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본도 (문단 편집) === 중국의 왜도 === >곤이(昆夷)로 가는 길은 멀어서 다시는 통할 수 없으니, >옥도 절단한다는 그 칼을 누가 찾을 수 있으리오? >근래에 보검이 일본국에서 나와, >월(越) 상인이 창해 동쪽에서 그것을 얻었네. >물고기 껍질을 장식해 붙인 향나무 칼집, >노란빛과 흰빛이 섞인 놋쇠와 구리. >백금에 호사가의 손으로 넘어오니 >허리에 차면 요괴를 물리칠 수 있단다. >듣기에 그 나라는 큰 섬에 있고, >토양이 비옥하고 풍속이 좋다고 하네. >그 선조인 [[서복]]이 진나라 백성을 속여, >약을 캐러 갔다가 동남동녀 그 곳에서 늙어갔고 >온갖 장인과 오곡을 그들에게 주어 살게 하니, >지금에 이르도록 공예품 모두 정교하도다. >---- >[[구양수]](歐陽脩, 1007~1072) 일본도가(日本刀歌) 송나라 시절에 일본과의 무역을 통해 [[타치]](太刀)가 수입되긴 했지만 이때는 실전(군사용) 무기가 아니라 독특한 양식의 외국 칼, 수집품 취급을 받았다. 일본도가 실전 무기로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명나라 시대에 [[왜구]]가 준동하면서부터였다. 당시 명나라는 이른바 해금정책으로 대외무역을 크게 제한하였는데 무역으로 큰 돈을 벌던 중국과 일본의 상인들이 이에 저항하여 용병을 고용하고 밀무역을 하면서 해적 집단으로 변화되었다. 여기에 많은 중국인, 일본인 용병들이 한 몫을 잡기 위해 뛰어들면서 명나라 해안에 대한 노략질이 심해졌다. 특히 [[저장 성]] 지방의 피해가 막심했다. 이때 절강성에 부임한 군사령관 [[척계광]]은 [[낭선]], [[등패]]를 비롯한 신무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왜구의 주특기인 일본도 검술과 돌격을 저지하는 [[원앙진]]을 고안하고 기동력 있는 경량 화포(호준포 등)을 채용하고 [[화승총]]도 채용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도의 긴 길이에서 나오는 사거리와 절삭력을 보고 일본도, 특히 [[오오타치]]의 영향을 받아 [[쌍수도]]라는, 화승총병이 백병전시 사용할 무기를 만들었다. 또 일본 검술도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투항 왜구에게 검술을 배우는 동시에 1561년에는 일본에서 카게류(陰流) 검술[* 일본 고류 검술 3대 원류(나머지는 넨류, 신토류) 중 하나.]도 수입하여 기술 목록[* 모쿠로쿠(目錄). [[면허개전]]자에게 내리는 기술의 비전을 설명한 두루마리. 다만 아주 상세하게 설명한 건 아니고 주로 검술을 끝까지 배운 사람이 까먹는 것을 방지하도록 기술명과 간단한 묘사를 첨부한 것들이다. 이 시절 무술교육은 문외불출과 구전이 기본이었다.]까지 입수했는데, 신유년에 입수했다 하여 신유도법(辛西刀法)이라고도 부른다.[* 다만 신유도법이 정말로 카게류를 응용했다면 투로에 그 흔적이 남아 있어야 하는데 카게류의 후대 검술 카타와 비교 검증해본 결과 대부분의 투로가 기존의 명나라 무술 동작을 재정립한 것으로 보인다. 카게류가 신유도법에 끼친 영향은 기세를 몰아 돌격하는 것과 잔심으로 방심하지 않는 것, 노다치를 쓸 때 칼날에 천이나 새끼줄을 감고 쓰는 용법에 한정되는데 척계광이 입수했던 카게류 전서가 심한 흘려쓰기로 거의 해독이 불가능했던 탓으로 여겨진다.] 이후로 명나라에서도 일본도를 이용한 검술 연구가 이루어져서 왜도로 창을 이기는 방법을 담은 정종유(程宗猷)의 단도법선(單刀法選)이 출판되었으며 1621년 모원외가 15년이라는 긴 시간에 걸쳐 2천여 종의 병법서를 참고하여 정리한 병법서 《무비지》에도 '일본음류도법'과 '왜구도법'이 기록되었다. 처음에는 일본도 양식을 그대로 베껴서 생산했다. [[이순신]] 장군이 받은 명조팔사품 중에 대도의 쓰바(鍔)는 일본의 기쿠 양식을 그대로 복제한 것. 하지만 나중에는 명나라 식으로, 중국 양식의 물건으로 대체된다. 이러한 일본도들을 중국에서는 '왜도(倭刀)’[* 중국어 발음은 wōdāo(워다오).]라고 불렀으며 청나라 말엽까지 제식병기로도 사용되었다. 화북에서는 양손으로 사용하는 도검이라는 의미로 [[쌍수도|쌍수대]](雙手帶)[* 중국어 발음은 shuāngshǒudài(솽서우다이).]라고도 불렀는데 [[박도]](朴刀)와 같이 다른 양식의 양손도검도 똑같이 쌍수대라 칭했기 때문에 주의가 필요하다. 1627년 [[정묘호란]]에서 승리한 후금은 조선과의 교역을 통해 명나라와의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기 시작했는데, 그 와중에 조선인 포로 수천 명을 해방하는 조건으로 왜도 500자루를 요구하기도 했다. 청나라가 중원에 입성한 이후에도 섭정왕 [[도르곤]]이 조선에 특별히 일본도를 구해다 바치라 요구한 일이 있었고 조공 물품 중 환도를 일본도로 바꾸라고 하기도 했다.[[http://db.history.go.kr/id/bb_011r_001_10_0240|#]][[http://db.itkc.or.kr/dir/item?itemId=ST#/dir/node?dataId=ITKC_ST_P0_A25_10A_16A_00230|##]] [[중화민국|민국]] 시대에 들어서면 묘도(苗刀)[* 중국어 발음은 miáodāo(먀오다오).]라 불리는 양손으로 잡는 장도(長刀)가 나타나는데 이전의 왜도 양식과는 대동소이하다. 근대에 들어오면서 '왜'라는 명칭이 꺼려지게 되자 칼날이 풀의 새싹처럼 가늘고 예리하다는 뜻으로 묘도라 불리게 된 듯 하다. 중국 무술 중에 묘도를 사용하는 무술도 있긴 한데 묘도조차 현대 우슈에서 사용하는 무기들처럼 지나치게 경량화 시켜 잘 휘게 만들어 사용하기도 한다. 묘도가 최소 130cm가 넘어가는 장도이기에 본래의 방식으로 만들 경우 무게중심이 쓰바와 멀어져 우슈 검술처럼 막 휘두르지 못해 구사 가능한 동작이 제한되기에 이런식의 경량화를 시키는 것인데 당연히 다른 우슈 무기술과 마찬가지로 실전성은 무척 떨어진 체조 동작이 되어버린다. 반면에 무게를 제대로 만든 묘도를 사용할 경우에는 상당히 위력적인 모습이 연출되기도 한다. [[중국]] 배경인 [[무협소설]]에서도 종종 언급되기도 한다. 보통 중국 배경의 무협물에서는 [[도]]는 두껍고 [[검]]은 가는 경우가 많은데 일본도는 검처럼 가느다란 도로 찌르기에도 큰 문제가 없어 검과 도의 장점을 고루 가진 무기로 평가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