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응준 (문단 편집) === [[8.15 광복|광복]] 이후 === 1945년 8월 15일 일제 패망 당시 [[함경남도]] [[원산]]부에서 [[원산항]] 수송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으나, 간신히 탈출하여 [[서울]]로 들어왔다. 당시 일본 육사 출신의 대다수 장교들처럼 근신하던 중[* 대다수의 편견이 일본육사 출신 장교들이 광복 후 전면에 나섰을 거라 생각하지만 이는 대부분 만주군 출신, 만주군-일본군, 학병 출신들이 그러했고 오히려 일본육사 출신들은 소수인 데다 광복 후 대부분 근신했다. [[강문봉]], [[박정희]], [[정일권]] 등은 만군-일본육사 계열이다.][* 이응준과 동기이자 후임 총장인 신태영이나 그의 아들 [[신응균]], 1년 후배인 [[김석원]], [[이종찬]] 등도 자숙하다가 [[이승만]], [[이범석]] 등의 강권으로 늦게 군에 입대한 경우이다.] [[미군정]]의 호출을 받게 된다. 이는 범 일본군 출신 중에서 가장 최선임이면서 고급 장교(대좌)였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 내 일본군 장교 중 최고위급은 이응준과 1년 후배인 [[김석원]]이었다. 동기인 신태영은 중좌. 이응준 본인의 회고록에 따르면 미군정에 출두해서도 '''"[[친일반민족행위자|해방되는 날까지 일군에 있었던 사람일 뿐 아니라]] [[영어]]도 제대로 못하니 지금 정세가 전혀 달라진 신국면 제일선에 나설 자격이 없다. 더욱이 내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다"'''며 거절했다고 한다. 그러나 미군 아고우 대령이 "[[친일반민족행위자|일본을 위해 죽을 힘을 다한 분]]이 어째서 [[대한민국|자기 나라]]를 위해서는 못하겠다는 것인가?"라는 말에 군사고문직을 주위와 고심 끝에 수용했다 한다. 그가 챔프니 대령과 뱀부 계획을 세우면서[* 뱀부 계획은 각 도 별로 1개 [[중대(군대)|중대]]를 배치한 뒤 병력을 모아 도마다 1개 [[연대(군대)|연대]] 수준을 만들고 합계 2만 5천 명 남짓한 육상병력을 만든다는 것이었다.] [[군사영어학교]]를 세웠는데 60명의 1기를 선발할 때 [[만주군]] 출신 20명은 [[원용덕]]이, [[국부군]] 출신 20명은 조개옥이 추천하기로 했고, [[일본군]] 출신 20명은 이응준이 추천하기로 결정했는데, 이때 국부군, 즉 [[한국광복군|광복군]] 출신들이 미군정의 정책을 보이콧하는 바람에 대다수는 일본군과 만주군으로 채워졌다. 이때 이응준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 요인들께서 말씀하시는 법통을 우리나라 군대로 하여금 계승하는 일이 숭고한 사명이라고 생각해달라"'''고 말하며 광복군 출신의 [[유동열]]을 설득하였고, 마침내 1946년 9월 유동열은 '미군정 과도정부 남조선 통위부 부장(현 국방부장관격)'으로 위촉하였다. 그렇게 광복군 출신들도 하나둘씩 입대하기 시작하였다.[* 이응준 본인의 회고록에 따르면 그는 통위부장 선정에 대한 의뢰를 미군으로부터 받고 후보로 유동열, 지청천, 이범석 3인을 꼽았으며, 이 중 최선임격인 유동열을 추대하기로 했다고 한다.] 미군정의 의지로 1946년 6월 대령으로 특별임관하고 1948년 [[대한민국 육군]] 초대 [[육군참모총장]]이 되었다. 원래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동시 초대 육군 총사령관으로 [[송호성(군인)|송호성]]이 부임하였으나 [[국군조직법]]에 따라 총참모장제가 도입되면서 그가 초대 육군 총참모장이 된 것이다. 참고로 송호성의 경우 6.25 전쟁 발발 후 북한 정권에 참여한 경력이 있어서 현재 육군의 역사 속에서 지워져 있는 상태다. 만약 송호성이 북에 부역하지 않고 대한민국을 지켰다면 초대 육군참모총장 소급은 이응준이 아니라 송호성으로 되었을 수도 있다. 이응준은 [[강태무 표무원 월북 사건]]으로 초대 총참모장에서 물러난 이후 [[제3보병사단|3사단장]], [[제5보병사단|5사단장]], 미아리전선전투사령관, 전남지구전투사령관 등을 지냈으나 이범석의 후임인 국무총리 서리 겸 국방장관 [[신성모]]와의 불화로 군문을 떠났다. 이후 1952년에 육군대학총장으로 현역 복귀하였고 제주도 모슬포 제1훈련소 소장으로 부임하면서 중장으로 진급했다.[* [[백선엽]]의 회고록을 보면 백선엽이 중장계급으로 갓 육참총장으로 부임했을 때의 당시 모슬포 훈련소는 여러 여건이 좋지 않아 인격적으로 원숙한 사람이 훈련소장으로 부임해야 적합하다고 생각했으며, 당시 육군대학 총장으로 있던 이응준을 찾아가 훈련소장으로 부임해달라고 간청하였다. 이응준은 "국가를 위해서라면 노골이나마 헌신해야겠지."라고 하였고, 백 장군은 이에 대한 화답으로 훈련소장 부임과 함께 중장진급을 상신하여 진급토록 했다고 전해진다.] 3년 후인 1955년에 동계급으로 예편했는데 나이 60살이 넘은 상태였다. 그 후 체신부(현 [[미래창조과학부]]) [[장관]]과 한국반공연맹 [[이사장]](현 [[한국자유총연맹]] [[총재]]) 등을 지내다 1985년 7월 8일에 9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