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인천광역시 (문단 편집) == [[인천광역시/역사|역사]] == 인천광역시는 대체로 원인천, 부평, 강화 세 권역으로 구분된다.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인천광역시/역사)] [include(틀:인천광역시의 행정구역 변천사)]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인천광역시/incheon_sky.jpg|width=100%]]}}} || [[삼국시대]]에는 [[온조]]의 형인 [[비류]]가 터를 잡은 곳으로 알려져있는 [[미추홀]](彌鄒忽), 매소홀(買召忽)로 불리다 ([[미추홀구]], [[비류대로]] 지명의 시초다) [[신라]]의 [[삼국 통일]]에 따라 [[통일 신라]]의 [[9주 5소경]]에 편입되어 [[한산주]] 율목군 매소홀현(買召忽縣)이 되었다. 이후 [[경덕왕]] 때 전국 지명 한화(漢化)정책에 따라 소성현(邵城縣)이 되었다. [[소래포구]]가 당나라 [[소정방]]이 왔다는 설이 있다. 그러다 [[고려]]시대에 [[인천 이씨]] 가문에서 7명의 [[왕비]]를 배출하면서 경원군, '''인주'''[* 현재의 지명 '''인천'''의 시초가 되었다.] ([[원인재역]]이 인천이씨 묘소에서 명칭 되었다) 그래서 [[SBS]] [[드라마]] '[[시티홀]]'에 나오는 인천을 모델로 한 가상의 도시 이름도 '인주시'다. 인주시의 특산물 중 하나는 '''[[밴댕이]]'''인데, 실제로 강화도의 특산물 중 하나이기도 하다. [[충청남도]] [[아산시]] [[아산시/행정|인주면]]과는 전혀 상관없다. 경원부로 계속하여 승격되었다. 그래서 인천 이씨의 그 유명한 별칭이 '''경원 이씨.''' 그래서 [[태조(조선)|태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면서 인주군으로 강등되었다. 이후 조선 [[태종(조선)|태종]] 시절에 군현 개편이 이루어지면서 인주가 다시 경기도 인천군(후에 인천도호부로 승격)이 되었으며,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인천(仁川)이란 기록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루원시티가 있는 [[가정동]] 명칭이 조선 개국공신 [[조반]]의 [[별장]]이 있다고해서 이 명칭이 되었다. [[강화도 조약]]으로 1883년 [[일본]]이 강제로 개항시킨후 [[개화기|구한말 서양 문물을 가장 먼저 받아들인 개화의 도시]]인데, [[인천항]]은 [[서울특별시|서울]]과 지리적으로 매우 가까운 관계로 [[일본인]][* [[개화기|개항]] 직후에는 개항장 인근에 [[일본]] [[영사관]]이 설립됬다.], [[청나라|청나라인]], 서양인들을 비롯한 많은 국적의 [[외국인]]의 왕래가 잦았다. 현재도 인천 개항장 인근에 [[적산가옥]](일본식 건축물)[* [[일본]]의 조계지], [[차이나타운]][* [[청나라|청]]의 조계지]과, [[구한말]] 서양식 건축물이 많이 남아있는 것은 이것 때문이다. 인천항을 통해 우리나라에 가장 먼저 들어온 서양 문물 중 대표적인 것이 [[야구]]와 [[축구]] 같은 스포츠 종목이다. [[송도]]도 일본과 연관된 지명 유래로 추정되고있다. 그러나 조선을 두고 다투는 강대국들의 각축장이 되기도 했는데 [[청일전쟁]], [[러일전쟁]] 모두 인천([[제물포]])에서 전투가 있었다. [[6.25 전쟁]] 때에는 낙동강까지 밀려나 풍전등화의 상황에 처한 한국을 구해낸 [[인천상륙작전]]의 주무대였다. [[인천 서구]]에 [[콜롬비아]] [[유엔군사령부|UN군]]의 한국전 참전을 기념하는 [[공원]]이 있다. 기존 도심은 [[중구(인천광역시)|중구]]·[[동구(인천광역시)|동구]] 및 [[미추홀구|남구]] [[용현동(인천)|용현동]], [[숭의동]], [[도화동(미추홀구)|도화동]] 일대였으나, 1985년 중구 관동에 있던 시청이 [[남동구]] [[구월동]]으로 옮겨가면서[* 현 중구청이 구 인천직할시 청사이다.] 구월동과 [[간석동]], [[관교동]], [[주안동]]이 새로운 도심으로 떠올랐다.[* 구한말 개항 전까지 인천의 중심은 인천도호부 청사와 인천향교가 있던 관교동 일대였다. 개항 이후 개항장이 있던 [[제물포]] 일대로 도심이 넘어갔다가 시청과 [[인천터미널]] 이전을 기점으로 다시 돌아온 셈이다.] 1989년 [[경기도]]로부터 [[계양동(계양구)|계양면]][* 현 계양1~3동으로, 오늘날의 [[계양구]] 행정구역과는 차이가 있다. 계양구의 중심지인 [[계산동(계양구)|계산동]], [[작전동]], [[서운동(계양구)|서운동]]은 당시에는 계양이 아닌 부평(부천군 부내면→인천(직할)시 북구)의 일부분이었다.]과 [[영종국제도시|영종도·용유도]]를 편입했고, 1995년 [[강화군]] 및 [[옹진군]], [[검단(인천광역시)|검단]]을 새로 편입하면서 시역이 확장되었다. 이때 '''경기도에서 유인도 39개를 가져왔다.''' 이로 인해 관할 해역이 '''위도 1도 · 경도 2도'''에 달하게 되었고 경기만의 대부분이 인천의 산하로 들어가게 되었다. 광역시 출범 당시 초안에는 강화, 옹진군 외에 김포군 전역과 시흥시 북부(옛 소래읍 지역)[* 현 시흥시 북부는 1914년까지 인천도호부의 관할지였다. [[부군면 통폐합]]으로 부천군이 되었다가 1973년 부천군 해체로 [[시흥군]]에 이관된 이래 현재까지 이어져오는 것이다.]까지 편입할 계획이었다[* 그렇게 되었다면 이미 2010년대 후반에 [[부산광역시]]의 인구를 추월했을 것이다.]. 하지만 강화군, 옹진군, 김포군 검단면만 주민투표에서 과반수 찬성을 얻으면서 이들 지역만 인천광역시에 편입되었다. [[강화군]]의 경우 전쟁사와 관련이 깊은데 고려 [[여몽전쟁]] 시기 잠시 [[강화도 천도|수도]]가 된 바 있고, 조선 때는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 방어전]]이 있었으며, [[병인양요]], [[신미양요]], [[운요호 사건]]을 겪었다. 그리고 [[강화도 조약]]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