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소룡 (문단 편집) === 실전 무술가? ===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의 실전 실력을 증명할 수 있는 자료가 없다. 당연히 실전적인 싸움을 했다면 그의 육체적 능력과 무술을 연마한 실력때문에 일반인들보다는 상당히 강했을 것은 자명하나 현존하는 격투기 선수들과 비교할때 이를 증명할 부분이 없는 것이다.이는 그가 어디까지나 그가 액션배우지만 대부분 대중이 그를 단순히 배우로 평가하는 게 아닌 위대한 무술가로 인식하기에 더욱 이러한 논쟁이 생긴다. 때문에 이소룡에 대한 평가는 그의 육체적 강함보다는 그의 유명세와 이를 통한 영향력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이소룡이 살아있을 당시는 물론 사망한 지 50년이 다 되어가는 현재까지도 뜨거운 떡밥으로 무술적인 면을 보면 그는 가라테 대회에서 공연시간[* 선수로 참가하여 우승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소룡은 시범자로서 참가하여 대련시범과 원 인치 펀치, 여러 기술 등을 공연한 것이지, 실제 시합을 한 것이 아니다.]을 얻어 두 손가락만으로 팔굽혀펴기 4개를 하거나, [[촌경|원인치 펀치]]를 [[https://www.youtube.com/watch?v=XHKb0kuTiGw|시전한 것]]이 유명하다. 당시 롱 비치 무술대회 등에서의 시범영상이나 사진 등을 보면 [[http://images5.fanpop.com/image/photos/26600000/two-finger-push-ups-bruce-lee-26673291-1209-684.gif|두 손가락으로 하고 있다]]. 다만 개인수련 등에서 [[https://pbs.twimg.com/media/CG_2BJBUkAActct.jpg|두 팔로 할 경우는 한손가락만으로 하기도 했다]]. 참고로 [[극진공수도]]의 실력자들 중에서는 헤비급 체중인데도, 한팔+한손가락만으로 팔굽혀펴기를 수십개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최배달이나 브라질의 프란시스코 필리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증명이 가능한 건 딱 거기까지다. 이 이상으로 그가 강한 파이터라느니, 프로 파이터를 이길 수 있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해서는 곤란하다. 왜냐하면, 현실적으로 따져볼 때 이소룡의 강함을 증명하려고 하면, 무엇보다 증거자료가 부족하다 못해 없다고 해도 될 정도다. 이소룡의 강함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내놓는 근거는, 이소룡의 지인들에게서 나온, “이소룡이 누구와 싸우는 것을 봤는데 대단하더라” 식의 [[카더라]]에 불과하고, 그의 영상 역시 기술 시연(試演: 시범, 공연, performance)일 뿐이다. 심지어 영화 속의 모습을 예로 들면서 이소룡의 강함을 주장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그리고 이소룡 대련 영상이나 영화를 보면, 상대의 공격을 물처럼 자연스레 받아넘기는 그의 실력을 볼 수 있다는 주장도 있는데, 승부를 가리는 대련이나 시합이 아닌, 시범/시연(試演)으로 실제 기량을 판단하는 건 좀 곤란하다.[* 중국에서는 서로 합(合)을 맞춰 영화의 격투처럼 짜 맞춘 것도 대련이라고 하는 것에 주의. 물론 용어 개정(ex》 품세(品勢)→(순우리말)품새) 이전의 태권도에도 약속대련이란 말이 있었지만, 중국과 달리, 약속대련과 (승부를 내는) 대련은 구별하였다. 반면 중국은 승부를 가르는 겨루기는 예전에는 비무(比武), 비새(比賽)도 썼지만, [[문화대혁명#s-5.3|무술을 모조리 쓸어버린]] 후로는 산타(散打)로 굳어지는 추세이다 중국의 우슈 대회에서는 마치 영화처럼, 얼마나 멋있고 그럴 듯하게 연출했냐를 평가하여, 10점 만점에 몇 점 하는 식으로 채점하는 경기를 대련(对练/對練, sparring set, sparring form)이라고 한다.] 또한 《[[다이 하드]]》 시리즈가 [[브루스 윌리스]]의 실전능력(?)을 증명하는 근거가 될 수 없듯이, 이소룡의 영화를 근거로 사용하는 것도 무리가 있다. 결론부터 정리하자면 ‘이소룡이 일반인이나 아마추어 보다는 기량이 출중했겠지만, 그 이상을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이다. 이소룡이 활동하던 1960년대엔, 이미 많은 격투기가 체계를 잡아가거나 체계를 완성한 시점으로, 근대 격투기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복싱]]은, 1920년대부터 라이트급(이소룡의 체급) 세계 챔피언전을 치를 정도였다.[* 1960년대 유명 헤비급 챔피언은 [[무하마드 알리]].] [[레슬링]]도 20세기 초부터 체계적으로 전해져왔다. 복싱과 레슬링은 19세기부터 프로대회는 모두 기록되어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일본에도 미후네 코죠나 사이고 시로, [[기무라 마사히코]] 등의 [[유도]] 영웅들이 있었고, 1961년에는 [[최배달]]이 자신만의 [[가라테]]를 완성하여 [[극진공수도|극진회관]]을 설립했으며, 그 이전부터 [[마에다 미츠요]]를 비롯한 많은 무술가들이 세계각지에서 본인의 무술을 홍보하거나, 실제 시합으로 자신이 강자임을 증명하려 해왔다. 태국 같은 동남아에서는, 소년 시절부터 [[무에타이]]나 렛웨이, 프레달 세레이 등을 익혀 온 선수들이 목숨을 걸고 치고받고 있었고, 브라질에선 [[브라질리언 주짓수]]를 창시하고 익힌 [[그레이시 가문]]이 타 무술 선수들을 박살내고 있었으며, 다른 곳에선 [[발리 투도]]의 초석을 쌓고 있던 시대였다. 이렇듯, 격투기를 업으로 삼고, 오직 승리만을 위해 뼈를 깎는 노력을 하며, 피 튀기는 실전과 시합을 하던 무술가, 격투가들이 이미 즐비하던 시대에, 사실상 영화배우로 활동하며 공식 전적(戰績)은 없는 이소룡을 최강자라 칭송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소룡과 교류가 깊었다는 미국의 무술가, [[http://www.momentummartialarts.ca/wp-content/uploads/2012/08/Joe-Lewis.jpg|조 루이스]](Joe Lewis, 1944~2012)를 이소룡이 가르쳤다든지, 미국의 많은 가라테인들과 교류할 때 그들은 이소룡에게 고개를 숙이고 들어왔다든지 하는 말도 전해진다. 실제로 마이크 스톤, 척 노리스, 조 루이스와 교류하고 훈련을 했다는 기록은 존재한다. 이 셋은 각 가라테 챔피언수준의 무도가 들이였다. 이소룡이 이들을 제자로 가르치고 스파링시 압도했다는 얘기가 전해지나 그것은 확실치는 않다. 미국식 킥복싱 선수로 일류 수준에 오르기도 했던 조 루이스는, 사실상 독학으로 무술을 시작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독학으로 시작한 단 22개월의 수련만으로, 1966년, 제1회 전미(全美) 대회에서 우승했고, 1966~1969년, 미국 챔피언이었다. [[척 노리스]]를 이긴 적도 있다. 그러나 이후 [[척 노리스]]는 조 루이스를 꺾고, 빅터 무어, 스티브 샌더스 등 당시 유명 무술가들을 패배시키며, [[http://ma-mags.com/Mags/BB70/BB%201979-04%20Cov.jpg|조시학]](S. Henry Cho, 1934~2012)이 주최한 무술대회(All American Open Tae Kwon Do/ Karate/ Kung Fu Championship)에서 2회 연속 우승하기도 했다. 생전 이소룡은 스스로 강함을 추구했고, 자신의 근육이나 기술 등을 공공연히 드러내며 자랑하는 걸 즐겼다는 증언이 많은데, 정작 진짜 격투에서의 강함을 증명하는 실제적인 행위, 즉 대회 출전, 공식 시합 등을 단 한 번이라도 한 적이 없었으며, 하려는 시도도 없었다. 그나마 고교시절 이소룡이 홍콩의 복싱 대회에 출전하여 14세의 개리 엘름스[* 여러복싱대회 세차례 우승자로 알려져 있다.]를 결승에서 3라운드에서 녹아웃으로 이겨 우승한적이 있긴 하지만 그것이 이소룡이 최강, 혹은 그에 준한다는 주장의 근거가 되진 않는다. 이소룡은 여러 격투기를 혼합하여 자신만의 격투기를 만들어낸다는 사상을 통해 현대 격투의 토대를 배우로써의 유명세를 이용하여 대중들에게 공개적으로 인식시킨 결과가 되었다는 것에서 의의가 있는 것이지, 이소룡 자신의 강함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런 토대를 만든 게 이소룡이 최초라거나, 이소룡 한 명뿐인 것도 아니다. 다만 이소룡은 영화를 통해 이를 대중적으로 널리 퍼뜨렸기에 다른 이들에 비해 압도적인 영향력을 지니게 된 것이다. 사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 어떤 무술가도, 그 어떤 격투기 스포츠 선수도 이소룡과 같은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이소룡은 후반으로 갈수록 현대 격투기보다 중국의 무술이 더 위대하다고 주장했다. 이는 복싱, 유도, 태권도를 배웠던 그의 젊은 시절과 대비되는 이야기다. 재밌는 건 중국 무술계의 반응인데, 정작 그들은 절권도를 호신술로 평가했지 무술로 취급하지 않았다. 지금이야 중화사상 때문에 분위기가 다르지만,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이러한 풍토가 남아 있었을 정도. 그래도 이소룡이 가진 기본적인 무술에 대한 아이덴티티는 전통권을 바탕으로 하고 있고, 이 전통권을 어떻게 하면 고도로 도시화한 현대사회에서 대중들에게 받아들여질만한 형태가 될 것인가 대해서 고민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고평가 받아야 할 것이다. 즉, 이소룡의 성공과 절권도의 탄생은 복잡한 기교와 훈련과정을 가급적 생략하고 보다 직관적인 형태의 무술을 추구한 영춘권 엽문 노사의 방향성과 필요한 것이라면 스스럼 없이 받아들이며 현대사회에서 중국무술이 대중들과 어떻게 나가야하는지 고민한 결과물이라 할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