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본육군사관학교 (문단 편집) === 국군 창설 === 해방 직후 일본 육사 대선배인 26기 이응준 대좌의 집에 동기인 유승렬 대좌, 신태영 중좌, 안병범 중좌, 박승훈 소좌, 이대영 소좌, 김준원 대위와 27기인 김석원 대좌, 백홍석 중좌, 장석륜 중교[* 일본군 중위 후 만주군으로 옮겨 중교까지 승진]등이 모여 안방에 앉아 신생 조선인 부대 창설을 위해 논의 하였을 때, 그 아들/사위들인 채병덕 소좌, 김정렬 대위, 유재흥 대위은 옆방에 모여 듣고만 있었다고 한다. 이 아들 사위/아들 세대에서는 가장 선배인 채병덕과 동기인 이종찬만이 소좌이고 나머지 전원 그 이하계급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채병덕이 자신보다 7기수 아래이자 계급도 대위인 이형근이 장인빽으로 대한민국 군번 1번을 받았다고 분노하며 최초의 계파 싸움이 벌어졌다.] 이후 미군정은 '경찰예비대'를 창설 준비를 영어에 능통한 만주군 출신 원용덕에게 요청한다. 그는 일본 육사의 중심인 이응준 등 사설 군사단체의 간부들을 모와 [[1945년]] [[11월 20일]]에 미군정청에서 회의를 열었다. 회의결과 좌익계는 제안에 거부한다며 장내를 빠져나갔고, 자신들만이 국군이 될것이라고 생각한 광복군계도 거부하였다. 결국 만주군관학교 대선배 원용덕과 일본육사 대선배인 이응준 둘이서 면접으로 [[군사영어학교]] 학생을 뽑아 '경찰예비대' 창설을 준비하였고 이는 국군 창설로 이어졌다. 원용덕은 [[군사영어학교]] 부교장으로 창군의 주역들을 교육 시켰고, 이응준은 [[미군정]]의 고문이 되어 국방경비대 창설을 설계하였다. 또한 군사영어학교에는 110명 중 일본 육사 출신이 13명이 들어 갔다.[* 군사영어학교 수료로 쳐준 이응준 포함] 이중에서 이응준은 대령으로 임관, 이형근, 채병덕, 유재흥, 장석륜은 대위로 임관했다. 최초에 국방경비대가 운용될 때 각 연대마다 2명의 미군 고문관이 파견되었다. 만주군 출신은 만주군 시절부터 배속된 일본군 장교의 감독/지휘를 받았기 때문에 미군 고문관과의 관계에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일본 육사 출신들은 미군 고문관을 받아들이지 못해 충돌이 많았다. 미군과 관계가 좋기로 유명한 백선엽이 만주군 출신이고, 그 반대의 경우로 미군들이 노발대발한 김석원이 일본 육사 출신인 것은 이런 연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후 [[1948년]] [[12월 10일]] 이응준과 채병덕은 [[대한민국 국군]] 최초로 5명의 장성 일원이 되고, 이응준은 초대 육군총참모장에 취임한다. 두달 후에는 채병덕과 함께 소장으로 진급한다. 채병덕은 이응준의 후임으로 2대 육군총참모장이 되었다.(당시 34세)) 사단장급으로 보자면 초대 1사단장이 김석원 대령(26기), 2사단장 유승렬 대령(26기), 3사단장 이응준 소장(26기)로 동기들이었으며 6사단장에는 아들인 유재흥 대령(55기), 8사단장엔 사위인 이형근 준장(56기)이 임명되었다. 그리고 [[한국전쟁]]중이던 [[1952년]]에 신태영(26기)이 4대 국방부장관에 임명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