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인민대학습당 (문단 편집) == 역사 == 인민대학습당 터는 1946년 미군이 발행한 평양 지도를 보면 평양시 남산동에 있는 광성학교 자리로 되어 있다.[* 현재는 서울로 피난하여 [[광성중학교(서울)|광성중]]·[[광성고등학교(서울)|고등학교]]이다.] 한편 기관으로서는 1945년 광복 직후에 평양시립도서관으로 개관[* 당초 위치 미상]했고, 1948년에 북한 정권 출범과 함께 국립중앙도서관으로 명칭을 바꿔 달면서 국가대표도서관으로의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이후 1963년에 건물을 이전하면서 규모를 키워나갔고 1973년에 중앙도서관으로 개칭했다가 1982년 현 건물로 이전하면서 인민대학습당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파일:20160603_155029.jpg|width=100%]]|| || 인민대학습당 건설을 보도한 [[로동신문]]기사. 1979년 12월 착공해 1980년 10월 경에는 거의 공사가 끝난 상태였다. || 현 건물은 [[김일성]]의 지시로 [[1982년]] 지어졌으며, 총면적 100,000m²에 10층 규모로 원래 정부청사로 계획된 건물이었으나 [[김일성]]의 지시로 바꿨다고 한다. 이는 김일성이 도서관 확충과 독서문화 장려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던 인물이었던 이유가 컸다. 국가지도자 자리에 오르자마자 도서관을 대대적으로 확충하는데 크게 신경을 썼고, 6.25 전쟁 직후의 전후 복구 과정에서도 도서관을 체계적으로 복구, 건설하는데 신경 쓰며 상당한 재원을 투입하였다. 그 덕택에 한동안 북한이 남한보다 뛰어난 인프라를 갖추고 있어서 1980년대 초반까지도 북한 도서관이 남한 도서관보다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우월했을 정도였다. ~~물론 동시에 정보통제에도 많은 신경을 썼다는 것은 함정이지만~~ 원래 1982년 보다 훨씬 일찍 건설될 예정이었지만 이 부지에 [[김성애]]의 남동생인 김성갑이 자기 멋대로 사저를 짓는 바람에 건설이 늦어졌다. 김성갑이 이 위치에 사저를 짓는 바람에 격노한 김일성은 김성갑을 좌천시켜 버리자 김성애는 남동생을 두둔하고 나섰다. 이를 계기로 김일성의 눈밖에 난 [[김성애]]의 일족은 후계구도에서 제외 당하게 된다. 그리고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김성애 가문 구성원들의 비리를 낱낱이 까발린 [[김정일]]은 김일성의 후계자로 확정되었다.[* 평양시 중심지역에 위치해 있고, 대지도 아주 넒은 곳이였기 때문에 김일성이 훗날을 위해서 일부러 비워두라고 지시해둔 부지였다. 그런데 당시 김일성의 총애를 받던 김성애의 남동생이 자신의 권세를 믿고 아무런 공식허가도 안받고 멋대로 호화주택을 지어서 입주한 것이다. 평양시 간부들도 김성애의 눈치를 보느라 쉬쉬하던 것을 현장시찰을 갖다가 돌아오던 김일성이 우연히 발견하면서 사건이 터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