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소룡 (문단 편집) === 무술의 대중화에 끼친 영향 === 위에 많은 부분에서 찬반의 여지가 있으나 이소룡의 가장 큰 진가는 무술 특히 중국형 무술같이 화려한 액션을 영화에 적극 차용하였다는 점이다. 그의 《[[용쟁호투]]》 이후 무술 도장에 입문하는 사람들이 크게 늘어 무술의 대중화를 촉진시킨 업적은 실로 대단하다. 이는 영화 등이 대중적으로 크게 성공하면 흔히 나타나는 현상으로, 왕우(王羽)의 《용호투(龍虎鬪)》(1970)가 대박을 터뜨렸을 때,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왕우가 영화 속에서 사용한 단련도구들과 비슷한 것들이 불티나게 팔렸고, 무술도장에 입문문의가 쇄도했었다. 성룡의 《[[취권]](醉拳)》(1978)이 그야말로 기록적인 대박을 기록했을 때는 한국, 홍콩, 대만, 일본 등에서 취권을 배우겠다며 중국무술도장이 북새통이 되었었고, 한국에서는 성룡에게 취권을 가르친 고수라고 알려진 대만의 무술가, 장극치(張克治)를 초빙, 시범공연을 하여 대성황을 이루기도 했다. 일본에서도 용비운(龍飛雲, 1955~2007)[* 본명 후지타 토쿠아키(藤田徳明). 용비운은 일종의 링네임 같은 개념. 정룡회중국권법도장(精龍會中國拳法道場)의 지도자로서, 실전무술을 모토로 일본 내의 중국권법 보급에 힘썼다. 51세의 나이로 신장병으로 사망하기 전까지 [[기공]](氣功), [[사권]](蛇拳), 비종권(秘宗拳), 취팔선권(酔八仙拳), 양식[[태극권]](楊式太極拳), 병장기술 등 폭넓은 분야에서 활동하면서, 투룡비새(闘龍比賽)라는 이른바 풀 컨택트 쿵푸대회를 장기간에 걸쳐 개최하기도 했었다. 일본 내의 중국권법 저변 확대에 대한 공헌은 상당했지만, 정작 실력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많았다. 한 예로, 《[[https://ja.wikipedia.org/wiki/%E3%83%AA%E3%83%B3%E3%82%B0%E3%81%AE%E9%AD%82|링의 혼(リングの魂)]]》이라는 TV 프로그램에서 마련한 용비운의 문하생 3명과 극진공수도 선수 3명의 대결은 0:3으로 용비운 측의 참패였다. 다만, 대결이 극진 룰로 개최되었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는 있다. [[https://www.youtube.com/v/p5zKLE66Y2k|영상 보기]]]이라는 무술가가 취권을 내세워 돈을 벌고,[* 취팔선권(醉八仙拳)을 표방하고 있는데, 성룡의 취권을 도입한 동작이 많이 보인다. 이는 본인이 정식으로 수련한 권법도 있지만 책만 보고 연구한 권법도 많고, 부족한 부분을 각종 미디어를 통해 보완한 것 때문에 생기는 일로, 사권의 경우에는 자료가 적어서 [[크리스티(DOA)|크리스티]]의 움직임까지 도입했다고 한다.] 무술서적도 출판했었으며, 이는 [[http://www.bookst.co.kr/shopimages/bookst/0120110000922.jpg|우리나라에서도 출판되었다]]. 그러나 이를 그의 무술실력 하나로 세운 업적이라고 하기엔 무리다. 사실 그는 영화를 본격적으로 찍기 전부터 TV 영화, 드라마 제작사 등과 접촉하며 무술을 내세워 자기홍보에 적극적이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자신을 배우로서 홍보하는 것이 더 큰 목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스스로도 말하길, 미국에 있을 때는 연줄을 만들고 여러 곳에서 무술실력을 내세워 홍보하며, 할리우드 영화, TV 등에 출연하려고 여러 가지로 노력했다고 술회한 바 있다. 노력 끝에 만든 연줄을 통해, 《[[그린 호넷]]》뿐 아니라 TV 토크쇼나 드라마의 게스트 출연 등의 기회를 잡고 무술 철학에 대해 얘기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이소룡은 무술을 통해 단순히 강해지는 것뿐만 아니라 철학적 깊이를 부여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소룡의 업적을 따질 때 그의 육체전 강함이 아니라 철학적 깊이와 선구적 면모에 무게가 실리는 게 이러한 이유이다. [youtube(IkC35VbWGvw)] 더구나 위의 영상처럼 중국무술을 포함한 전통 무술[* 다만, 위의 영상에서는 당시에는 안면 타격 연습을 별로 하지 않았던 극진 측의 주요 선수들이 동시대 복싱/무에타이의 펀치 테크닉에 한참 못 미치는 태기권 권사들의 수기에 얼굴을 몇 번 얻어맞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극진공수도의 풀컨택트 룰에서는 [[극진공수도/안면 타격|손으로 하는 안면타격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로 등장하는 극진 측 인물이 천재 가라테카로 이름을 떨쳐 훗날 극진회관 2대 관장 자리까지 오른 마쓰이 쇼케이(문장규)다.]들은 과거 집단 병장기 싸움에 촛점을 두어서 길거리 등에서 벌어지는 맨손 격투상황에서 현대 무술에 비해 불리한 경우가 많았으며, 수련이 복잡하고 실재 격투에서 효력을 발위하지 못한 부분이 많았다. 이것은 전통무술의 대련이라는 것은 초식을 완성하기 위한 과정이지 격투 그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소룡은 절권도를 처음에 과학적인 길거리 싸움으로 부르려 했을 정도로 그런 전통 무술들과 거리가 먼 격투의 노선을 택했다. 또한 복싱 등의 서구 무술은 불한당들이 깡패 짓하면서 쓴다는 부정적인 인식이 많았는데, 그가 30대 넘어서 가장 중요시 생각하던 무술은 공교롭게도 복싱이었다. 이소룡은 과학적이며 철학적인 무술 체계를 제기하여 무술이 대중에게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데에 기여했다. 사실, 이소룡은 전통적 무술이 난장판이 되기 쉬운 길거리 싸움에는 불리하다는 의견이었기에, 그런 혼잡한 상황에서도 쓰일 수 있는 무술 체계를 원했고, 그 결과가 절권도라고 전해진다. 시각에 따라선 이소룡의 궁극적 목표는 자기가 최강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무술이 전파되어 스스로 몸을 지킬 수 있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즉, 자신이 최강이 되는 것보다 모두가 최강이 될 수 있는 길을 추구함으로써 불멸로 남았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에는 중국에서도 그를 진정한 무술가로 칭송하는 이들도 많아졌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실상은 자본주의에 눈을 뜬 중국인들이, 돈 될 만한 것이면 뭐든지 가져다 써먹다가 이소룡까지 써먹기에 이르렀다는 게 더 정확하다. 중국에서 이소룡은 마약중독의 불량배 정도로 백안시(白眼視)된 적도 있었고, [[문화대혁명#s-5.3]]으로 무술과 무술가들을 완전히 [[개발살]]냈으면서도, 지금 중국은, [[자본주의|무협소설과 무협영화가 돈이 된다]]는 것에 주목해, 실제로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무술문파로서의 [[무당파]](武當派), [[화산파]](華山派), [[아미파]](蛾眉派) 등등을 만들어 무술 흉내를 내는 사람들을 배치하고, 외국인 관광객들이나 수련지망생 등을 대상으로 무슨 무슨 코스 해서 제자로 받거나 하며 돈을 버는 게 현실이다. 일부 기업이나 무술인들이 하는 짓이 아니라, 중국 정부, 혹은 정부가 내세운 기업들이 뒤에 있다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사실 이러한 돈벌이의 원조는, 밥 짓던 스님과 늙어서 어디 갈 데도 없는 스님들까지 포함해 단 4명만 남았고, 건물은 다 무너졌던 [[소림사]](少林寺)를 중국 정부가 눈독을 들여 모조리 개축한 후, 은퇴한 [[우슈]] 선수, [[이연걸]]을 주연으로 《소림사》(1982)를 만들어 짭짤한 재미[* [[http://www.imdb.com/title/tt0079891/business?ref_=tt_dt_bus|추정제작비 120만 위안, 중국 내 흥행 1억 3,600만 위안, 홍콩에서는 1,615만 홍콩달러]]를 벌어, [[성룡]]의 《사제출마》가 갖고 있던 흥행최고기록, 1,102만 홍콩달러를 갱신했다.]를 본 것이 그 시작일 것이다. 실제 [[소림사]]의 방장(方丈) 석영신(釋永信)은 초기에 자신과 중국 정부의 연줄을 이용, 소림사 주변에서 그 이전까지 관광객 등을 대상으로 돈을 벌던 무술관, 기념품, 서적 판매상 등을 모조리 없애버리고, 자신이 허가해준 것 외에는 자리 잡지 못하게 했었다. 그리고 소림사는 다양한 수련과정, 체험코스 등에 많은 외국인들과 수련생들을 끌어들여 많은 돈을 벌었다.[* 이런 과정 같은 게 궁금한 분들은 SBS에서 방영한 《[[주먹쥐고 소림사]]》를 참조하자. [[남소림사]] 역시 이런 과정에서 후대에 새로 만들어진 것에 가깝다. 자세한 것은 항목참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