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인수(1931) (문단 편집) == 생애 == [[1931년]] [[9월 1일]] 경기도 [[의정부시]]에서 [[출생]]했다. 생부 이승용(李承用)은 경기도 양주군 교육감을 지낸 교육자였다. [[고려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 동 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 수료한 뒤 [[경희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외교학과 정치학 석사를 졸업하고 미국 뉴욕 대학교 대학원에서 국제정치학과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이후 [[명지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단국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등을 역임했다. 1950년 4월부터 1955년 8월까지 5년 4개월 동안 공군 장교로 복무했으며 공군대위로 전역하였다. 공군 장교 시절 정보작전 분야에서 근무했다고 한다. 1960년 4.19혁명 당시에는 데모에 직접 참가는 하지 않았지만 내심 지지했었다고 한다. 당시 고려대를 졸업하고 현대건설에 다니고 있었는데, 4월 18일 고려대 후배들이 국회의사당 근처까지 와서 데모하는 것을 보고 뒤에 서서 박수를 보냈다고 한다. 그럼에도 이승만이 대통령에서 하야하기로 결정한 것을 보고 어른의 속사정을 이해하고 내심 존경하는 마음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 [[파일:Syngman_Rhee_and_Francesca_donner_with_their_adopted_son_In-soo_Lee.png|width=100%]] || [[파일:Francesca_Rhee_returned_to_Korea_(1).jpg|width=55%]] || [[파일:Francesca_Rhee_weeping_at_Syngman_Rhee's_grave.jpg|width=55%]] || || 1962년 12월, [[하와이]]에서 [[양자]] 이인수를 맞아 기뻐하고 있는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내외. || 1966년 3월 21일, [[이승만|이승만 전 대통령]] 성묘. 맨 앞 줄 왼쪽부터 이인수 박사, [[윤치영]] [[서울시장]], [[프란체스카 도너|프란체스카]], 윤치영의 아내 [[이은혜]]. || 1967년 7월 27일, [[이승만]] [[대한민국 대통령|대통령]] 기일에 분향하고 있는 프란체스카와 아들 이인수. || 이승만이 대통령에서 하야하고 [[하와이]]로 간 뒤인 1961년 11월 13일에 이승만의 측근들과 [[전주 이씨]] 종친회의 소개로, 이인수가 만 30세의 나이에 이승만의 양자로 입적(入籍)되었다.[* [[소문]]으로는 이승만이 숨진 후 [[프란체스카 도너|프란체스카]]에 의해 입적되었다는 얘기가 있었지만, 사실과 다르다. 입적 후, 하와이로 가서 이승만 부부와 함께 짧게 나마 지내며 이승만을 보살폈으며, 이승만은 이인수를 [[입양]]하고 4년이 지난 [[1965년]]에 서거하였다. 이후 이인수는 평생 아버지 이승만의 기념사업에 힘 썼다.] 앞서 이승만의 양자였던 이강석이 이승만의 눈에 들어 효령대군파임에도 양녕대군파인 이승만에게 입적되었다고 말이 많아서[* 옛날에는 입양 시 파가 같은 일족 중에서 항렬을 맞추는 것이 고려 사항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강석은 파가 달랐는데다 항렬상으로도 계대(系代)가 맞지 않았다. 이승만과 이기붕 일가의 마지막 공통 조상인 [[태종(조선)|태종 이방원]]을 기준으로 할 때 이승만이 17대손, 이강석이 19대손으로 할아버지와 손자뻘이다.] 아예 양녕대군파에서 명망있는 청년으로 입적시켰다. 항렬도 딱 맞는데다[* 전주 이씨 양녕대군파 17대손 秀자 항렬이다.][* 양자 입적 전 촌수로는 무려 '''33촌'''. 이승만은 양녕대군의 서5남 장평도정의 15대손이고, 이인수는 양녕대군의 적2남 함양군의 16대손이기 때문이다. 족보체계상 왕이 되지 못한 왕자가 분파하여 파의 중시조가 되었기 때문에 같은 파일 뿐, 양녕대군의 서로 다른 아들의 후손으로서 진작에 갈라졌다.] 우수한 교육을 받았고 [[영어]]에 능통하여 프란체스카 여사와의 의사소통에 지장이 없는 것도 한 몫을 했다. 처음에 이인수는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라는) 그 책임이 너무 중해 보여, 나보다는 좀 더 나은 사람을 택하라”고 했지만 주변에서 전주이씨 종중에서 “그동안 잘 모셨더라면 어른의 말년 이렇게 비참하지 않았을 텐데, 마지막으로 같은 혈손들이 도와드릴 의무가 있다”고 해서 이승만의 양자가 되기로 결정했다. 생부 이승용은 “정말 어려운 자리라 네 삶이 편치만은 않을 것이지만 열심히 모셔라”라고 격려했다고 한다. [[https://www.dt.co.kr/contents.html?article_no=2023110102109958051010&ref=naver|#]] 이승만의 유일한 친아들인 이봉수는 아버지를 따라 미국에 갔다가 [[홍역]]에 걸려 10살 때 [[요절]]했다. 첫 번째 양아들 이은수[* 호적상으로만 이승만의 양아들이었지 사실상 이승만과 관계가 없었다. 이승만이 [[미국]]으로 떠난 뒤 돌아오지 않자 이승만의 첫번째 부인 박승선이 고아원에서 아이를 한 명 데려와 ‘은수’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입양한 인물이다. 1949년에 본처 박승선과 공식 이혼하면서 호적에서도 말소되었다.]는 이승만과 별다른 인연이 없었다.[* [[https://kin.naver.com/qna/detail.nhn?d1id=11&dirId=11080201&docId=344334639&qb=7J207Iq566eMIOyhseuztA==&enc=utf8§ion=kin&rank=2&search_sort=0&spq=0|출처: 《전주이씨족보》 이승만편.]], [[https://www.kukinews.com/newsView/kuk202208030118|출처2:쿠키뉴스 박승선 취재1]] [[https://www.kukinews.com/newsView/kuk202208120041#_DYAD|취재2]] [[https://www.kukinews.com/newsView/kuk202208180048#_DYAD|취재3]][[http://m.ohmynews.com/NWS_Web/Mobile/amp.aspx?CNTN_CD=A0002736438|오마이뉴스]] [[https://m.kmib.co.kr/view_amp.asp?arcid=0924162948|국민일보]] [[https://m.hani.co.kr/arti/opinion/column/853857.html?_fr=gg|한겨레]] 1891년 혼인. 쿠키뉴스의 취재 등 여러 언론에 따르면 박승선은 이혼에 합의한 적이 없고 해방 이후 면담을 거부하였다. 끝까지 자기가 본부인이며, 다른 이가 있다면 첩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박승선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미 1912년 이혼했다는 설이 널리 퍼져있었으며, 이승만 측이 소송을 제기하여 1949년 6월 4일 혼인 관계와 호적이 말소되었다. 그런데 지방 판결조차 제대로 거치지 않았다. 이는 1960년대 여러 언론의 보도로 알려졌고, [[https://newslibrary.chosun.com/view/article_view.html?id=1362619650808m1071&set_date=19650808&page_no=7|1965년 8월 8일 조선일보 당대 기사]]에서 호적 말소는 법적 소송을 제대로 거치지 않아 시정될 수 있다고 지적하며, [[http://mobile.busan.com/view/busan/view.php?code=19600920000036|1960년의 부산일보 9월 20일]] 기사에서는 이승만이 1912년 미국으로 건너가기 전 호적에 손을 댄 적이 없으며, 박승선이 이은수를 양자로 맞아 호적상 이승만의 장남으로 기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이는 박승선이 1912년 이후에도 호적에 부인으로 남아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두 번째 양아들 [[이강석(1937)|이강석]]은 1960년 4월 28일, 친부모와 동생을 살해하고 [[자살]]했다. 이인수는 이승만의 양자가 된 후 모두 세 차례 하와이를 찾아 아버지 이승만을 모셨다. 1961년 12월 13일 ~ 1962년 3월 17일, 1964년 1월 28일 ~ 4월 2일, 마지막으로 1965년 7월 4일 마우나라니 요양병원으로 가서 7월 19일 이승만의 임종을 지켰다. [[https://www.dt.co.kr/contents.html?article_no=2023110102109958051010&ref=naver|#]] 이후 미국 뉴욕대학교에서 정치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69년 단국대학교 경제학과 조교수로 임용되었으며, 1971년 명지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옮기게 되었다. 명지대학교에서 법정대학 학장, 사회과학연구소 소장 등을 지냈다. 1970년부터 1992년까지 어머니 [[프란체스카 도너|프란체스카]]와 한집에서 살면서 어머니 프란체스카를 봉양하기도 했다. 그리고 일평생 아버지 이승만의 선양사업에 힘썼다. 이승만에 관한 사료와 기록을 수집하였고 이를 연세대학교에 기증하였다. [[2011년]]에 [[4.19 혁명]] 당시 희생되었던 사람들의 유족들에게 사죄했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5015505|#]] [[2023년]] [[6월 28일]], 서울 종로구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이승만대통령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위원장 김황식 전 국무총리) 발족식 회의에 참가했다. 박정희ㆍ노태우ㆍ김영삼ㆍ김대중 전 대통령의 아들 등 5명이 고문으로 참여하고 여야 원로 및 4ㆍ19 학생 시위 주도자까지 같이 발족했다고 한다.[[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74932#home|#]] 2023년 9월 1일, [[4.19 혁명]] 관련 유족에게 한번 더 사죄했다. 참배 후 눈물을 글썽이며 “오늘 나의 (희생자 분들에 대한) 참배와 사과에 대해서 항상 국민을 사랑하셨던 아버님(이승만)께서도 “참 잘하였노라, 무척 기뻐하실 것 같다””고 소회를 밝혔다. [[https://www.chosun.com/politics/politics_general/2023/11/01/XQBYF7R67JAY5FZBROWMUGMU2Y/|#1]], [[https://www.ardent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20|#2]] 2023년 11월 1일 별세했다.[[https://www.chosun.com/politics/politics_general/2023/11/01/XQBYF7R67JAY5FZBROWMUGMU2Y/|#]] [[이승만]]의 [[자녀]]들 중에서 유일하게 [[장수]]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