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왕 (문단 편집) == 개요 == '''이왕'''(李王)은 [[대한제국]]이 [[경술국치]]로 일본제국에게 멸망한 후 [[일본 제국|일제]]가 옛 [[대한제국]] [[황실]]을 [[일본 황실]]의 일부로 편입하기 위해 만든 지위로 [[왕공족]]의 수장이었다. 왕공족은 이왕가라고도 불렸다. 일제는 고종과의 협상 끝에 구 황실을 명목상 [[천황]]의 가문인 일본 황실보다는 낮고 [[오등작]]을 가진 다른 [[화족]]들보다는 높은 [[친왕]]급 위치로 대우했다. 이 신분을 왕공족이라고 하며 이왕은 이 왕공족의 수장이다. '''일본 역사상 보기 드문 비황족 [[왕작]]'''이다. 이는 이왕과 [[류큐 번#역대 번왕|류큐 번왕]] 뿐인데, 류큐 번왕이 7년만에 폐지되었으므로 '''[[일본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유지된 유일한 비황족 왕작이었다.''' 왕공족은 원래 갖고 있던 재산과 일본 정부에서 제공하는 자금과 지위 덕택에 막대한 자금을 운용할 수 있었다. [[이방자]]가 이왕가에 시집 간다니까 다른 일본 황족들이 부러워했단 이야기가 있을 정도. [[https://andocu.tistory.com/entry/대한민국-황실재산은-얼마나-되나-2006년-10월-26일-주간동아|2006년 동아일보 기사]][* 이왕직에서 관리하던 전답만 1억 5천만 평에 이르며 헥타르로 계산하면 5만 헥타르에 달한다. 여의도가 주변 한강 둔치를 합쳐야 450헥타르인 걸 감안하면 여의도 100배에 달하는 넓은 전답을 소유했던 셈이다.] 일본 정부는 이왕가에 품위 유지비로 엄청난 돈을 지원해 줬다. 심지어 2차 세계대전으로 어려움을 겪는 와중에도 금전 지원을 끊지 않았다. 이에 일본 내에서도 불만이 많았으며 어중간한 위치의 본토 화족들도 정부 지원을 받는 이왕가를 부러워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왕가는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지속되었으며 일제의 녹을 받는 이왕가와 독립운동에 반대 내지는 소극적인 황족들을 향한 실망 때문에 독립운동[* [[임시정부]]부터 대한제국 임시정부가 아니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이다.] 시기나 해방 이후나 제정 복고 논의는 사라지게 된다. 광복 이후 일본은 한반도를 반환한 데다 1947년 [[신적강하]]를 거쳐 이왕가 지위가 일본 국내에서도 사라졌고 1948년 한반도는 [[대한민국|남쪽]] 옛 황실에 우호적이지 않은 정부이기 때문에 [[공화정]]을 채택했다. 대한민국의 이승만은 구한말 시기 독립협회에서 활동하다 군주제를 폐하려 했다는 사유로 고문까지 받아본 인물이며 강경한 공화주의자였기에 옛 황족들의 귀국을 차단하고 이미 국내에 있는 사람들도 더 이상 [[창덕궁]]에서 살지 못하도록 막는 등 복권 여지를 원천 차단하기 위해 노력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