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덕무 (문단 편집) == 여담 == * 단 것이 귀하던 시절 이덕무는 유독 단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이서구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자기 말로는 성성이([[오랑우탄]])가 [[술]]을 좋아하고 [[원숭이]]가 [[과일]]을 좋아하는 것처럼 사족을 못 썼다고 한다. 그런데 [[박제가]]가 염치없이 세 번이나 단 것을 먹으면서 자기에게는 주지도 않았을 뿐더러 예전에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먹으라고 줬던 단 것까지 몰래 훔쳐 먹었으니 이서구에게 대신 꾸짖어 달라고 편지까지 쓴 기록이 남아 있다. >내가 단 것에 대해서는 마치 성성(狌狌)이가 술을 좋아하고 원숭이가 과일을 즐기는 것과 같으므로 내 친구들은 모두 단 것을 보면 나를 생각하고 단 것이 있으면 나를 주곤 하는데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의 호)만은 그렇지 못하오. 그는 세 차례나 단 것을 먹게 되었는데, 나를 생각지 않고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남이 나에게 먹으라고 준 것까지 수시로 훔쳐먹곤 하오. 친구의 의리에 있어 허물이 있으면 규계하는 법이니, 족하는 초정을 깊이 책망해 주기 바라오. >---- >-간본 아정유고 권6 문(文)-서(書)- * [[일본]]에서 [[포르투갈]]로부터 받아들여 개량한 [[카스텔라]]에 대해서도 가수저라(加須底羅)로 [[한자]]로 [[음차]]해 기록을 남긴바 있다. * [[책덕후]]로서의 면모를 보면 무척 [[가난]]한 삶을 보낸 것과 어우러져서 읽는 사람을 [[눈물]]짓게 하는 면이 있다. 방이 너무 추워서 이불 위에 <[[논어]]>를 펼쳐서 덮고 바람은 한서를 병풍처럼 펼쳐세워 막아 겨울을 났다고 하는 일화가 있다. 또한 책을 살 수가 없어서 책을 빌려온 뒤 그걸 베끼고 돌려주는 식으로 소장 도서를 늘리기도 했던 모양이다. 훗날 정조가 그를 중용하여 [[류득공]], [[박제가]] 서이수와 함께 [[규장각]] 최초로 초대 검서관의 자리를 주었는데[* [[영조]] 때부터 서얼 출신도 문과 실시가 가능했고, [[정조(조선)|정조]] 때부터는 [[청요직]]인 규장각 검서관까지 진출을 하였다.] 검서관이라는 자리는 쉽게 말해 학술적인 업무를 담당하여 경연을 기록하거나 자료를 찾는 등의 일을 하는 직위인데 규장각의 희귀한 책을 접할 수 있어서 좋아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하지만 일로 책을 접하는 것이다보니 자신의 집 서재에서 책을 읽는 것처럼 편하지 않다는 기록 역시 남겼다.] 후일 박지원이 말하길 이덕무가 평생토록 읽은 책이 거의 2만여 권이 넘는다고 했다. 그에 걸맞게 [[별명]]도 '간서치(看書痴)'라 해석하면 '책만 보는 바보'였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책을 읽다 보면 배고픔도 아픈 것도 더운 것도 추운 것도 잊을 수 있었다고 하니 그야말로 비교불가한 진성 책덕후로 서재 이름도 '구서재(九書齋)'라 지었다. 이덕무는 1761년 <간서치전(책만 보는 바보 이야기)>라는 짧은 [[자서전]]을 남겼는데 이를 현대말로 다듬어서 낸 책(책만 보는 바보, 2005년 보림[[출판사]] 발행)도 있다. >自塗鴉之年1, 至二十一歲, 手未嘗一日釋古書. >어릴 때부터 21살에 이르기까지 손에서 일찍이 하루도 옛 책을 놓지 않았다. > >其室甚小, 然有東牕, 有南牕, 有西牕焉, >그의 집은 매우 작았지만 동쪽과 남쪽과 서쪽에 창이 있으니, > >隨其日之東西, 受明看書. >해가 동서로 가는 것에 따라서 빛을 받아 책을 보았다. * [[선비]]의 일상 생활에 대해 서술한 <사소절>을 보면 굉장히 꼼꼼한 [[성격]]으로 보이며 지금 눈으로는 '뭐 이런 거까지 신경 쓰나' 싶을 정도로 사소한 일에도 [[예절]]을 지킬 것을 강조하였다. 또한 추락의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북한산]] 백운대를 오르지 않았으며 [[복어]]도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다른 실학자들도 마찬가지라 '[[독극물]]이 있어 젓가락을 대기도 전에 소름이 돋는다', '복어 따위에 목숨 걸지 마라' 등으로 경계했다.] 위험한 곳을 일부러 찾아가지 말고 [[음식]]으로 목숨을 시험하지 말라는 이유에서였다. [[상추]]를 싸먹는 모습 또한 선비스럽게 싸서 먹으라고 말할 정도였다.[* 조선 시대에도 상추에 싸서 먹는 [[쌈]]요리 [[문화]]가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기록이기도 하다.] <사소절>에 실린 몇몇 어록만 봐도 깐깐한 선비로서의 의식이 그야말로 팍팍 느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남을 부를 때 ‘이놈, 저놈’ 또는 ‘이것, 저것’이라 하지 말라. 화가 난다 해서 '도적’이니 ‘개돼지’니 ‘원수’니, 또 거기에다 ‘죽일 놈’이라 욕하거나 ‘왜 안 죽니’라고도 하지 말라. 그가 아무리 비천한 사람일지라도 말이다.이것이 교양인(선비)의 예절이다." [br] >"남의 말을 들을 때 비록 내가 아는 것과 다르다 해도 내가 아는 것을 고집하여 핏대를 올리며 남을 꺾으려 들지 말라. 남의 연회에 참석했을 때도 음식이 시다느니 짜다느니 평하지 말라. 돌아와서 음식이 맛나지 않은 것을 흉보지 말라. 남의 집에 갔을 때 머리를 돌리고 눈알을 굴리며 사방 벽을 바삐 보거나 책을 마구 빼 보고 물건을 함부로 건드리지 말라. 이것이 교양인(선비)의 예절이다."[br] >"요새 사람들이 온종일 모여서 지껄이는 말이 농담, 바둑이나 장기 이야기, 여색 이야기, 술과 음식 이야기, 아니면 벼슬에 관한 이야기나 가문의 자랑에 대한 것에 벗어나지 않으니 이것 역시 민망스럽다. 이런 말을 즐겨하는 사람들이 남과 더불어 학문을 논하는 것을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br] >"상추를 싸 먹을 때 직접 손을 대서 싸 먹어서는 안된다. 너무 크게 싸서 입안이 다 보이게 벌리고 먹는 것은 상스러우므로 조심해야 한다."[br] >"요즘 조선 부녀들의 옷은 요사스럽기 그지 없다. 과거에는 여인들이 모두 옷을 펑퍼짐하게 입었다. 허나 지금의 저고리는 너무 짧고 좁으며, 치마는 너무 길고 넓다. 적삼의 옷깃을 줄이고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팽팽하며 팔을 구부리면 솔기가 터지기까지 한다. 치마는 폭을 팽팽하게 붙여 둔부를 강조해 요망하다. 저 복장의 유행은 모두 아양떠는 기생들에서 생긴 것인데 세속의 남자들은 그 자태에 매혹되어 요사스러움을 깨닫지 못하고 이를 자신의 처에게 권하고 아녀자끼리 본받게 하고 있으니 이는 심히 우려되는 일임에 틀림없다."[* [[https://bbs.ruliweb.com/family/212/board/300063/read/30640077|해당 내용을 묘사한 만화]] 작가는 [[누나향]]이다.] >---- >「사소절(士小節)」, 사전(士典)」 * 이덕무는 같은 [[책]]을 5번씩 읽는 [[공부]]법을 이용해 1번 정독한 후 반드시 느끼고 깨우친 점을 기록했다고 한다. 책을 읽는 횟수와 [[시간]]을 정해놓고 그 이상 초과되거나 모자라지 않도록 아플 때가 아니면 꼭 지켰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