 건물이 들어서면서 과거 이기붕 때 흔적은 전부 사라졌다. * 3.15 부정선거 및 이승만의 양자 관련으로 한국 권력 2인자를 굳히면서 이승만의 자유당 정부가 무너지게 되는 계기를 마련한 자이자 대한민국 정치인 사상 최악의 인물로 손꼽히는 자이지만 현재 욕은 이승만이 거의 다 먹는다. 하지만 부정선거 이후 사회 분위기는 이기붕이 부정선거 책임자로 욕먹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애초에 이승만은 조병옥이 사망함에 따라 단독 후보로서 당선이 확정이었기 때문에 굳이 부정선거를 할 이유가 없었다. 시민들은 이승만이 독재자이기는 해도 [[독립운동가]]였기 때문에 시민 대표를 보내 정중하게 면담을 요청했고 이승만도 당시 나이가 많아서 언제 죽을지 모르겠고 버티는게 자기에게 불리하다고 판단했는지 하야를 선택했는데 사실 하야 때는 나이가 85세였다. * 6.25 전쟁 직전까지 북한이 점령중이었던 강원도 고성군 해변에 김일성이 당시 어린아이였던 김정일과 함께 머물렀던 시설(별장)이 지금도 남아있는데, 정전 직후 이승만과 이기붕도 인근 화진포 주변에 별장을 지어 지금까지 남아 관리되어 오고 있다. * 사적으로는 [[이종찬]]과 친한 사이였다. 이종찬이 육군참모총장에 갓 임명될 당시 미혼이었는데, 이미 마음에 둔 여인이 있었지만, 집안이 형편없다는 이유로 어머니의 반대가 심했다. 이에 이기붕이 직접 이종찬의 어머니를 찾아가서 '일국의 참모총장이 미혼으로 남아 있는건 체면상 맞지 않은 일'이라고 설득해서 이종찬이 혼인하게 된 계기가 됐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