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본서기 (문단 편집) == [[언어학]]적 가치 == 일본서기는 역사학 사료로서뿐만이 아니라 [[고대 일본어]]를 연구하는 언어학적 자료로서도 매우 이름이 높다. 언어학적 연구 결과 일본서기는 '''α군'''과 '''β군'''의 두 군으로 나눌 수 있음이 밝혀졌는데 14~19권, 24~27권은 α군이며 속수언(續守言)[* 660년 나당 연합군의 백제 공격 당시 왜에 포로로 끌려갔다고 한다.]과 살홍각(薩弘恪) 등의 중국계 인사[* 둘은 당나라의 한자음(북방음)에 정통하여 일본 최초로 다이가쿠료(大学寮, 율령제 시대 일본의 최고 교육 기관) 소속 음박사(音博士, 온하카세)에 임명되었다.]가 정통 한문으로 쓴 부분이다. 1~13권과 22~23권은 β군이며 야마다노후히토 미카타(山田史御方) 등의 일본계 인사가 한문으로 썼으되 일본식 어법, 이른바 왜습(倭習)이 나타나는 부분이다. 미카타는 [[통일신라]]에 유학했던 경험이 있는 학승으로, 당대 신라는 당나라와 교류가 많아서 일본보다는 좀 더 한학이 발달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삼국사기]]에 인용되어 전문이 실려있는 '답설인귀서'를 봐도 7세기 신라인들이 중국인들이 흠 잡을 수 없는 고급 한문 문장 구사가 가능했음을 알 수 있다.] 미카타 본인이 당나라에 직접 유학한 경험은 없어 한문을 완벽히 구사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우선 당시 일본의 노래를 기록한 대목에서 두 군의 차이가 드러나는데, α군은 당시 한자의 중국음에 기반하여 일본 노래를 전사했고, 다른 한쪽은 한자의 일본음으로 일본 노래를 전사했다. 중국계 인사는 한자의 아음(牙音, [[한국 한자음]] 기준 ㄱ 계열음)과 후음(喉音, 한국 한자음 기준 ㅎ 계열음)의 구별이 명확했기에 일본어의 か(ka)행 소리를 아음 한자로만 옮긴 반면, 일본음을 사용한 부분은 か(ka)행 표기 시 아음 한자와 후음 한자를 섞어서 표기하고 있다. 또한 α군 내에서도 일부 기사[* 특히 [[다이카 개신]]과 [[을사의 변]] 관련 기사]에서 왜습이 다수 발견되어서 이 부분이 후대에 모종의 이유로 [[가필]]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도 있다. 이를테면 [[긴메이 덴노]] 2년 4월 기사에는 "被誑新羅(피광신라)"라는 표현이 있는데, "신라에 속임당하여(=속아)"라는 의미에 맞게 쓰려면 "被新羅誑(피신라광)"으로 써야 옳다. 한반도 관계 기사에서 왜습이 다수 발견된다는 점에서 일본식 천하관에 기반하여 상당한 윤색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일본서기에는 한자를 이용한 당대 일본어 표기법인 [[만요가나]]가 일부 인명, 주석 등에서 발견되기에, [[고사기]], [[만엽집]]과 더불어 만요가나 연구에 있어서 굉장히 귀중한 사료로 인정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