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본도 (문단 편집) === 관련 기록 === >의령(宜寧)에 거주하는 선군(船軍) 심을(沈乙)이 일찍이 일본에 건너가서 칼 만드는 법을 배워 칼 한 자루를 만들어 올리니, '''일본 칼과 다름이 없으매, 명하여 군역(軍役)을 면제시키고 옷 한 벌과 쌀·콩 아울러 10석을 하사하였다.''' >[[http://db.itkc.or.kr/inLink?DCI=ITKC_JT_D0_A12_06A_01A_00060_2005_007_XML|『세종실록』 1430년 6월 1일]] >"임금이 명하여 종무승(宗茂勝)이 사자(使者)로 보낸 두로가문(豆老可文)에게 칼을 만들도록 하는 일과 관직을 제수(除授)하는 일의 가부(可否)를 영돈녕(領敦寧) 이상의 관원에게 의논하도록 하니, 정창손(鄭昌孫)ㆍ윤필상(尹弼商)ㆍ홍응(洪應)ㆍ노사신(盧思愼)ㆍ윤호(尹壕)는 의논하기를,“'''두로가문(豆老可文)이 비록 칼을 만드는 일에 교묘(巧妙)하다고 하지마는, 우리 나라에도 또한 훌륭한 공인(工人)이 모자라지 않으니, 그로 하여금 칼을 만들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더구나 외인(外人)에게 관직을 제수(除授)하는 것은 모두가 공(功)이 있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이 사람은 특별히 공로가 없는데도 칼을 가는 자질구레한 일로써 갑자기 관직을 제수한다면 후에는 반드시 전례(前例)를 원용(援用)하여 관직을 희망하는 사람이 많아질 것입니다.”하고, 한명회(韓明澮)ㆍ심회(沈澮)ㆍ윤사흔(尹士昕)ㆍ이극배(李克培)는 의논하기를,“'''우리 나라 공인(工人)이 제조한 칼은 저들의 잘 단련(鍛鍊)된 것과 같지 못하니, 저들로 하여금 시험적으로 주조(鑄造)하게 하여 만약 보통 기구(器具)보다 특이하게 된다면 작은 관직을 제수하고 그들이 잇달아 왕래하도록 허가하여 우리 공인(工人)들로 하여금 전습(傳習)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하였다. 또 예조(禮曹)에 물으니, 예조에서 말하기를,“시험하여 만들도록 하는 것은 해로울 것이 없습니다."하자, 전교(傳敎)하기를,“갑오년의 예(例)에 의거하여 그들로 하여금 칼을 만들게 하라.”하였다. >[[http://db.itkc.or.kr/inLink?DCI=ITKC_JT_I0_A13_09A_24A_00030_2005_019_XML|『성종실록』 1482년 9월 24일 ]]왜인 두로가문(豆老可文)에게 관직을 주고 기술을 전습받자는 내용[* 흥미롭게도 칼을 잘 만드는 일본 장인에게 관직을 주고 그 도검 제작법을 전습하자는 의견과 우리나라에 있는 실력 있는 대장장이들로도 충분하니 그럴 필요는 없다는 의견이 부딪혔다. 이후 딱히 관직을 제수했다는 기록은 없는 것으로 보아 이때는 굳이 두로가문의 도검 제작법을 전습할 필요는 없다는 방향으로 결론이 난 듯하다. 어쩄든 이후 조선에서 일본도의 성능이 높이 평가되는 것의 시발점처럼 보이는 기록이다.] >"군기시(軍器寺)에 간직한 왜도(倭刀)는 아무리 하품(下品)이더라도 몹시 날카로우니(甚銳利)[* 칼이 날카롭다는 당연한 소리가 아니라, 무기가 정(精)하거나 예(銳)하다는 건 그냥 강하고 좋은 무기라는 뜻의 관용표현이다.] '''진실로 군국(軍國)의 중한 기구인데''' 가볍게 화매(和賣)하는 것은 미편(未便)합니다" >[[http://db.itkc.or.kr/inLink?DCI=ITKC_JT_I0_A18_05A_15A_00020_2005_026_XML|『성종실록』 1487년 5월 15일]] >신(臣)은 왜의 땅에 와 있은 지 3년 동안 왜놈들이 날마다 군기와 창검을 수련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전후에 항복해 온 왜인 가운데는 반드시 칼을 알아보고, 칼을 만들고, 칼을 갈 줄 아는 자가 있을 것이니, '''충신(忠信)으로 대해 주고 녹봉을 후히 주어 날마다 달구어 만들어 내게 하고''', 부산에서 만약 전일과 같이 서로 무역하게 될 경우에는 칼을 잘 알아보는 통역을 시켜 '''귀중한 물품을 많이 싣고 가서 사 들여오게 하여 창졸(倉卒)간의 사용에 대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간양록]]』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80A_0010_010_0020_2003_002_XML|적중문견록(賊中聞見錄)]] >(** 1596년(병신) 1월 1일의 바로 앞에 한 장으로 다섯 줄에 걸쳐 적혀 있는 글이다.) >도양장(고흥군 도양면)의 농사일에 부리는 소가 7 마리인데, 보성 림정로(臨廷老) 1 마리, 박사명(朴士明) 1 마리를 바치지 않았다. 정명열(丁鳴悅)은 바로 길다란 서화첩(長帖)을 받아 갔다. 이는 정 경달(丁景達)의 아들이다. 갑사 송한(宋漢). 1월 3일에 배 위에서 이번에는 환도 4 자루, 왜놈칼 2 자루를 만 들었다. 아들 회가 가지고 가던 중에(이 뒤에 분실) >『[[난중일기]]』[[http://www.davincimap.co.kr/davBase/Source/davSource.jsp?Job=Body&SourID=SOUR001258&Lang=%ED%95%9C%EA%B8%80&Page=5&View=Text|1596년 1월]] >[[교토|왜경]](倭京)에 머물렀다. '''군기(軍器)로 소용되는''' 장검(長劍) 1백 자루를 샀다. >---- >일본에는 다른 나라 사람에게 '''병기(兵器)'''를 몰래 파는 일로 금령이 있었다. >타이라노 카게노부([ruby(平,ruby=たひらノ)][ruby(調,ruby=かげ)][ruby(信,ruby=のぶ)])가[* 아마 [[https://ja.wikipedia.org/wiki/%E6%9F%B3%E5%B7%9D%E8%AA%BF%E4%BF%A1|야나가와 카게노부]]인가 보다. 타이라는 [[우지(성씨)|우지]]다. 그러나 일본어판 위키백과에서는 그의 [[족보]]를 모른다고 썼으니 조선에서 무슨 근거로 그의 우지를 타이라라고 썼는지 모르겠다.] 생시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아뢰기를, “조선이 조총과 환도(環刀) 등의 물품을 사고자 하니, 허락해도 될는지 모르겠습니다.”하니, >이에야스가 말하기를, “싸움을 당하면 싸울 것이지, 어찌 병기 없는 나라와 그 승부를 겨뤄서야 되겠느냐? 하물며 이웃 나라가 사고자 한다면 어떻게 금지 하겠는가?”하였다 한다. >그러므로 이번에 사는 병기는 조금도 금지함이 없어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매매하였던 것이다.'''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81A_0020_020_0060_2003_002_XML|『해사록』 1607년 6월 6일]]-[[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81A_0020_020_0080_2003_002_XML|8일]] >상이 [[김상헌(조선)|김상헌]]에게 이르기를, "호사(胡使)가 요구한 왜도(倭刀)는 두 자루를 주었을 뿐인데, 부족한 감이 없지 않은가?"하니, >김상헌이 회계하기를, "별단(別單)으로 준 것은 비록 두 자루뿐이지만 '''무역한 수량은 거의 200자루에 이르니'''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부사가 이르기를, "어제 말씀드렸던 국왕께서 보배로 여기시는 왜도를 얻고 싶습니다." 하였다.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P0_A03_06A_12A_00240_2009_004_XML|『승정원일기』 인조 3년(1625) 6월 12일]] >오랑캐는 호송관(護送官) 이홍망(李弘望)과 함께 상의하고 사로잡혀간 남녀 1만 2천여 명을 돌려보냈는데, 김진(金榗)·박유달(朴惟達) 등의 부부도 아울러 이 속에 끼어 있었다. 오랑캐 차사가 압송해 와서 '''왜도(倭刀) 5백 자루를 요구했다.'''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33A_0020_000_0060_2002_008_XML|『속잡록』 1627년 3월 10일]] >청나라 장수로서, 우리나라에 관한 일을 맡은 자가 일찍이 일본의 보검을 구하므로, 민간에서 찾아 얻었더니 매우 좋은 칼이 있었다. 공이 이 칼을 받아 감추고, 낭관들을 시켜 다시 다른 칼을 구하게 하였더니, 다시 칼 한 자루를 구하여 올렸다. 공이 말하기를, "비록 처음 칼만을 못하지만 또한 쓸 만하다."하고, 그것을 청장에게 주었다. '''얼마 뒤에 청국 황제가 그 장수의 칼을 보고 다시 구하였는데,''' 공이 즉시 감추어 두었던 것을 내어주며 낭관에게 말하기를, "그때 내가 이미 이럴 것을 예측하고 있었다."하니, 듣는 자가 탄복하였다.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00A_0300_010_0020_2002_006_XML|『연려실기술』 29권]]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아이신기오로 도르곤|섭정왕]]이 구하는 특별히 만들어야 할 장검'''을 일본에서 만들게 하기는 매우 어려운 형편입니다. 지금 후한 값으로써 왜관에 머무르고 있는 왜인 장사꾼에게 몰래 도모한다면 이익을 탐하는 무리인 만큼 설혹 받아 가지고 가시 청국에서 보낸 견본처럼 똑같이 만들 것이나 정교하게 만들지 기필할 수 없습니다." >[[http://db.history.go.kr/item/compareViewer.do?levelId=bb_011r_001_10_0240|『비변사등록』 인조 25년(1647) 10월 9일]] >---- >호조가 아뢰기를, "향장검(鄕長劍) 16병(柄)과 향단검(鄕短劍) 8병은 정축년(1637)의 예(例)대로 모두 왜도(倭刀)로 바꾸어 지급해 달라고 하기에 여러 칙사의 차비 당상 역관들로 하여금 거듭 설명하게 하였지만 끝내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정명수|정칙]]이 곧바로 응판색리(應辦色吏)를 불러 말을 전하기를, '''‘앞으로 예단의 환도는 모두 왜도를 쓰는 것으로 사유를 갖추어 입계하고 영원히 등록(謄錄)으로 남기십시오.’라고 하면서 몹시 급히 들여보내라고 하였습니다.''' 그간의 사세로 볼 때 거절하기 어려울 듯하니, 왜도 가운데 보통의 품질로 가려서 바꾸어 지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P0_A25_10A_16A_00230_2013_071_XML|『승정원일기』 인조 25년(1647) 10월 16일]] >---- >상이 [[창덕궁 희정당|희정당(熙政堂)]]에서 청사(청나라 사신)를 접견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왜검(倭劍)을 사서 보내라는 분부가 있었는데, 소방(小邦)이 힘을 다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근래 왜인이 병기(兵器) 무역을 전혀 허락하지 않으므로, 지금 10년이 되도록 아직 사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사신이 말하기를, "그 말씀대로 돌아가 고하겠습니다." 하였다. >[[http://db.itkc.or.kr/inLink?DCI=ITKC_JT_P0_A27_01A_20A_00020_2005_021_XML|『인조실록』 1649년 1월 20일]] >---- >"신들이 인사하고 나온 뒤에 [[정명수|정사]](鄭使)가 이형장을 시켜 신들에게 말을 전하게 하기를, ‘예전에 보낸 환도(環刀)의 견양은 일본에서 제조하기를 도모할 수 없다면 도로 사행 편에 부쳐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번에 사은하는 사행을 다시 보내되 그 견양대로 '''귀국에서 두 자루를 정밀하게 만들고 말을 잘 만들어 보내기를, 「그 견양을 지금까지 머물러 두었던 것은 반드시 어떻게든 왜국에 시도해 보려는 것이었는데, 어찌할 방도가 없어 부득이 본국에서 만들어 보냅니다. 하지만 품제(品制)가 좋지 못하여 매우 황공합니다.」라고 하십시오.'''’하였습니다. 해조로 하여금 이대로 거행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P0_A27_01A_23A_00130_2013_075_XML|『승정원일기』 인조 27년(1649) 1월 23일]] >倭國刀, 背闊不及二分許, 架於手指之上不復欹倒. 不知用何錘法, 中國未得其傳. >왜국의 칼은 칼등 폭이 2푼(6mm)에 못 미치나, (칼등으로 세워서) 손가락 위에 올려도 기울어지지 않는다. 어떻게 두드려 만들었는지 모르겠는데 중국에는 그 방법이 전해지지 않는다. >[[https://i.imgur.com/tQHOVuw.jpg|『천공개물』]] >옛날 [[조조(전한)|조조(晁錯)]]가 병법을 논하면서 ‘기계가 예리하지 않으면 자기의 군졸을 적에게 주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기고 지는 것이 기계와 관련 있다는 것은 매우 분명한 사실이니, 신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일본 검이 좋은 이유는 쇠와 관련이 있을 뿐만 아니라 쇠를 단련하는 기술이 정교하여서입니다. 우리나라도 남쪽에서 양질의 철이 많이 생산되니 백 번 정도 쇠를 담금질하여 두드려 만들기를 일본의 방법대로 한다면 또한 예리한 검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U0_A01_09A_24A_00190_2014_029_XML|『승정원일기』 영조 1년(1725) 9월 24일]] 전 만호 이태배의 상소 >대개 우리나라 사람들은 글 읽는 자는 공허한 것만 따르고 명물(名物)에는 소략하며, 기계를 만드는 자는 견문(見聞)에만 빠지고 도수(度數)에는 어두워서 백예(百藝)가 폐이(廢弛)되어도 옛것을 본받으려 하지 않으니 비록 충지(忠智)하고 강력한 신하가 있을지라도 빈손을 들고 준마를 달려가본들 무슨 일에 보탬이 되겠습니까? >백공(百工)의 일은 대저 다 성인의 지혜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삼대(三代 하(夏)·은(殷)·주(周))의 기계를 보면 옛것일수록 더욱 교묘합니다. 그리고 옛날의 명장(名將)들은 다 교묘한 생각이 있었으므로 사기(史記)에 일컫기를 ‘제갈양(諸葛亮)의 통수개(筩袖鎧)는 오석뢰(五石弩)로 쏘아도 들어가지 않았다.’ 하였고, 도목(都穆)이 한(漢) 나라 창(槍)의 정교함을 평하여 ‘예나 이제나 한 가지 기계를 만들어도 일찍이 구차한 것이 없다.’고 감탄하였습니다. 우리나라는 지방(地方)이 수천 리에 산과 바다의 이로움을 의지했으니 땅이 부족하지도 않으며, '''왜인(倭人)들이 진주(晉州)의 철(鐵)을 사다가 달구어 보도(寶刀)를 만들고''' 가서(哥舒)의 2년생 나무를 북사(北使)가 얻으매 보배로 삼으니, 병기의 재료도 달리 구할 것이 없습니다. >낙상지(駱尙志)가 말하기를, “한 사람으로 열 사람을 가르치며 열 사람으로 백 사람을 가르치면 수년 안에 정병 수만(數萬)을 얻을 수 있다.” 하였으니, 백성이 옛날의 백성과 다르지 않은데 진실로 백공(百工)을 감독하여 그 병기를 만들고, 좋은 스승을 모집하여 그 기예를 익히게 하고, 무릇 장수(將帥)의 지위에 있는 사람이나 무기를 가진 무리들이 다 도(圖)를 보고 보(譜)를 참고하여 그 방술을 통하고 그 용법을 찾을 수 있게 되면, 전승(全勝)을 싸우기 전에 책정하고 큰 공을 무궁한 데에 드리울 수 있으며, 나라에는 정간(楨幹)의 인재가 풍부할 것이며 가정에는 간성(干城)의 노래가 울려퍼질 것입니다. >저 사자가 공(毬)을 희롱할 때에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자빠지고 엎어지면서 온종일 쉬지 않습니다. 그 사자가 코끼리를 치고 토끼를 잡을 때에 미쳐 전력(專力)을 쓸 수 있는 것은 공놀이에서 얻어진 기술이며, 왜인(倭人)들이 한가하게 있을 때에 앞에다 짚베개(藁枕)를 만들어 놓고 손에는 나무로 만든 칼(木刀)을 쥐고 한만(閒漫)히 그 짚베개를 치면서 그 자세를 연습하는데 그들의 기예가 어찌 신묘하지 않겠습니까?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577A_0270_010_0020_2000_005_XML|『청장관전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부진설(附進說)]] >일본 사람은 칼을 만드는데 칼날은 왼쪽으로 비스듬하게 하고 그 끝은 뾰족하게 하였다. 칼날이 무디면 다만 그 비스듬한 한쪽만 갈아도 칼날이 날카로워지는 까닭에 갈기가 쉽고 오래 쓸 수 있다. >그들은 칼을 제조할 때 강한 쇠와 유연한 쇠를 각각 붙여서 만들기 때문에 '''늘 날카롭고 잘 무디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개 칼이란 칼날이 너무 얇으면 쉽게 닳고, 등이 너무 두꺼우면 무겁기만 하고 또 쇠만 많이 허비되는 것이다. >그런데 일본 칼은 그 두꺼움과 얇음을 꼭 알맞게 하고 또 칼날도 한쪽으로 비스듬하게 하였으니, 연구해 만든 것이 아주 묘하게 되었다.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68A_0070_010_0640_2002_002_XML|『성호사설』 6권. 만물문(萬物門)]] >"일본도(日本刀)는 크고 작고, 길고 짧은 것이 일정하지 않다. 모든 사람들이 장도(長刀) 하나를 소유하는데 그 칼 위에 또 하나의 작은 칼(小刀)을 꽂아두어 잡무에 쓰기 편하도록 한다. 또 하나 자도(刺刀)로 길이가 한 자인 것을 해수도(解手刀)라 하니 이 세 가지는 몸에 지니고 반드시 쓰는 것이다. '''칼이 매우 굳세고 날카로워서(剛利) 중국 칼이 이에 미치지 못한다.'''" >'''대개 도식(刀式)이 견고하고 예리한 것은 왜인들이 으뜸이다.''' 그러므로 그 도식을 그림으로 갖추어 싣는다.[* [[파일:wad3211.jpg]]] >[[http://contents.history.go.kr/front/km/print.do?levelId=km_014_0060_0030_0030_0020&whereStr=|『무예도보통지』 왜검]] >단도(单刀)란 왜노들이 만드는 칼인데 '''단련이 정교하며 만듦새가 가볍고 예리하니 다른 지방의 칼이 이에 미치지 못한다.''' 검신의 빛나는 광채가 눈을 쏘아 보는 사람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며, 그 용법은 좌우로 도약하는데다 기이한 방법으로 의도를 숨기니 인력으로 헤아릴 수 없다. 그러므로 장병기가 항상 짧은 칼에 패배하였다. >[[https://bbs.wenxuecity.com/mrht/366039.html|『단도법선』 단도설(单刀说)]] >쓸쓸한 등잔불에 [[굴원]]의 시를 외다가 / 寒燈誦咽靈均賦 >크나큰 숫돌에 일본 칼을 갈아본다 / 大石磨翻日本刀 >이 천지에 어찌 밭갈이나 낚시질하다 늙어버리랴 / 天地寧爲耕釣叟 >영웅은 본래 개나 닭처럼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오 / 英雄不願狗鷄曺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577A_0020_010_1080_2000_001_XML|『청장관전서』 추야잡감(秋夜雜感)]] >구름을 찌르는 보검 기운 아스라이 보였는데 / 遙瞻寶氣上干雲 >미장(尾張 [[오와리#s-3|오와리]])에 이르니 듣던 바와 틀림없네 / 行到尾張愜素聞 >일본의 예리한 검이 모두 여기서 나니 / 日本利兵皆出此 >곤오검 만드는 신묘한 기술 월등히 빼어나네 / 昆吾妙技逈超群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329A_0230_010_0570_2016_005_XML|『용주유고』 길전(吉田)]] >백 번 담금질은 천하일에게 맡겨 하고 / 付與百鍊天下一 >비파의 나라에서 대상인(大商人)이 전해 오니 / 大賈傳自琵琶國 >상아 끊고 무소뿔 자르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 斷象剸犀不足論 >용광(龍光)이 하늘 찌르는 절벽을 깨고 나왔도다 / 龍光劈出磨天壁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489A_0050_010_0290_2017_003_XML|『성호전집』 일본도가(日本刀歌)]] * 왜검술과 검을 이용한 전술에 대한 기록 >검술은 유래가 오래되어 수십 번을 안과 밖을 뛰어넘는 것이 마치 금수(禽獸)와 같으며, 더러 늘 경쟁을 시켜 사심(死心)을 앞다투어 발휘케 하는데 칼을 휘둘러 서로 치며 반드시 죽이기를 목표로 합니다. 그러나 칼을 휘두르는 사이에 칼등으로 칼날을 받아쳐서 결국 다치지는 않으니 '''그 교묘하게 피하는 기술과 능숙하게 부딪치는 기술은 완연히 [[월녀|백원(白猿)의 검법(劍法)]]이 있습니다. 근기(近技)는 신묘하여 사람마다 검객이 아닌 자가 없고 기계의 정밀함도 다 펼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믿는 것은 장검(長劍)과 철환(鐵丸)인데 철환은 비가 내리듯이 쏟아지고 칼은 숲이 서 있는 것과 같으나, '''총을 쓰는 것은 칼을 쓰는 것에 비해 자못 뒤떨어집니다.''' 그러므로 칼을 가진 자는 천백이고 총을 가진 자는 수십 명이니, 이는 그들의 전술이 근전(近戰)에는 빠르고 원전(遠戰)에는 느립니다. 이런 까닭으로 육전(陸戰)은 좋아하나 수전(水戰)을 싫어합니다. >[[정탁]]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184A_0030_010_0010_2014_002_XML|『약포집』 1593년 8월 15일 명나라 유생 호환에게 보낸 편지]] >오랑캐의 근성은 언행이 경박하고 거칠며, 칼과 창을 잘 쓰고 배에 익숙해 있으므로, 육지에 내려오면, 문득 제 생각에, '''칼을 휘두르며 돌진하는데, 우리 군사는 아직 정예롭게 훈련되어 있지 않은 무리이므로 일시에 놀라 무너져''' 그 능력으로 죽음을 무릅쓰며 항전할 수 있겠습니까? >『[[난중일기]]』[[https://books.google.co.kr/books?id=5TMQBAAAQBAJ&pg=PT269&lpg=PT269&dq=%EB%82%9C%EC%A4%91%EC%9D%BC%EA%B8%B0+%EA%B3%84%EC%82%AC%EB%85%84+9%EC%9B%94&source=bl&ots=vvOSq68k91&sig=ACfU3U2o1oPvXjfZtZ42J1oz8sPSxXadGA&hl=ko&sa=X&ved=2ahUKEwjFksy33czpAhXQfd4KHdTeC-YQ6AEwA3oECAkQAQ#v=onepage&q=%EB%82%9C%EC%A4%91%EC%9D%BC%EA%B8%B0%20%EA%B3%84%EC%82%AC%EB%85%84%209%EC%9B%94&f=false|1593년 9월]] >"사고수계(沙古愁戒)·간내비운소(幹乃飛雲所)·간로수계(幹老愁戒)·조음묘우(照音妙牛)는 칼을 잘 써서 '''우리 나라 살수를 보고 아이들 놀이와 같다고 하였고''', 고사로문(古沙老文)은 칼과 총을 주조하는 법을 안다 하는데 이들 왜인을 어찌하여 머물러 두고 전에 내린 전교에 의하여 배우고 익히게 하지 않는가?"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708002_003|『선조실록』 1594년 8월 2일]] >비망기로 일렀다. "우리 나라 습속은 남의 나라의 기예를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고 더러는 도리어 비굴하게 여긴다. '''왜인의 검술은 대적할 자가 없다.''' 전일 항왜(降倭) 다수가 나왔을 때 그 중에 검술이 극히 묘한 자가 많이 있었으므로 적합한 자를 뽑아 장수로 정하여 교습시키도록 별도로 한 대열을 만들라고 전교를 하기도 하고 친교를 하기도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끝내 실시하지 않고 그 항왜들을 모두 흩어 보냈다. 원수의 왜적이 아직 물러가지 않고 있는데 시속의 습관이 이와 같으니 가탄할 일이다. 지금 이판(吏判)이 도감에 있으니 족히 그 일을 할 만하다. 별도로 한 장수를 뽑고 아이들 약간 명을 선택하여 한 대열을 만들어서 왜인의 검술을 익히되 주야로 권장하여 그 묘법을 완전히 터득한다면, 이는 적국의 기예가 바로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인데, 어찌 유익하지 않겠는가? 훈련 도감에 이르라."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712027_005|『선조실록』 1594년 12월 27일]] >---- >정원에 전교하였다. "아동을 뽑아서 왜인의 검술을 익히게 할 것을 전일에 전교했었다. 경상 감사가 있는 곳에 '''왜장(倭將)이라고 칭하는 투항 왜인이 있는데, 그 왜인의 능숙한 검술 솜씨는 졸왜(卒倭)에 비할 바가 아니라 한다.''' 그 왜인을 속히 상경시켜서 직책을 부여하고 후하게 대우하여 그로 하여금 가르치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801024_002|『선조실록』 1595년 1월 24일]] >왜노(倭奴)들은 전투시에 멀리 있으면 총을 쏘아 잘 맞히고 가까이 있으면 칼을 뽑아 돌진하니 이 때문에 '''천하에 그 칼끝을 당할 자가 없었다.''' (중략) 그래서 척 장군이 왜를 방어함에 있어 총으로 총을 대적하고 검으로 검을 대적하도록 하였으나 여전히 우리의 검이 왜적의 장기(長技)를 대적하기에는 부족함을 걱정하여 반드시 낭선(筅)과 창(槍)으로 방패(牌)와 칼(刀)을 옹호하도록 하였으니 이는 척 장군의 지피지기(知彼知己) 백전백승(百戰百勝)인 것이다. 그러나 왜검도 검이고 우리 검도 검이다. 우리 군사들로 하여금 검법의 묘를 다할 수 있게 한다면 번거롭게 낭선과 창을 쓰지 않더라도 그들의 검을 대적할 수 있을 것이다. >『[[무예제보번역속집]]』 [[https://i.imgur.com/WsA67Bg.jpg|발문]] >왜적은 실로 상대하기가 어려우니 그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왜적은 철환(鐵丸)을 비 오듯 퍼붓는데 한번 맞기만 하면 곧바로 쓰러지고 '''근접해서는 칼을 사용하는데 그 검술이 지극히 기이하니''' 이들은 참으로 상대하기 어려운 적이라고 하겠다.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321A_0230_010_0080_2006_004_XML|『포저집』]] >오랑캐(후금) 군사는 돌격전을 벌여 마구 덤비는(馳突亂戰) 데만 능할 뿐이고 '''예리한 검을 활용하는(銳利劍之妙用) 데는 도저히 왜놈만 못하다.''' 더구나 왜놈의 변사(變詐)와 흉계란 실로 추측할 수 없었지만 그 예리한 장검도 우리의 굳센 화살을 못 당했고 그 변사와 흉계도 우리의 임기응변 앞에는 소용이 없었다. 다만 인심이 해이하여 힘껏 싸우지 않았기 때문에 왜놈에게 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33A_0020_000_0060_2002_008_XML|『속잡록』]] >병조가 아뢰기를, "어느 전투이건 간에 승부는 모두 단병(短兵)으로 육박전을 벌이는 데에서 결판이 납니다. 그래서 사자(射者)·창자(槍者)·총자(銃者)·기자(騎者)가 모두 칼을 차고 있는데, 칼을 차고서도 그 기술을 모른다면 되겠습니까. 절강병(浙江兵), 왜병 그리고 호병을 보면 모두 검법을 알고 있는데, 육박전을 벌일 즈음에 네 가지 기예가 모두 쓸모 없어지게 되면 반드시 차고 있는 칼을 가지고 사생을 결단하려 덤빕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는 군령이 엄하지 못하여 접전해 볼 겨를도 없이 먼저 저절로 무너져버리고 말았으니, 검술이 전진(戰陣)에 그다지 관계가 없다고 여기게 된 것도 진정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선조(宣祖)께서는 그런 점을 아셨기 때문에 시위(侍衛)하는 장사(將士) 및 선전관들 모두에게 검술을 익히게 하고 그 성적을 고과하여 상과 벌을 내렸으므로 그 당시의 연소한 무인들은 모두 용병(用兵)하는 법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제군(諸軍)이 검법을 모를 뿐만이 아니라 칼을 차고 다니는 자도 적고, 각 고을에서 군기(軍器)를 월과(月課) 할 때에도 조총만 비치해 놓았을 뿐 창이나 칼은 폐지하고 만들지 않으니, 지극히 애석한 일입니다." >[[http://sillok.history.go.kr/id/kpa_10609029_003|『인조실록』 1628년 9월 29일]] 병조가 진법과 군졸의 기예에 대해 아뢰다 >---- >박정이 병조의 말로 아뢰기를, "용검(用劍:[[쌍수도#s-3]])은 짧은 병기를 쓸 때에 요긴하게 쓰이는데, 근일에 '''내삼청(內三廳)의 금군과 제색군(諸色軍) 및 각 아문의 군관, 어영군'''에 대해 거듭 명하여 권면하니, 몇 달 내에 입격(入格)한 자가 자못 많았습니다. 도하(都下)가 이와 같으니 지방에서 틀림없이 풍문을 듣고 전하여 배우는 것이 저절로 나라의 습속이 될 것이니, 이보다 중요한 강병(强兵)의 방책은 없을 것입니다. '''전 황해 감사 장신(張紳)이 관하(管下)의 군관(軍官) 수백 명에게 용검을 훈련하고 교습하기를 먼저 청하였고, 북병사(北兵使), 공청 수사(公淸水使), 전라 감사, 경상 감사, 안동(安東), 수원(水原), 광주(廣州)가 모두 훈련하기를 자청하여 지금 교습하고 있다고 합니다.'''"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P0_A07_03A_14A_00110_2009_016_XML|『승정원 일기』 인조 7년(1629) 3월 14일]] 용검 입격자에게 상을 주어 권장하는 뜻으로 목필을 제급하겠다는 병조의 계 >---- >홍명구가 병조의 말로 아뢰기를, "검술(劍術)은 -원문 빠짐- □술(□術)이 전투에 유리하기 때문에 척 장군(戚將軍)이 오히려 한 방면을 지속적으로 교화하는 방법으로 -원문 빠짐- 습속을 이루었는데 능히 약한 것을 강한 것으로 변화시키고 겁 많은 자를 용감하게 변화시켜 마침내 천하의 정병(精兵)이 되어 왜구(倭寇)를 막았습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천승(千乘)의 나라로서 길이가 짧은 병기로 접전(接戰)을 벌이는 기술을 익히지 못하여 그저 적이 보이면 달아나는 것을 능사로 삼고 있으니, 매우 서글픈 일입니다. >고(故) 상신(相臣) 유성룡(柳成龍)은 병사(兵事)에 자못 관심을 두어 증손전수도십칠책(增損戰守圖十七策)을 지어 올렸습니다. 유성룡은 체찰사(體察使)가 되어 오랫동안 절병(浙兵)의 진중(陣中)에 있으면서 박격전을 벌일 때 검술보다 중요한 것이 없음을 익히 보았기 때문에 검술을 긴요하게 사용하는 계책을 선조(宣祖)께 고하였습니다. 그러자 선조께서 매우 옳게 여기시고 금위(禁衛)하는 장사(將士)들에게 모두 검술을 익히게 하고 자주 금중(禁中)에서 친림(親臨)하여 검술을 시험하고 등급을 나누어 시상하여 혹은 작질을 올리기도 하고 혹은 말[馬]을 사급하기도 함으로써 일세(一世)를 고무시켜 국속(國俗)을 절강(浙江)처럼 만들어 복수할 기반을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유성룡이 적신(賊臣) 이이첨(李爾瞻)의 무리에게 배척을 당하여 그가 시행한 검술까지 모두 폐기되었으니, 여기에서도 세도(世道)의 변화를 볼 수 있습니다."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P0_A07_04B_14A_00170_2009_017_XML|『승정원 일기』 인조 7년(1629) 4월 14일]] 젊은 무사에게 귀천을 막론하고 검술을 익히게 할 것 등을 청하는 병조의 계 >---- >병조가 아뢰기를, "'''칼을 잘 쓰는 것이 단병전(短兵戰)에서 가장 중요합니다. 일본과 절강(浙江)은 이것으로써 천하의 강병(强兵)을 만들었습니다.''' 선조조(宣祖朝)에는 당상들도 숙달시켰는데, 이는 참으로 우연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http://sillok.history.go.kr/id/kpa_10801006_001|『인조실록』 1630년 1월 6일]] 병조가 군관들이 칼을 잘 쓰도록 과정을 정해 시험보는 방안을 세울 것을 아뢰다 >산 위로 올라가 진을 치고 있는 것이 수만 명이 되니, 모든 군사들이 보고는 겁을 냈으나, 이미 칼을 빼들고 접전해 와서 갑자기 헤어날 수가 없었다. 이때 제독이 인솔하던 군사는 모두 북방의 기마병으로 화기가 없고, 짧고 무딘 칼을 가지고 있었다. '''적의 보병들은 모두 3, 4척이나 되는 긴 칼을 가졌는데 날카롭기가 비길 데 없었다. 그들과 충돌하여 싸울 적에 좌우로 후려치니 사람과 말이 모두 쓰러져''' 그들의 예봉을 감당할 자가 없었다.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224B_0170_010_0010_2005_002_XML|『서애집』]] [[벽제관 전투]] >---- >중군(中軍)에서 백고초기(白高招旗)를 세우면 각 도수(刀手)는 모여서 대기하는데, '''모두 갑옷을 입는다. 북 소리가 들리면 몸을 날려 왜도(倭刀)의 용법대로 머리를 낮추어 말의 다리를 베고, 몸을 일으켜 말의 머리를 베는 두 가지 도법(刀法) 뿐이다.''' >[[https://i.imgur.com/HraeuHX.jpg|『무비지』 比長刀]] >---- >"고교보(高橋堡)에 이르러 우리 나라에서 잡혀간 사람을 만났는데, 교하(交河)의 사노(私奴) 응상(應祥)이었습니다. 저들의 사정을 자세히 물었더니, 그가 갑군(甲軍)으로서 지난해에 남방의 싸움터에 따라갔는데 남군이 패한 체하고 북군을 유인하여 협격해서 북군이 전멸하고 왕자(王子) 한 사람이 죽었으며, 남군은 태반이 보졸(步卒)인데 '''철갑으로 머리와 몸을 싸고 손에는 큰 칼을 들고 몸을 굽히고 곧바로 달려가 말의 다리만을 찍으며''' 선봉에는 코끼리를 탄 자가 많이 있었다 합니다." >[[https://db.itkc.or.kr/dir/item?itemId=JT#/dir/node?dataId=ITKC_JT_Q0_A06_06A_17A_00030|『효종실록』 1655년 6월 17일]] >---- >“신이 경기 지역의 병력을 처음 정비할 때에 선봉(先鋒)을 만들 목적으로 고을마다 2백 근을 들 수 있는 힘을 가진 자를 뽑아 아병(牙兵)[* 대장기를 호위하는 친위부대, 또는 그 정도로 우수한 정예병을 지칭하는 데 사용된 표현]이라고 부르면서 항상 보살펴 주었고, 또 '''지갑(紙甲)과 대검(大劍)을 만들어 돌격할 때 사용하게 하였습니다'''. 이제 신이 명을 받고 전장에 나가게 되었으니, 그 중에서 1백여 명을 뽑아 데리고 갔으면 합니다.” >[[http://db.itkc.or.kr/inLink?DCI=ITKC_JT_P0_A08_04A_26A_00040_2005_010_XML|『인조실록』 1630년 4월 26일]] 총융사 이서가 전쟁터에 나아가매 아병(牙兵) 중 1백여 명을 뽑아 데리고 갈 것을 아뢰다 >그들의 무기는 칼과 총을 제일로 친다. 칼을 찬 자는 반드시 길고 짧은 두 개의 칼을 차서 '''긴 것은 치거나 찌를 때 사용하고, 짧은 것은 던져서 남이 뜻하지 않는 사이에 맞히면 당장 죽지 않는 자가 없다.'''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79A_0030_040_0010_2003_001_XML|『해유록』]] >강 위에 왕래하는 자들이 혹 한둘 혹 서넛이 큰 칼을 메고 작은 칼을 끼고 있는데 햇빛이 내리쏘아 빛나는 번개와 같았다. 칼날은 매우 예리하고 알몸으로 나가 싸우며 쌍도(雙刀)를 잘 쓴다. 재빠르게 몸을 날려 적은 수로 많은 수를 이기며 보전(步戰)에 능하고 수전(水戰)에 겁을 먹는다. '''칼을 쓰고 총을 쏘는 데는 정밀하나 활과 창을 사용하는 데 서투르며''', 진영을 겁박(劫迫)하고 복병을 설치하면 중국인도 그 꾀에 빠진다.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35A_0010_000_0010_2002_009_XML|『재조번방지』]] >왜이(倭夷)는 보통 호접진(蝴蝶陣)을 치는데, 전투시에는 부채를 휘두르는 것으로 호령을 삼는다. 한 사람이 부채를 휘두르면 무리들 모두가 '''칼을 춤추며 일어나 공중으로 칼날을 번뜩이며 재빨리 휘두른다. 우리 병사들이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다가는 한 칼에 베여 버린다.''' >쌍도(雙刀)는 위를 공격하는 척하면서 아래를 공격하기 때문에 막기가 어렵다. >표창과 단도는 자루를 드러내지 않고 갑작스럽게 던지는 까닭에 예측할 수 없다. >[[https://i.imgur.com/F173kHe.jpg|『주해도편』 왜국사략(倭国事略)]] >赫然曰, 劍術, 天下皆有之, 日本爲最, 我國獨無傳習之人, 心常慨然也。臣欲送一人於東萊, 使之傳習, 府使李瑞雨處, 以劍術可學與否, 觀勢相通之意, 言送矣, 今見其所答, 則以爲似有可傳之路云。臣管下, 有一可學之人, 下送此人, 學劍, 何如? 上曰, 送之, 好矣。 >훈련대장 유혁연이 말하기를, "'''검술은 천하 어디에도 있지만 일본 것이 최고입니다.''' 우리나라 홀로 전하고 익히는 자가 없어 신의 마음이 항상 분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신의 아랫사람 중에 배울 수 있는 사람이 있으니, [[김체건|이 사람]]을 보내 검을 배우게 하면 어떠하겠습니까?"하니, >[[숙종(조선)|상]]이 말하기를, "보내라" 하였다. >[[http://sjw.history.go.kr/id/SJW-D05070270-02100|『승정원일기』 숙종 5년(1679) 7월 27일]] (출처에 들어가면 번역되지 않은 많은 한자 기록들이 있는데 일본도에 관한 기록은 그중에서 위에서 63번째 줄에 있다. 정 찾기 귀찮으면 승정원일기 기록 사이트에서 赫然曰, 劍術, 天下皆有之, 日本爲最, 我國獨無傳習之人, 心常慨然也。臣欲送一人於東萊, 使之傳習, 府使李瑞雨處, 以劍術可學與否, 觀勢相通之意, 言送矣, 今見其所答, 則以爲似有可傳之路云。臣管下, 有一可學之人, 下送此人, 學劍, 何如? 上曰, 送之, 好矣이 기록만 붙어넣기 하고 검색하면 이 기록이 따로 빨간줄로 밑줄 쳐저서 나오니 쉽게 찾을수 있다. 그리고 구글 번역기에 이 기록을 중국어 간체로 번역하면 바로 번역돼서 확인 가능하다.) >---- >'''칼을 쓰는 묘리는 왜인들이 최고이다.''' 그러므로 일향수(日向守) [[아이스 히사타다|애주이향]](愛洲移香)은 "꿈에 신(神)이 원숭이 모양으로 나타나 칼쓰는 비결을 가르쳐 주었는데, 이름을 음류(陰流)라고 한다." 하였다. 우리나라 군교(軍校)인 김체건이 일찍이 사신을 따라 일본에 들어갔다가 그 방법을 배워 와서 지금까지 유전하니, 이른바 왜도(倭刀)라는 검술이다. >[[https://i.imgur.com/O8YLZUY.jpg|『병학지남연의』]] >단도(单刀)란 왜노들이 만드는 칼인데 단련이 정교하며 만듦새가 가볍고 예리하니 다른 지방의 칼이 이에 미치지 못한다. 검신의 빛나는 광채가 눈을 쏘아 보는 사람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며, '''그 용법은 좌우로 도약하는데다 기이한 방법으로 의도를 숨기니 인력으로 헤아릴 수 없다. 그러므로 장병기가 항상 짧은 칼에 패배하였다.''' >[[https://bbs.wenxuecity.com/mrht/366039.html|『단도법선』 단도설(单刀说)]] >이 열여덟가지 자세[* 왜검을 모방한 단도법]를 꾸준히 익힌다면 '''비록 진짜 왜법과 겨루지는 못하더라도 중국의 검술은 모두 90리(三舍)는 물러날 것이다'''. >[[https://i.imgur.com/DHBwsLM.jpg|『수비록』 단도수법설]] >游山東韓晶宇中丞聘之教子與浙人劉雲峰同學倭刀, 盡其技。故公言步戰惟長刀最勝, 當馬斃步鬥時, 公仰天嘆曰: 「使吾得長刀一, 賊不足盡耳。」卒以器械不利, 以身與敵, 悲夫。 >공이 산동에서 노닐 때 중승 한정우가 부른 무술사범에게서 절강인 유운봉과 더불어서 '''왜도倭刀를 배워 그 기예를 다하였다. 그래서 공은 보전步戰에서는 장도가 최고로 좋다고 말하며''', 말이 죽고, 걸어서 싸우게 되자, 공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나에게 장도 한 자루를 달라., 도적놈들은 별거 아니다.”라고 말했으나, 끝내 무기가 이롭지 못해서 맨몸으로 적과 다투었으니 슬프도다, 장부여. >[[https://gall.dcinside.com/qawsedzaxscd/1157|『육부정 문집』 석경암전]] [[http://blog.tianya.cn/m/post.jsp?postId=21865990|원문]] * 근대 서양인들의 기록 >무거운 승마 채찍으로 적을 후려치려는 내 시도는 갑작스럽게 저지되었고, 겨냥한 방향에서 이상할 정도로 빗나가는[* 칼끝이 서까래에 걸쳤기 때문] 반격이 계속 이어졌다. 이대로 있다간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갑자기 실감이 나면서, 리볼버를 가지고 다니지 않은 것이 후회가 되었다. 반사적으로 왼팔을 들어서 머리를 보호했지만 곧 힘이 빠져 아래로 늘어뜨렸고, 그때 소리를 듣고 달려온 모리슨이 총을 쏴서 내 목숨을 구했다. (중략) >왼팔의 상처는 뼈까지 깊게 베였고, 힘줄이 잘려서 나는 지금도 왼손가락 중 세 개는 움직이지 못한다. 오른쪽 어깨의 상처도 심각한 데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의식이 가물가물했다. (중략) 일본인으로 변장한 맥도날드가 피를 뒤집어쓴 일본 병사들과 함께 나타나서 우리를 구출했을 때는 너무 늦지는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습격자들 중 몇 명은 제압당했고, 경비병들이 근처에 남은 잔당들을 수색하고 있다는 보고를 들었다. (중략) 이 사건이 시작됐을 때 나는 잠옷차림에 맨발로 방을 뛰쳐나왔고, 이제는 도살이 일어난 장소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식탁 아래에는 잘린 머리가 굴러다녔고, 머리를 잃은 몸통이 다른 곳에 늘어져 있었다. 발바닥에 굴처럼 물렁한 것이 밟혔을 때 나는 그것이 사람의 눈알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시신 중 하나는 끔찍하게도 이마 쪽부터 자귀로 깎은 나무처럼 한 움큼 잘려나가서 그 안의 뇌가 들여다보였다. (중략) >나는 지난밤 습격자를 처음 마주쳤던 좁은 통로를 관찰했다. 그리고 7피트 정도 높이에 가로로 걸쳐져 있는 작은 나무기둥을 발견했다. 거기에는 손질된 청어처럼 깊은 칼자국이 가득했다. 그것 중 하나라도 제대로 맞았으면 내 두개골을 반으로 쪼개기에 충분했겠지만, 그때 내가 당한 검격들은 칼끝이 기둥에 걸쳐서 약해진 것이었다. 나는 우연히 이 나무기둥 아래에 서 있었기 때문에 살아남은 것이다. 습격자들은 희생자를 찾아 어둠 속에서 마구잡이로 칼을 휘둘렀고, 침실의 매트리스에는 일일이 칼로 찔러 확인한 흔적이 있었다. 침대 다리 하나는 깔끔하게 잘려나갔고, 탁자 위에 놓인 성경은 4분의 3쯤 잘려져 있었다. >Laurence Oliphant, "The Attack on the British Legation in Japan in 1861" >그들은 칼집에서 칼을 뽑는 동시에 위력적인 공격을 가할 수 있다. 경험이 부족한 사람은 스스로 안전하다고 생각한 거리에서 칼을 맞게 된다. >J. G. wood, 『The Natural History of Man』, 1868 >Captain Applin, late commanding H.M.S. Legation Guard, Japan, and late Military Train: >"7년 전쯤, 일본에 거주하는 유럽인은 반드시 권총을 소지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권총을 손에 들고 있으면서도 칼을 든 일본인에게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중략) >내 생각에 우리 검의 가장 큰 결점은 그걸로 벨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검을 얼마나 많이 휘두르건, 직전에 공들여서 칼날을 갈아놓지 않았으면 절대 벨 수 없을 것입니다. >실전에서 검으로 베려고 온갖 방식으로 칼을 들어올리다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겁니다. 크림 전쟁(1853-1856)의 사례에서 알려진 것처럼, 열 번 중 아홉 번은 베기에 실패합니다. >내가 우리 기병대의 검술 훈련에 대해서 늘 하는 말은 베기는 갖다 버리고 찌르기나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한두 번의 군사작전에 참전해본, 충분히 현실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찌르기가 베기보다 유리하다는 것을 깨달을 것입니다. >일본인들은 양손검을 사용하는데, 만약 우리 육군에서 그걸 쓴다면 저는 반대로 찌르기는 버리고 무조건 베라고 했을 것입니다. 왜냐면 그건 칼을 두 번이나 휘두를 필요가 없으니까요. >콜트 리볼버의 작은 탄환과 지나친 관통력에 관련해서, 한 일본인이 콜트 리볼버로 가슴에 총알 두 방을 맞은채 반격해서 두 사람을 살해한 일이 있었습니다. 희생자 중 한 명은 열여섯 곳에 상처를 입었는데 하나하나가 전부 치명적인 것이었습니다. 이건 내가 직접 본 것입니다." >''On Military Equipment'', Journal of the Royal United Service Institution. 1878 >숙련된 일본 검사는 칼을 뽑는 순간 상대에게 치명적인 부상을 입힐 수 있다. 공격자가 실수를 하지 않는다면 방어할 기회는 없다고 보면 된다.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일본인에게 난도질당한 어떤 해병은 한번 베일 때마다 팔다리가 하나씩 잘려나갔다고 한다. >Alexander Michie, 『The Englishman in China』, 1900 >올리펀트는 양팔에 붕대를 감고 있었고, 얼굴은 염증으로 잔뜩 부어 있었다. 그는 해군 수병의 도움을 받아서 내게 "손질된 청어처럼 깊은 칼집이 난" 나무 서까래를 보여줬다. 일본인 칼잡이는 적으로 만나기에는 너무 끔찍한 상대다. >William Blakeney, 『On the coasts of Cathay and Cipango forty years ago』, 1902 >연병장과 연무장에서 오랫동안 검술을 연습한 기병 장교로서, 나는 일본의 검술 교습 방식이 영국 육군의 방식보다 훨씬 낫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특히 말에서 내린 상태의 실제 전투에 대해서는 일본의 양손검술이 유럽의 모든 검술보다 뛰어나다. 울퉁불퉁한 땅, 언덕 사면, 그밖의 장애물이 많은 지형, 또는 뒤섞여 싸우는 난전에서 일본 검술은 많은 이점을 가진다. 어떠한 조건에서든 원하는 방식으로 적을 빨리 제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략) 카타나의 검신은 길이가 26인치 전후로 상당히 짧은 편인데, 이는 사용자에게 뛰어난 기동성(freedom of movement)을 가져다준다. 보병전에서 세이버 같은 긴 칼과 칼집을 다루기가 끔찍하게 성가시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키가 작은 사람이라면 특히 더하다. >카타나의 검신은 세이버보다 짧지만 칼자루는 더 길다. 이 검을 제대로 다루기만 한다면 공격거리가 짧다는 약점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선 긴 칼자루를 양손으로 잡고 내리치는 강한 타격(crushing blow)이 가능하다. 그리고 일본식 검술 훈련은 양손을 모두 단련시키는데[* 근대 [[세이버 검술]]처럼 몸을 한쪽으로 튼 반신세와 직선적인 스텝 위주가 아닌, 상대적으로 스텐스 변경이 자유롭고 자연체에 가까운 움직임], 검술을 배운 사람이라면 양손잡이를 상대하기가 얼마나 까다로운지 알 것이다. 여기에 서양식 군도보다 근접전에 특화된 카타나의 특성이 더해지기 때문에 카타나야말로 목숨을 건 실전에서 최고의 칼이라고 단언하는 것이다. >F. J. Norman, 『The Fighting Man of Japan』, 1905 >노먼 씨와 미야케 씨가 일본의 양손검술, 켄짓수를 시연했고 관중들은 큰 즐거움을 만끽했다. 마치 일본 검객은 공격할 때 개처럼 짖고 맞으면 수탉처럼 울어야 한다고 예법으로 정해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노먼 씨는 또한 싱글스틱을 든 베츠 중사와 한번 승부를 겨뤘다. 그 결과, 비유적으로 말해서 중사는 한 두 번 정도 몸이 반토막났고, 노먼 씨는 몇 번의 재빠른 타격(some shrewd blows)을 받았다. >하지만 이날의 시연은 켄짓수가 주짓수만큼 중요한 운동은 아니라는 인상을 주었다.[* 셜록 홈즈 소설에 홈즈가 주짓수(정확히는 바리츠)를 배웠다는 언급이 나오듯, 당시 영국에서 일본 유술은 호신술로 상당한 관심을 받았다.] >''The Times'', October 19, 1905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