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본군/역사 (문단 편집) == 초창기 일본군 == 근대 일본군의 사상적 배경은 [[조슈 번]]의 오무라 마스지로(大村 益次郎)에서 나왔다. [[네덜란드]]에서 [[유학]]하여 근대적 체제를 공부한 그는 신분의 차이에 상관없이 장교를 양성하는 체제와, 프랑스를 본뜬 육군, 영국을 본뜬 해군을 기초로 한 [[국민개병제]]를 일본군의 모델로 삼았다. 그가 조슈번의 [[장교]]로 취임하면서 그가 지휘한 군대가 [[무진전쟁]]에서 [[도쿠가와 막부]]군을 격파하면서 오무라의 구상이 옳음을 증명하였다. 물론 [[조슈 번]]군의 주력은 여전히 [[아시가루]], 장교는 [[사무라이|상급무사들]]이 차지했다. 농민들은 구식의 [[조총]]을 가지고 향토방위군 정도의 임무만 맡았다. 신분에 상관없이 편성된 기병대(奇兵隊)의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았지만 원래부터 무사와 농민은 전투능력에 있어서 천지차이라는 인식을 가진 때에 이런 결과를 보인 것 자체가 혁신이었다. 덕분에 오무라는 [[사무라이]]의 특권을 박탈하고 전국민을 무장시키는 사상에 반감을 가진 초슈번 무사들의 습격을 받아 사망하지만 그의 동지인 [[야마가타 아리토모]]나 [[기도 다카요시]] 등은 그의 구상을 받아들여 일본군을 창설하는 데 힘을 바친다. [[에도 막부]]가 쓰러진 1868년 말, 천황의 [[도쿄]] 행차를 호위하기 위해 각 번에서 차출했던 어친병(御親兵)을 1870년에 상설편제로 전환하였다. 이는 각 번들이 독자적으로 보유한 상비군을 해체하고 천황 직속의 무력을 조직하려는 정책이었고 총 병력은 8,000명에 달했다. 21세기의 기준으로 보면 굉장히 소수지만 당시 일본의 번들은 독자적으로 이만한 병력을 원정에 내보낼 능력이 없었다. 서양식의 군복을 입고 막부에게 넘겨받은 최신형 [[샤스포 소총]]을 장비하였던 어친병의 무력을 기반으로 메이지 신정부는 폐번치현을 단행, 봉건제의 잔재였던 번을 해산시켜 현으로 만들어 중앙집권화시켰으며, 각 번들이 보유하던 [[소총]]과 [[화포]]들이 중앙 정부로 넘어온다. 내전이 막 끝난 상태에서 다수의 신식무기와 훈련된 병력이 각 번의 손 안에 있었지만, 의외로 순순히 폐번치현이 이루어진 데에는 어친병의 존재 말고도 각 번들의 재정 상태가 전쟁과 흉작으로 크게 나빠진 점도 컸다. 특히 구 오우에쓰열번동맹 소속 번들은 신정부에 막대한 배상금을 바쳐야 했으므로 번정부의 운영이 힘들었다. 그래서 폐번치현 이전에 이미 신정부에 권한을 양도하는 번도 소수 있었다. 다만 유신의 주역이었던 사츠마번의 시마즈 히사미츠만큼은 이 폐번치현에 크게 반발했으며 매일 불꽃놀이를 하는 형태로 항의를 표시했지만 끝내 굴복한다. 1871년에는 진대병(鎭臺兵)을 창설한다. 진대병은 이름 그대로 국내의 내란에 대비한 군대로 요새를 기반으로 주둔하며 수비 위주의 전략을 구사하는 프랑스식 사단 편제를 가졌으며 구 무사들이 생활고로 점차 여론이 나빠지던 시점에서 국체 수호를 위한 진압무력의 성격이 컸다. 초창기에는 동경, [[오사카]], [[히로시마]], [[센다이]]의 4개 진대를 편제했고 징병령 발효 이후로는 병력이 늘어나게 된다. 진대병 창설에 따라 1872년 5월에 어친병은 폐지하고 근위사단으로 개편한다. 1872년 11월에는 1927년부터 병역법으로 바뀐 [[병역법/일본|징병령]]을 발효하면서 무사 위주로 돌아가던 국군이 평민 병사로 충원되고, 서구 [[유럽]]의 전례를 따라 [[천황]]을 육해군 [[대원수]]로 추대하였다. 그리고 유신의 주역이었던 [[사이고 다카모리]]를 육군대장에 임명하여 근대적 군대의 체제를 갖춘다. 뒤이어 1873년에는 각 번에서 생활하던 무사들에게 신정부에서 주던 월급을 정지하는 질록 처분을 단행, 동원의무에서 해제시킨다. 당시 일본 육군 대장이었던 [[사이고 다카모리]]는 구 무사들이 평민보다 전투력에서 우월하다는 점을 들어 무사들 중심으로 군대를 꾸려나가는 이른바 강병(强兵)체제를 주장했지만 [[메이지 6년의 정변]]으로 사츠마번 출신이 대거 공직을 사퇴, 낙향하면서 [[국민개병제]]가 정착한다. 이런 주장의 배경에는 초슈번과 달리 사츠마번은 전군이 사무라이었고 이들이 큰 활약을 했기 때문에 평민의 자질을 무시하던 정서를 가졌던 것이 있었다. 이후 분노한 무사들로 인한 사족반란이 빈발했다. 진대병 체제가 효과적으로 작동하여 대부분의 반란은 진압당했지만 최대의 반란인 [[서남전쟁]]에서는 고전했다. 사츠마군의 [[발도 돌격]]에 정부군이 도주하는 추태를 여러 번 보였지만 결국 화력에서 앞서는 정부군이 승리하여 근대식 일본 국군의 체제가 비로소 완전히 정착한다. 농민을 비롯한 평민들 역시 처음에는 국민개병제를 환영하지 않았다. 1873년부터 1874년까지 관청이나 징병소를 습격하는 등의 폭동이 기록된 바로만 16회 일어었으며 대략 10만여 명의 인원이 이에 연루되어 처벌되었다.[* Andrew Gordon, "A Modern History of Japan", 2002] 초창기에는 [[프랑스]]식 육군을 지향했지만 1870년에 벌어진 [[보불전쟁]]에서 프랑스가 참패하면서 [[프로이센]]식 군사제도에 지대한 관심을 가져 교관으로 맥켈을 초청하고 프로이센으로 수뇌부가 유학을 떠나면서 일본육군은 1886년에는 완전히 [[독일]]식 체제로 개편한 반면 해군은 당시 대영제국이자 해군 강국이었던 영국으로부터 교관을 초빙하여 도쿄 츠키지에 해군사관학교를 만든 뒤 육성하다가 히로시마현 에타지마시 에타지마섬으로 해군병학교를 창설하여 그쪽에서 배우게 된다. 이렇게 젊고 유망한 청년들을 모아 해외초빙 교관으로부터 철저하게 서양식 전술을 업데이트하고 세금을 철저히 거두고 허리띠를 졸라 영국으로부터 최신식 함선 미카사 등을 구입하거나 장비 최신화를 이어나갔다. 그렇게 힘을 쌓으면서 청일전쟁에 즈음해서는 내란의 우려가 사라지고 식민지의 필요성이 높아지고 대외원정의 필요성이 늘면서 구 진대병을 [[독일]]식 사단편제로 바꾼다. [[청일전쟁]]때는 [[일본군]]이 본격적으로 위용을 드러냈다. 이미 [[청나라]]과의 일전을 대비하고 엄청난 양의 예산을 쏟아부은 [[일본군]]은 청나라가 막대한 국고를 이용해 여러나라에서 함선을 사서 모은 최신식이면서 화력도 뛰어난 [[북양함대]]를 만들었으나 엉망진창인 지휘체계가 이어질 정도로 지지부진한 개혁과 이로인한 지리멸렬한 전술로 인해 청군은 북양함대를 전부 잃어버리는 참패를 당하고 일본이 사실상 조선반도와 만주 일부를 차지하면서 동북아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다. 그러나 이번에는 [[러시아 제국]]이 태클을 걸었다. 패배한 중국은 요동반도를 돌려받기 위해 러시아에게 SOS를 쳤고 러시아가 으름장을 놓고 독일, 프랑스도 러시아에 동조하며 포기하라는 압박에 결국 요동반도를 포기한다. 그런데 청나라가 일본의 행보를 보고 러시아 제국에게 요동반도를 줘 아예 주둔시켜 완충지대로 만들기로 하고 러시아 제국은 부동항을 원했기에 수락하여 일대를 요새로 만들고 함대를 주둔시킨다. 당연히 일본 제국은 이런 러시아 행보가 달가울리가 없었으나 일단 참고 천천히 조선반도를 먹으려 한다. 그러나 [[명성황후]]를 비롯한 조선의 국왕 고종도 러시아의 힘을 빌려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밀착하기 시작하고 러시아 제국도 조선을 잘 구슬리기만 하면 부동항을 대거 얻을수 있었기에 조선반도를 완전히 먹으려던 일본에게 사사건건 방해하기 시작한다. 일본 제국의 수상인 이토 히로부미는 타협점을 찾으려 했으나 러시아 제국은 이를 무시하였고 되려 조선반도 노릴 생각 말라는 답변만 날라온다. 결국 일본 제국은 비협조적인 조선을 일단 손보기 위해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키고 이후 조선 왕실에 개입하여 친일파로 가득 채우기 시작, 그렇게 조선을 훌륭한 보급기지 역할로 하는데 성공한다. 그렇게 후방이 확보되자 러시아 제국과 전쟁을 결심한 일본 제국은 선전포고 없이 뤼순을 공격하면서 [[러일전쟁]]이 발발한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은 크나큰 피해를 입는 등의 고전 끝에 뤼순을 점령하면서 지구 반대편에서 장거리 원정을 온 러시아 최강함대 발트해 함대를 맞이한다. 그렇게 하늘은 운을 일본에게 몰아줬는지 러시아 제국 내부에서 피의 일요일 사건이 터지면서 내부문제로 러일전쟁에 신경쓰기도 힘들었으며 발트해함대 접근을 미리 알고 포진한 [[쓰시마 해전]]에서는 T자의 ─선에 아군 함대를, │선에 적 함대를 위치시키는 전술로 화력을 집중시키며 [[러시아]] 발트 함대를 고기밥으로 만들면서 [[러일전쟁]]에서 세계의 예상을 깨고 압도적인 규모의 [[러시아군]]을 물리쳤다.. 위 일본군의 전술은, 보통 군함의 화력을 가장 많이 집중할 수 있는 방향이 측면이므로, 아군은 적 함대 선두에 전함대 화력을 집중시킬 수 있지만, 적함은 선도함 한 척의 그나마도 절반의 화력만이 유효하게 만든다. 이 전술은 [[전열함]]시대부터 이어져온 전통적인 필살 전술이지만 각 함간 통신이 자유롭지 못하고 유효사거리가 짧았던 근대에는 완벽하게 성사시키기 어려운 전술이라 성공사례가 적었다. 이 쓰시마 해전은 [[함포]] 사거리의 중요성이 처음으로 드러난 [[해전]]이었으며 이 때의 전훈을 받아들인 결과로 자잘한 중소구경의 무장을 생략하고 대구경 주포에 올인한 [[드레드노트]]급 [[전함]]이 등장하면서 [[거함거포주의]] 시대가 열린다. 이러한 [[일본군]]의 상승세는 [[제1차 세계대전]]까지 지속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