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영균 (문단 편집) == 활동 == 1921년에 [[강원도]] [[영월군]]에서 태어나 [[춘천고등학교|춘천공립중학교]]([[구제중학교]])를 졸업한 후 1938년 [[구제고등학교|경성제국대학 예과]](제15회, 이과을류)로 입학, 예과 수료 후 의학부로 진학하여 태평양전쟁 기간 수학연한 단축으로 1년 빠른 1944년 3월 경성제국대학 의학부를 졸업하고 의학사를 취득했다. 대학 졸업 후 동 대학원 외과학교실 조교로 있는 와중에 1945년 광복됨에 따라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외과학교실 [[조교]], 1952년 [[부산]]에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전임강사로, 휴전 직후인 1954년 외과학교실 조교수로 승진하였다. 1957년 정부 프로그램인 ‘미네소타 프로젝트’[* 미네소타 프로젝트’는 한국전쟁 후에 한국을 의료 수준을 높이기 위해 1955년부터 1961년까지 한국의 의사를 미국으로 연수를 보낸 프로그램이었다.]에 따라 [[미국]] [[미네소타 대학교]]에서 2년간 와튼 릴리아이 교수에게 심장수술에 대한 연수를 받았으며, 당시 한국에서는 시행되지 못했던 개심술(開心術)을 연구하였다. 귀국 후 1959년 국내 최초로 개심술을 통한 심방중격결손증 수술을 시도하였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심혈관질환에 대한 개심술 성공을 위해 동물실험 등 지속적으로 헌신의 정열을 쏟았다. 1960년 부교수로 승진하였고 이듬해 [[대한의학협회]] 학술상을 수상하였다. 부단한 노력의 결과 1963년 '''국내 최초로 28세 심방중격결손 환자에게 개심술을 통한 심방중격결손증 교정술을 성공적으로 시행'''하였다. 부적절한 사회적 여건, 불충분하고 미비한 의료장비, 그리고 태부족인 의료재료 등 여러가지 악조건 하에서도 지속적으로 심장혈관외과학 분야를 위한 노력으로 이룬 쾌거였다. 1965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서울의대]] 흉부외과학교실 교수로 승진 후, [[북유럽]] 학문의 중심인 [[스웨덴]] 웁살라대학교 외과학교실에 1년간 연수차 출국하였다. 1968년 본인의 책임하에 흉부외과학교실이 외과학교실에서 분리 독립되었고, 같은 해 대한흉부외과학회의 첫 이사장이 되었다. 이후 제7대 이사장 및 2, 10대 회장을 역임하였다. 1970년 첫 흉부외과 과장이 되었고 이듬해 대한외과학회 회장이 되었다. 1977년에는 연간 개심술 100차례를 돌파하였으며 이는 [[국민건강보험|국민의료보험제도]]의 정립과 [[심장]]수술의 양적 확대의 상징적인 계기가 되었다. 1979년에는 삼일문화상 학술상을 수상하였는데 이 해에 36세 여자 환자에서 승모판막치환술 장기 생존예를 기록하게 되었다. 해외학회 발표도 활발하게 하여 1980년 재미 한국인의사회([[뉴욕]]) 합동학술대회, [[일본]] 흉부외과학회 등에서 발표하였다. 1981년 제5차 아시아 흉부외과학회에서는 부회장으로 피선되었다. 1982년 서울대병원 원장으로 취임하였다. 이 해 개심술 600례를 돌파하였다. 1983년 [[서울특별시]]에서 개최한 제6차 아시아 흉부외과학회 조직위원장으로 활동하였으며, 대한 순환기학회 회장이 되었다. 1984년 `흉부외과 영역의 중환자 관리지침서'를 출간하였다. 아시아 흉부외과학회에서의 비중도 높아져 1985년 [[태국]]에서 개최된 아시아 흉부외과학회에서 회장으로 회의를 주재하였다. 1986년 40여년간의 [[서울대학교]] 교수를 정년퇴임 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로 추대되었고 [[대한민국 훈장|국민훈장]] 모란장을 수훈하였다. 퇴임후에도 부천세종병원 심장연구소 소장으로 재직하던 중 1994년 [[식도암]]으로 타계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