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문열 (문단 편집) == 생애 == 1948년 6월 24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에서 아버지 [[재령 이씨]] 이원철(李元喆, 1915 ~ ?)과 어머니 [[창녕 조씨]] 조남현(曺南鉉, 1917 ~ 1995. 1. 29)[* 조규섭(曺圭燮)의 딸이다.] 사이에서 3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원철은 [[휘문고등학교|휘문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이던 1932년에 [[동아일보]]에서 주최한 제2회 [[브나로드 운동]]에 계몽대원으로 참여하는 등 당시에 의식 있는 인텔리였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32071900209206015&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32-07-19&officeId=00020&pageNo=6&printNo=4160&publishType=00020|1932년 7월 19일 동아일보 기사]]] 이후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가 당시 신사상에 경도되어 [[공산주의자]]가 되었으며, [[8.15 광복]] 직후에는 [[여운형]]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했다가 [[남조선노동당]]에 입당하여 활동했다. 그 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책임자를 맡았다가 [[인천상륙작전]] 이후 퇴각하던 [[조선인민군]]을 따라 월북했다. 어머니 조남현은 이문열을 [[임신]]하고 있을 적부터 삐라를 돌리는 등 남편을 지원했는데, 그만 경찰에 잡혀서 유치장에 갇히게 된다. 아버지는 아내의 배를 어루만지며 '이 아이는 뱃속에서도 싸워온 열렬한 투사다' 라고 하면서 그에게 '열(烈)' 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문열은 필명이며 본명은 이열(李烈)이다.] >어머니도 좌익 활동으로 해방 공간에서 징역(懲役)을 사셨어요. 제 본명이 이열(李烈)입니다. 어머니가 저를 가지셨을 때 아버지의 지령에 따라 부른 배에다 삐라를 감추고 효창공원 행사장에 가서 뿌렸다가 검거되셨어요. 5개월 살고 나오셨는데, 아버지가 '너는 엄마 배 속에서부터 옥살이하며 싸웠으니까 나중에 커서 열렬한 투사로 자라라'라며 지어준 이름입니다. [[http://m.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E&nNewsNumb=202211100033|#]] 1950년 아버지가 월북하자, 이문열은 그해 어머니를 따라 어머니의 고향인 [[경상북도]] [[영천시|영천군]] [[금호읍|금호면]](현 [[영천시]] [[금호읍]]) 석섬리에 잠시 머물다가 이듬해인 1951년 조상 대대로 세거해오던 [[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 원리리[* [[재령 이씨]] 집성촌이다.] 320번지로 [[http://www.kbyyed.go.kr/yybandi/writer/sub4_2.cshtml|이사를 갔다]]. 당시 유년기를 보냈던 곳은 2013년 3월 18일 [[문화재자료|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pageNo=1_1_2_0&ccbaCpno=3413706030000|영양 석간고택]](英陽 石澗古宅)[* 이 고택이 있던 자리에 이문열의 12대조 항재(恒齋) 이숭일(李嵩逸, 1631 ~ 1698)의 살림집이 있었다고 하며, 이후 이문열의 5대조 좌해(左海) 이수영(李秀榮, 1809 ~ 1892. 1. 29)이 이 고택에서 [[https://terms.naver.com/entry.naver?cid=40942&docId=4337146&categoryId=33383|생활하면서 학문을 닦았다고 한다]]. (이문열의 아버지 이원철은 좌해 이수영의 4대 주손(胄孫)이다.) [[6.25 전쟁]] 이후 이문열과 14촌 지간의 족조(族祖) 석간(石澗) 이철호(李哲浩, 1901 ~ 1985)가 이 고택을 [[https://www.yyg.go.kr/ybscript.io/gunji/gunji_page?book=2&page=335|매입하면서]] 고택의 명칭이 석간고택이 되었다.]이었다고 한다. [[연좌제]]가 있던 시절이라 이사를 자주 다니는 바람에 정규교육을 제대로 이수하지 못했다. 중, 고, 대학교를 모두 중퇴했으며, 정규교육을 이수한 기간은 도합 8년여에 불과하다. >아버지가 월북한 뒤, 나는 끊임없이 우와 좌를 비교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장 보러 간 어머니가 갑자기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돌아올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경찰이 미행 붙었다는 걸 알아차린 거죠. 숱하게 이사도 다녔습니다. 우리 사정을 모르는 낯선 동네에서 한 2년 자유롭게 지내다 보면 경찰이 찾아왔죠. 1968년 [[주민등록법]]이 생기기 전까지는 그 잠깐의 자유를 누리려 2~3년씩 동네를 옮겨가며 지냈습니다. 어머니는 생이별한 남편을 마음 놓고 그리워하지도 못했습니다. '영감 다시 내려오면 우야노' 하고 맨날 걱정하셨죠. 식구들 전체가 간첩으로 몰릴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https://www.hankyung.com/life/article/2022051567771|#]] 1953년 경상북도 [[안동시|안동군]]으로 이사를 가서 안동중앙국민학교[* 1978년 3월 1일 안동국민학교로 교명이 변경되었으며, 1996년 3월 안동초등학교로 [[https://terms.naver.com/entry.naver?cid=46615&docId=795158&categoryId=46615|개칭되었다]].]에 입학한 이후 1957년 서울로 이사해 [[서울종암초등학교|서울종암국민학교]]로, 1958년 [[밀양시|밀양]]으로 이사해 밀양국민학교로 전학을 가 1961년 졸업했지만 같은 해 진학한 밀양중학교는 6개월 만에 그만두고 말았다. 이후 [[검정고시|고등학교 입학자격 검정고시]]에 합격해 1964년 [[안동고등학교]]에 입학했으나 별다른 이유 없이 1965년 중퇴하고 [[부산광역시|부산]]으로 이사를 가서 이후 3년간 하는 일 없이 지냈다. 한동안 주먹질로 세월을 축내며 떠돌았는데, 건달 시절을 청산하고 새 삶을 준비하는 과정을 그린 자전적 소설이 <[[젊은 날의 초상#s-2.3|그해 겨울]]>이다.[* 이문열은 젊은 시절 한주먹 했던 작가로도 유명한데, 이 암울한 청소년기 때문이다.] [[검정고시|대학교 입학자격 검정고시]]를 거쳐 1968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에 입학했다. 1970년 대학교를 중퇴하고[*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을 졸업했어도 당시에 남아있었던 [[연좌제]] 때문에 [[교사]]가 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http://news.imaeil.com/page/view/2007030207183556886|#]]] [[사법시험]]을 준비했으나 3번 연속 낙방했다. 1973년 결혼한 뒤 군에 입대해 [[통신병]]으로 근무했으며, 1976년 전역한 후에는 [[경상북도]] [[대구광역시|대구시]]에서 학원 강사로 일하다가 197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단편 <나자레를 아십니까>가 입선했고, 이듬 해에는 매일신문사 기자로 근무하기도 했다. 이때부터 이문열이라는 필명을 사용했다. 197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시 신설됐던 중편 부문에 혹해서 써낸 소설 <새하곡>이 당선되면서, 32세의 나이에 드디어 중앙문단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같은 해에 중편소설 <[[사람의 아들(소설)|사람의 아들]]>이 대박을 치면서 순식간에 인기작가 반열에 올라섰다. 작가의 회고에 따르면 이 작품은 애당초 1973년 모 잡지의 신인 모집에 투고되었던 소설이라고 한다. 당시 26살이던 이문열은 군입대를 앞두고 그때까지의 문학 수업을 결산한다는 의미로 1년간 힘을 쏟아 원고지 350여 장의 중편소설을 만들어냈다. 이 소설을 공모에 투고한 뒤 곧바로 입대했는데, 6달 뒤 첫 휴가를 나와 결과를 확인해보니 예심도 통과하지 못했고 이문열은 이 사실을 알고 상당히 낙심했다고 한다. 이후 1979년에 문예지 세계의 문학에서 원고 청탁이 들어오자 이 작품을 다듬어 내밀었는데, 잡지사 측으로부터 그냥 발표할 것이 아니라 오늘의 작가상에 응모하라는 연락을 받았으며, 결국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하고 단행본으로 출간되면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다. 이문열은 등단 첫해에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이듬해인 1980년 전업작가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그야말로 왕성한 작품활동을 이어나갔다. 아무래도 오랜 습작 기간 동안 쌓인 재고가 한몫을 한 것으로 보인다. 습작기에 썼던 작품 중 발표된 것만 중편이 3편, 단편이 9편이었다고 한다. 데뷔한 지 5년도 안 되는 기간 동안 <[[들소]]>, <[[젊은 날의 초상#s-2.3|그해 겨울]]>, <어둠의 그늘>, <[[필론과 돼지]]>, <알 수 없는 일들>, <[[금시조]]>, <[[익명의 섬]]>, <칼레파 타 칼라> 등의 중단편들을 비롯해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80), <[[젊은 날의 초상]]>(81), <[[황제를 위하여]]>(82), <[[레테의 연가]]>(83), <[[영웅시대]]>(84) 등의 작품들을 정력적으로 발표했다. 수상경력도 화려하다. 82년 <금시조>로 [[동인문학상]]을, 83년 <황제를 위하여>로 대한민국문학상을, 84년 <영웅시대>로 중앙문화대상을 수상한다. 그러나 이후 1984년부터 1987년까지 약 3년간 잠시 창작을 쉬게 되는데, 그렇다 보니 이문열의 작품 연보를 살펴보면 연도별로 작품 수에 있어서의 편중이 눈에 띄게 나타난다. 그리고 이 3년간의 공백기를 가진 뒤 단편 소설 복귀작으로 발표한 작품이 바로 그 유명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다. 80년대 후반에 해당하는 이 시기에도 많은 작품들을 발표했다. 1986년 대하소설 [[변경]]을 [[한국일보]]에 연재하기 시작했고, 1988년에는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를 발표해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1991년 출간된 장편소설 <[[시인(소설)|시인]]>은 상업적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평론가들과 해외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평론가 김욱동은 이 작품을 이문열 전성기의 마지막 작품으로 보기도 했는데, 이는 이후 발표한 <오디세이아 서울>이나 <성년의 오후> 등의 소설이 이전의 작품들에 비해 완성도가 그저 그런 편이었기 때문이다. 87년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으로 [[이상문학상]]을, 92년 <시인과 도둑>으로 [[현대문학상]]을 수상했다. 88년에는 [[이문열 평역 삼국지]]를 출간해 현재까지 약 1,800만 부의 판매고를 올리는 무시무시한 기록을 세웠다. 91년에는 [[이문열 평역 수호지]]를 출간한다. 이후 1994년에는 뮤지컬 [[명성황후(뮤지컬)|명성황후]]의 원작인 장막 희곡 <여우 사냥>과 <이문열 중단편전집>을 비롯해 소설집 <아우와의 만남> 등을 발표했으며, 1997년에는 장편소설 <[[선택(소설)|선택]]>을 출간해 여성주의 진영과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94년부터 97년까지는 [[세종대학교]] 교수로 부임하게 된다. 1998년 <[[변경]]>이 전 12권으로 완간되었고 같은 해엔 부악문원을 열어 후진 양성에 힘쓰기 시작했다. 98년 <전야, 혹은 시대의 마지막 밤>으로 21세기문학상을, 99년 <변경>으로 호암예술상을 수상했다. 2000년대 이후에 들어서는 장편소설로 <[[아가]]>(00)[* 대중적인 성공을 한 것도 아니었고 평자들의 반응도 심드렁한 편이지만 작가인 이문열은 만족하는 작품 중 하나로 꼽기도 하는 소설이다.], <[[호모 엑세쿠탄스]]>(06), <[[초한지]]>(08), <[[불멸]]>(10), <[[리투아니아 여인]]>(11)과 소설집 <술단지와 잔을 끌어당기며>(01)[* 이 책이 출간된 2001년 이후에는 중단편을 아직 1편도 쓰지 못했다고 한다.] 등을 출간했다. 2001년에는 한 칼럼에서 시민단체를 정권의 [[홍위병]]에 비유한 것으로 인해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으며, 결국 책 장례식까지 당하는 일이 일어났지만 이후에도 보수 성향의 발언들을 계속해나갔다. 2003년에는 당시 위기에 빠져 있었던 [[한나라당]]의 공천 심사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2012년 <리투아니아 여인>으로 동리문학상을, 2015년 은관문화훈장을 수상했다. 2012년에는 [[김유신]]의 일대기를 다룬 소설인 <대왕 떠나시다>를 연재하기 시작했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중단했다. 2017년, 작가로서는 실로 오랜 침묵 끝에 1980년대[* 시기상으로 <변경>의 다음 부분에 해당하며, 여러 차례 이 시기를 작품으로 형상화하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를 다룬 소설인 <둔주곡 80년대>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가 그의 전성기로, 유명세와 다양한 작품세계, 판매량을 따라갈 다른 작가는 없었다. 각종 정치적 논쟁에 휩쓸렸던 90년대 이후의 작품은 전성기보다 비교적 저평가되고 있다는 시각이 있다. 한편 이문열의 소설들 중에선 안 뜬 작품도 분명히 존재하는데, 장편의 경우 <미로의 날들>(84), <우리가 행복해지기까지>(89), <오디세이아 서울>(93), 그리고 출간도 안 된 소설 <성년의 오후>(93~94)가 대표적이다. 우파적 정치성향을 보여 왔다. > [[우파]]는 자유, 평등, 박애 등 인간의 여러 가치 중에 자유를 우선순위에 둡니다. [[좌파]]는 평등을 우선시하고요. 제가 동의하기 어렵고 거추장스러운 건 좌파가 주창하는 평등이 [[전체주의]], 집단주의로 흐르기 때문입니다. 여러 사람이 길을 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요. 전력 질주 달리기도 있고, 산책도 있고, 모두가 똑같이 이인삼각처럼 발 맞춰서 가는 것도 제각기 장단점이 있을 것입니다. 나는 각자 자신의 속도로 걸어갈 수 있는 게 자유라고 생각합니다.[[https://www.hankyung.com/life/article/2022051567771|#]] [[대한민국 제5공화국|제5공화국]] 때 여당 [[민주정의당]]의 국회의원 공천 제의를 받은 적이 있으나 정치에 뛰어들지 않았다. 다만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17대 총선]]을 앞두고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을 한 경력은 있다. 그러나 1990년 무렵 한때 [[장기표]], [[이우재(1936)|이우재]] 등의 재야세력이 주축이 된 '''[[민중당(1990년)|민중당]]'''에 참가한 경력이 있다. 민중당이 망하고 [[이재오]][* 이문열과 같은 재령 이씨, 같은 마을 출신이다.], [[김문수]] 등과 같은 거물들은 한나라당의 전신인 [[신한국당]]에 입당했다. 한국 좌파 진영에 대한 거부감은 오래전부터 밝히고 있다. 그의 초기작들에서도 그런 기색이 엿보여서 좌파 문단세력으로부터 반동 취급을 받는다. 특히 문단계 자체가 태생적으로 진보적 색채가 강하다보니 이문열은 비판도 많이 받았다. 2009년 [[한국외국어대학교]] 용인캠퍼스 인문대학의 석좌교수로 임용돼 세계문학에 대한 강의를 했고, 같은 해 출범된 대통령 직속 사회통합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됐다. 2018년 미투운동으로 성추행 사실이 폭로된 [[고은(시인)|고은]]의 행적을 연상케 하는 소설 [[사로잡힌 악령]]이 주목받기도 했다. 같은 해에 [[모바일 게임]] 삼국지M의 홍보모델로 발탁됐다. 이문열과 민음사는 1979년부터 40년 간 작가와 출판사가 함께 성장하는 모범사례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2017년 민음사 박맹호 사장이 별세하고 2세 경영이 시작되면서 그 관계가 끝이 났다.[[https://m.yna.co.kr/view/AKR20190608042000005|#]][[https://www.joongang.co.kr/article/23491899#home|#]] 2019년 민음사와의 계약을 해지하고 2020년 알에이치코리아와 계약, 삼국지를 시작으로 90여 권의 책을 다시 내고 있다. 고전소설 평역들은 삽화 변경, 지도 미수록 등의 문제로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 이후 오래 절판되었던[* 정치성이 강해서 비판을 받아온 오디세이아 서울, 호모 엑세쿠탄스, 여성에 대한 관점으로 비판을 넘은 비난을 받았던 아가, 선택 등이 이에 속한다.] 작품들이 재간되는 등 RHK에서 상당한 공을 들이고 있다. 2022년 [[https://www.hankyung.com/life/article/2022051567771|인터뷰]]에서 다음 작품으로 "[[1980년대]]를 정면으로 증언하는 작품을 쓰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2022년 7월 집필실이 있는 [[https://www.yyg.go.kr/jghcenter/doodle/facility/gwangsan_n|경북 영양 광산문학연구소]]에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220701/114247837/1|화재가 발생하여 전소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