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소룡 (문단 편집) === 철학자? ===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소룡을 철학자로 보기는 힘들다. 그의 철학은 [[도가]] 사상의 영향을 받아 자연스러움을 강조하며, 생각만으로는 불충분하다. 행동이 있어야 한다[* 이소룡 이전 [[미야모토 무사시]]와 [[최영의]]도 이미 유사한 이야기를 했다.]라는 말처럼, 능동적인 삶을 더 높게 평가했다. 그리고 물이 되십시오[[https://youtu.be/I7fDHCRJakY|#]]와 같은 말을 미국의 방송에서 언급하며, 유연한 사고와 행동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다만 이는 후술하겠지만 그의 사후에 재조명된 것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동양철학, 특히 [[노자|노]][[장자|장]] 사상(老莊思想)이라고도 하는 [[도가]]의 '상선약수(上善若水)'는 그렇게 이소룡의 입을 통해 북미에 전파되었다고도 하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18세기부터 서양에 도가 사상이 널리 알려져 있었고, 관련서적들도 유럽국가에 이미 많이 출판되어 있었다. [[https://archive.org/search.php?query=Lao-tzu&sort=date|노자]]와 [[https://archive.org/search.php?query=Chuang-tzu&sort=date|장자]] 관련 서적만 해도, 출판시기가 1842년, 1889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소룡의 인지도가 너무나 높았던 덕분에, 이소룡을 통해 북미의 일반대중들에게도 도가사상이 알려졌다는 게 맞다. 이에 이소룡은 [[철학]]가/철학자라는 주장도 나오는데, 그는 노장사상 등을 자신의 무술에 맞게 인용하거나 각색했을 뿐, 새로운 해석을 하거나, 새로운 철학을 정립했다거나, 철학적 연구 성과를 낸 사람이 아니다. 학원가의 유명 과학강사가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공인된 연구 성과가 없으면 그를 과학자라고 하긴 곤란하듯, 그를 철학가라고 칭하는 것은 무리다. 다만 당시에 무술가나 영화배우로서는 드물게도 철학적인 면모가 있는 사람이었다거나, 무술 철학가라고 하는 게 좀 더 공정한 평가일 듯. 그의 [[http://www.amazon.com/Tao-Jeet-Kune-Bruce-Lee-ebook/dp/B007JPNIHQ/ref=sr_1_4?s=books&ie=UTF8&qid=1461980034&sr=1-4&keywords=bruce+lee+philosophy|저서]]나 [[http://www.amazon.com/Bruce-Lee-%C2%97-Wisdom-Way/dp/0897501853/ref=sr_1_8?s=books&ie=UTF8&qid=1461979989&sr=1-8&keywords=bruce+lee|사후]] [[http://www.amazon.com/Warrior-Within-Philosophies-Bruce-Lee/dp/0809231948/ref=sr_1_5?s=books&ie=UTF8&qid=1461979989&sr=1-5&keywords=bruce+lee|출판된]] [[http://www.amazon.com/Bruce-Lee-Striking-Thoughts-Library/dp/0804834717|책들]]을 읽어보면, 동양철학을 새롭게 해석했거나 정리한 것과는 거리가 있으며, 자신의 이상, 주장, 기술에 맞는 동양철학의 경구나 구절들을 인용하거나 짜 맞춘 정도이다.[* 당연하다. 이소룡 본인의 저술도 아닌, 이소룡 사후, 이소룡 생전의 발언들을 수집하고, 그의 유품 등에서 나온 정리노트 등을 짜깁기한 것이고, 검색해보면, 필진(筆陣)들 중 동양철학 전문가는 찾아보기 힘들다.] 정리하자면 여러 철학 사상을 자신의 무술관에 접목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 이소룡 이전부터 시작된 동양무술 열풍에 이어, 이소룡이라는 불세출의 스타의 등장 덕에 부쩍 더 커진 무술시장이지만, 이소룡 사후의 반응은 '이소룡의 생전 사상과 자료에 대한 정리 및 보급,'그리고 '유명세를 이용한 상업주의 마케팅'으로 나뉜다. 상업주의를 통해 그의 유산을 알리는 것엔 생각보다 긍정적인 면도 있다. 이소룡 본인이 기록, 정리에 꼼꼼한 것도 있었지만, 이런 상업주의로 인해 이소룡 관련 자료, 사진, 영상 발굴이 이어져, 관련 동영상과 사진이 넘쳐나게 하는 결과를 낳았으니까.[* 자주 언급되는 롱 비치(Long Beach) 국제 가라테 대회에서의 이소룡 관련자료 역시, [[https://en.wikipedia.org/wiki/Bruce_Lee#Jun_Fan_Gung_Fu|이소룡 사후, 할리우드에 의해 발굴된 것]]이다.] 최고 전성기에 급사한 동양의 무술영화배우라는 소재는, 특히 서구권의 대중들에게는, [[오리엔탈리즘|동양적이고 신비스러운 이미지]]를 덧씌워 홍보전략으로도 삼기에도 안성맞춤이었으리라. 게다가 당시 북미에서는 대형 소매 체인점 등의 등장과 함께, 이전까지 사치품 취급 받았던 카메라, 컬러TV 등이 1960년대부터 가격이 하락하기 시작했던 호재[* 신기혁, 신인섭, 2012, 《미국 광고사(A History of Advertising in America)》, 한국학술정보(주), pp.163~164]도 있었기에, 이소룡 관련 영상물, 출판물, 잡지 등이 쏟아져 나왔다. 이소룡의 대표적인 저서라는 《절권도의 도(Tao of Jeet Kune Do》의 [[https://en.wikipedia.org/wiki/Tao_of_Jeet_Kune_Do|첫 출판은 1975년]](이소룡의 죽음은 1973년)이란 것에서도 쉽게 알 수 있듯이, “동양무술 + 이소룡 + [[오리엔탈리즘]] + 북미 절대다수 대중들에게는 생소하기 짝이 없었을 동양철학 = 좋은 [[신상]]”이었을 거라는 게 상식적이다. 그리고 이는 미국 등에서 일어난, 서구의 물질문명에 대한 반성과 함께, 동양의 정신문화와 동양철학을 배우자는 움직임과도 잘 맞아떨어졌다. 이는 이소룡 유족의 이해와도 부합되는 면이 있었다. 그의 부인이었던 린다는 남편의 유산 및 재산관리에서 자신이 손을 떼던 2001년까지 이소룡의 절권도를 홍보하는 데 열심이었고, 지금은 그녀의 딸 [[http://media.gettyimages.com/photos/president-of-the-bruce-lee-foundation-shannon-lee-attends-madame-picture-id456045592|섀넌 리]]가 그 재산을 관리하면서, 그녀의 남편 키슬러(Keasler)와 함께 비영리단체인 이소룡 재단(Bruce Lee Foundation)을 운영하며, 무술에 대한 이소룡의 철학과 철학에 대한 그의 정리노트 등을 홍보, 보급하는 데에 열심이다. 그 발단과 과정은 어쨌든 간에, 그 결과, 이소룡은 여러 분야에 영감을 준 셈이 되었다. 무술인은 물론, 배우, 영화감독, 음악가, [[프리러닝]] 선수들까지 "나는 이소룡의 영향을 받았다"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History Special: 《How Bruce Lee changed the World》] 북미권에서는 액션스타는 물론 정신적인 스승으로도 인식되기도 한다. 한 예로, 기타리스트인 [[잭 와일드]]가 기타 잡지에서 "이소룡이 말하길, '자주 쓸 동작이 아니면 잊어버려라'라고 했다" 라며 인용[* 기사가 《기타를 잘 연주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에 대한 것이었다.]하는 등 이소룡의 문화적 영향력은 대단히 크다는 걸 알 수 있다. 또한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인물로서 추앙되기도 했다. 실제로 어록 중에 적극적인 삶이나 자신에 대한 구속을 푸는 자유 등을 중시하는 말이 많은데, 이는 특히 북미 사람들의 취향에 맞는 말이 많기에 영감의 보고로 여겨지기도 한다. 최소한 대중에 널리 알려진 무술 철학가로서는 공이 크다. 그러나 다른 무술 철학가들은 없었고, 있었다 해도 이소룡보다 수준미달이었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이소룡은 넘사벽으로 베스트셀러였고, 다른 이들은 사이비만도 못한 수준이라고 보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이소룡이 대중들에게 철학자로서 각광을 받은 것은 아마도 유약해보이는 외모에 난해한 용어와 근엄한 이미지로 고식적인 것으로 인식되는 동양의 문인과는 다른 강건한 신체와 화려한 무술실력을 바탕으로 한 강한 모습에 지적인 모습까지 엿보이는 점이 강함을 추구하는 서양, 특히 미국인들에게 크게 어필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미국에서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지적인 근육맨으로서 국민적인 인기를 누린 것과 비슷하다.[* 실재로 슈워제네거는 정치에 입문하기 충분할 정도로 의외로 배운 것이 많은 사람이다.] 이소룡이 전술했듯 대단한 철학사상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그동안 불필요한 동작 등 형식적인 측면에 사로잡힌 전통 무술계에 나름대로 문제의식을 가지고, 원초적인 투쟁이자 자기단련으로서의 무술의 본질을 일깨우고 간결하고 실용적인 길을 모색하면서 일반 대중들에게 스스로 강해진다는 것의 의미를 깨닫게 하는 산파 역할을 충실히 했다고는 할 수 있겠다.[* 이소룡이 유달리 몸 만들기를 강조하고, 그것을 스스로 실험한 것도 무슨 무술을 배우기 이전에 강한 몸이 먼저라는 무술의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가졌다는 반증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