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임진왜란 (문단 편집) ==== 명나라군의 참전과 역할 ==== 아무튼 그 사이 조선의 연이은 요청으로 [[명나라]]도 심각성을 느끼고 대규모의 병력을 보내 참전했다. 참전 초기에는 빠르게 일본군을 밀어내며 금세 일본군을 몰아낼 줄 알았으나 오히려 일본군이 종전 협상을 요청할 때마다 그걸 들어주느라 시간을 끌어서 전쟁이 7년이나 지속되게 된 큰 이유가 되었다. 조선군이야 어떤 방법을 쓰든 당장 일본을 몰아내고 싶었겠지만, [[명나라군]]은 일본이 한반도 전역을 차지하지 못하게만 하면 된다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싸우지 않고 공을 세울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을 것이다. 게다가 외교를 담당한게 [[심유경]]인 게 문제.[* 더구나 명나라의 입장에서도 조선까지의 거리 때문에 식량 운반의 문제도 있고 해서 자기들이 필요할 때마다 강화 협상을 핑계로 시간을 질질 끌었는데 일본의 이해와도 맞아떨어진 셈.] '''[[명나라군]]의 참전은 의의가 없지는 않았지만 [[명나라군]]이 지나치게 폄하당하는것에 대한 반발인지 재평가를 넘어 지나치게 과대평가를 받기도 하는데''' 임진왜란에서 [[명나라군]] 덕분에 이긴 전투는 실질적으로 '''4차 [[평양성 전투]]밖에 없다.''' 심지어 4차 평양성 전투도 제대로 이겼다기엔 애매한 부분이 있는 전투이고 조선군도 1만명이 함께 싸웠기에 승리할 수 있었던 전투이다. [[명나라군]]이 형편없는 군대였다면 전쟁 중 조선에서 [[명나라군]]의 편제와 교리, 무기를 다급하게 받아들일 이유가 없었을 것이라고도 한다. 다만 명나라가 건국 초기 15만 군대로 북원을 쓸어버리고, 20만 군대로 베트남까지 원정가서 베트남 호왕조를 무너뜨릴 정도의 군세를 자랑했지만 유독 왜구들에게는 약한 모습을 보였다. 그래서 명나라 초부터 국토 동남해안을 탈탈 털렀으니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불과 몇십년 전 정규군도 아닌 사실 이 왜구들이 이후 정규군으로 편제되었지만 아무튼 왜구들을 제대로 진압하지 못하고 국토 남부가 유린당하는[* [[https://www.instiz.net/pt/6009168?frompc=1|출처]]] 모습을 보였다. [[명나라군]]이생각보다 약했다고도 볼 수도 있지만 반대로 왜군의 전투력이 생각보다 강했다고도 볼 수 있다. 또 이때 파병된 명군은 (해외파병의 성격상 당연히) 정예군이었고 열심히는 싸웠다.[* 그러나 열심히 싸운 것과는 별개로 [[벽제관 전투]] 때는 처참히 깨졌고 [[울산성 전투]]에서도 패배했고 [[사천성 전투]]에서도 대패하는 등 패전이 많았다.] 제1차 조승훈의 3,000~5,000명은 [[평양성]] 공격에 실패(7월), 제2차 이여송이 이끄는 40,000명이 12월 [[압록강]]을 건너 다음해 정월 [[불랑기포]]라는 신무기로 포격해(육상군 주제에 대포 500문을 퍼붓는 중국의 스케일을 보여주었다) 평양성을 탈환(1593년 1월 27일)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무리하게 남하하다가 고양 벽제관(碧蹄館)에서 매복에 걸려 대패하였고, [[개성시|개성]]으로 퇴각한 뒤 전선은 [[임진강]]을 경계로 교착 상태를 벌인다. 그 뒤 일본군은 [[행주대첩]]에서 패배, 북쪽으로는 [[명나라군]]과 동장군, 남쪽으로는 조선군으로 쌈싸먹힐 위기에 처하였고, 연합군과 교섭을 진행하여 결국 한양을 포기하고 후퇴하였다. (1593년 5월 18일) 다만 한양 수복을 위해 12만 대군을 박박 긁어모은 조선은 벽제관에서 패배하고 그대로 셧다운 상태가 되어버린 [[명나라군]] 5만까지 17만의 보급물자를 대느라 하루하루 말라죽었고, 결국 한타 싸움이 아니라 장기전 압박과 협상으로 한양을 탈환하긴 했지만, 이때는 보급물자도 민생도 파탄나버린 후였다. 이렇게 올인 한타를 벌였다가 심각한 피해를 입은(식량소비량 급증 +식량생산량 급감) 조선은 병력을 축소할 수밖에 없었다. ||[[파일:external/www.kjclub.com/8.jpg|width=100%]]|| || 명나라 [[기병]]대를 묘사한 기록화 || 이여송이 [[평양부]]를 우수한 화력과 기술력, 전략으로 점령했다. 그러나 일본군도 조총으로 명나라군을 엄청나게 사살한 끝에 고니시와 그의 군대는 안전하게 평양에서 빠져나온다. 그렇다고 해도 평양성 탈환으로 조선군의 사기는 고조되었다.[* [[명나라군]]이 [[평양성]] 문을 뚫을 때 사용했다는 병기가 다름아닌 [[네덜란드]]에서 들여온 [[홍이포]]였다. [[명나라군]]의 포격에 대해 실록이나 징비록등의 조선측의 사료에서도 산악이 흔들린다거나 하늘이 무너진다는 등의 표현을 써가며 극찬을 하는 장면이 여러 군데 발견된다.] 당장 고니시가 [[평양부]] 점령 후 선조를 추격하지 않은 것도 고니시군이 공세 종말점에 도달해 여력이 없었던 점도 있지만 [[명나라군]]의 참전에 대한 소문이 심리적으로 영향을 준 것 아니냐는 의견도 존재한다. 만약 고니시군이 지치지 않고 명나라의 조선에 대한 지원이 없었다면 이순신이나 조선군과 의병의 활약도 의미가 없이 전쟁이 거기서 끝장났을지도 모른다.[* 다만 선조가 한양을 버리고 의주까지 도망가 버린 시점에서 일본군의 당초 계획은 이미 어그러졌다. 전쟁이 장기화될 조짐을 보이는 것은 물론, 예상치 못했던 의병과 수군의 활약으로 후방마저 안전치 못한 상황에서 겨울까지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군은 장기전을 염두에 두지 않은 탓에 준비가 덜 되어 있었다.] 더구나 [[원나라]] 시대에 쓴 《[[송사]]》에는 [[한세충]]과 같은 사기적 [[명장]]이 있어도 지도자인 황제가 한심해서 [[금나라]]에게 결과적으로 지고 있었는데, 선조도 명나라로 도주할 생각까지 했던 만큼 그와 비슷한 한심한 작태가 벌어질 가능성이 없지는 않았다. 결론적으로 [[명나라군]]은 전선이 명나라 땅으로 확대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본인들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전란 중 각지에서 명나라군은 조선군과 연합해 활약했다. 비록 많은 추태와 패배를 하기도 했지만 [[명나라군]]의 참전으로 인해 조선군의 사기는 크게 올라갔다. 전쟁 막바지에는 유정과 같이 명 육군이 전투를 회피하는 일이 빈번히 생겨 이순신 장군이 조금 고생하기도 했다. 반면 명 수군을 이끌던 진린은 유정과 달리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같이 싸우긴 했다. 대표적으로 [[노량 해전]]에서는 일본군이 철수하므로 명군은 더이상 싸울 이유가 없었지만 진린은 끝까지 이순신과 협조했고, 자신이 위기에 빠지기도 했다. 비록 조선 수군의 활약으로 승리를 거두기는 했으나 이순신은 물론 자신의 휘하 장수인 등자룡을 잃었다. 더불어 [[명나라군]]이 대규모의 육군을 파병하게 되면서 조선은 그때까지 유지하던 군인들을 고향에 돌려보내며 숫자를 줄이게 된다. 병농 일치제인 조선에게 있어 생산 가능 인구를 군대에 잡아두는건 국가 생산력에도 영향이 미칠 수밖에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란으로 조선 경제가 굉장히 피폐해진 상태여서 군인들을 고향에 돌려보내어 농사짓게 하는일이 급했다. 한때 17만에 육박했던 조선군은 [[명나라군]]의 참전 이후 크게 줄어든다. 따지고 보면 임진왜란 당시의 [[명나라군]]은 후반의 조선 조정의 주요 탱커 역할을 수행한 셈이었고, 정유재란 때는 대규모 파병으로 아예 [[명나라군]]이 주력이 되었다.[* 사실 그 이전부터 숫적으로 몇 만은 족히 되었지만 임진왜란 때는 [[벽제관 전투]]에서 대패한 이후로는 굳이 싸우려고 하지 않았고, 전투 의욕을 보인 시점은 정유재란 초기 때다.] 임진왜란 당시에 조선군은 최대 17만, [[명나라군]]은 약 5만~7만 4천 명이었지만 정유재란 당시에 조선군은 약 3만, [[명나라군]]은 9만~11만 7천 명에 달했다. 조선인에 대한 약탈이 엄청나게 심했던 [[명나라군]]이 아니라 명나라가 조선에 큰 도움을 준 바가 또 있다. 가령, 임진년 이후부터 명나라는 산동 등지에서 군량을 조달하여 현지의 명나라 병사들과 조선인들에게 뿌렸는데, 이 덕에 전쟁과 기근[* 소빙기가 시작하여 거의 경신 대기근에 준하는 기근이었다.]에 따른 조선의 식량 사정이 나아졌다.[* 다만 "선전관 조안방이 보내온 보고서를 보니 ‘경상 한 도에 왜적과 서로 대치하는 각진의 군졸은 6-7천에 불과하고, 그 중에는 한 장수가 거느리고 있는 군졸이 혹 6∼7명인 자도 있으며, 각진에 있는 활도 겨우 1백여 장(張)뿐이었다. 이런 병력과 무기를 가지고 강한 왜적과 싸워 이긴다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더욱이 군량이 결핍된 지 이미 오래되어 하루에 먹는 양이 한 홉의 죽에 불과하니 매우 한심하다. 본도에는 비록 약간의 비축이 있고, 이웃 도에도 또한 이송하여 온 곡식이 있다고는 하나, 중국군을 공급하기 위한 것으로 우리 군사들은 구제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군량이 부족한데 그마저도 보급의 대부분은 명나라 군대에게 집중 되었을 것을 생각하면 정말로 명의 식량조달이 조선의 식량사정에 유의미한 도움을 주었을지는 미지수다.] 비록 [[벽제관 전투]]의 패배로 전선을 고착화시키기도 하고 민폐도 많았지만 [[명나라군]]의 전투력과 지원이 있었기에 조선군이 재정비할 여유를 가질 수 있었고 조선이 거둔 승리가 빛을 발할 수 있었다. 특히 [[정유재란]] 당시에는 [[명나라군|명나라 군]]이 한반도 남부에서 일본군과 전면전을 전개하며 일본군을 압박하였고,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 역시 사실이다. 만약 [[명나라군|명나라 군]]의 이러한 활약이 없었다면 설사 히데요시가 죽었더라도 일본군이 한반도 남부에서 철수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상정할 수 있다.[[https://n.news.naver.com/article/366/0000287767?sid=004|#]] 선조는 이후 [[재조지은]]이라며 [[명나라군]]을 드높이는데 이는 [[명나라군]]의 역할이 큰 영향을 끼치기도 했으나 당시 선조가 조선군의 업적을 깡그리 무시한데는 정치적 입장도 반영되어 있다.[* 전란을 거치며 왕권은 땅에 떨어졌고 민심은 선조가 아니라 전쟁 영웅들로 향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선조는 자국 장수가 아닌 [[명나라군]]을 드높이면서 이러한 [[명나라군]]을 불러온 자신의 업적을 알리고, 자국 장수들의 업적을 폄하하며 스스로의 권위를 세우려했다. 실제로 실록에는 선조가 자국 장수들이 세운 공은 [[명나라군]]을 따라 다니며 얻은 것으로 작은 공밖에 세우지 못했다며 폄하하는 부분이 있다.] 한국의 TV 드라마나 미디어에서는 민족주의 + 근대 이후로 중국을 멸시하게 된 풍조 + 사대주의에 대한 반감 등으로 [[명나라군]]의 활약을 묻어가는 경향이 강한데, 그리고 백성에게 패악질을 한게 잘한건 결코 아니지만, 경략 송응창은 조선에서 명나라 병사들의 대민약탈을 항의했을때 사과했고 군대와 그를 지휘하는 장수들에게 군령삼십조(軍令三十條)를 하달하여 군기를 확립시켜 조선의 백성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도록 특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 '군령 삼십조'에는 조선 백성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말 것을 명하는 조항이 3개가 있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장관과 장졸들은 조선의 지방을 지나며 개와 닭이라 할지라도 놀라지 않도록 하여 조금도 범하지 말 것, 감히 민간의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라도 함부로 범하는 자는 군령에 의거해 목을 벤다.'(제 5조), '조선 부녀자를 함부로 범하는 자는 군령에 의거해 목을 벤다.'(제 6조), '조선의 강산은 곧 황상의 강산이며 조선의 백성들은 황상의 백성이니 함부로 조선의 남녀를 죽이거나, 투항한 자나 부역한 자를 죽이는 자는 군령에 의거해 목을 벤다.'(제 20조)]였다.[* [[명나라군]]도 멀쩡한 조선인을 일본군 앞잡이로 오해하거나 혹은 의도적으로 전공을 부풀리기 위해 살해한 사례는 있으나, 행정 구역 단위로 의도적인 학살을 한 적은 없다. 단, 정유재란 남원성 전투에서는 양원이 성을 버리고 도망가는 바람에 성 안의 사람들이 모두 몰살당하긴했다. 하지만 이 [[남원 전투]]에서 [[명나라군]]은 부총병관 양원 휘하의 병사 50~170명 만이 탈주하여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을 뿐이고, 3,000명 이상의 명나라 군대는 남원성에서 조선 군민들과 함께 남아 끝까지 목숨을 걸고 싸운 끝에 전원 전사했다.] 게다가 [[명나라군]]의 개개인 단위의 횡포와는 별개로, 명나라 조정은 공식적으로 조선에 식량까지 지원해줬다. 또한 [[징비록]]에서는 백성들이 굶어 죽어가자 자기네 군량 50석을 내어줬다는 기록도 있다. 명나라는 피해를 준 부분이 있지만 분명 큰 도움이 된 것도 사실이다. 거기다 일본이 이길 줄 알고 [[순왜|일본군에 붙거나 협력한 조선인]][* 일본 수군의 본질적인 한계와 이순신 덕분에 일본군은 본국에서의 보급과 지원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조선인들을 꽤 많이 징발하는데 성공하여 막강한 방어 능력을 갖춘 요새까지 건설할 정도였다.]들도 의외로 적지는 않았는데 [[명나라군]]이 참전해서 상대적으로 조선에 힘이 더 실려 그런 내부적 불안 요소를 제어할 수 있는 안정감이 생겼다. 일단 명의 황제가 계속 지원을 해준다고 하니 조선 혼자서 일본이란 강적[* 일본 측에서는 조선을 어렵지 않게 정복할 수 있으리란 것이 지배적인 기조였다. 물론 마지막에 물러날 때까지도 상당한 승산이 있는 것으로 몰아가는 측면이 있어 과장이 있었지만, [[명나라군]]과 조선군의 양측 기록에서도 일본군의 강함은 여러모로 묘사되기 때문에 일본만의 근자감은 아니었다.]과 싸울 때보다는 사기도 올랐을 것이다. 하지만 선조가 재조지은을 외친데에는 전란으로 인해 왕권이 땅에 떨어졌다는 점을 유의해야한다. 선조는 전란 극복의 공을 자국의 전쟁 영웅이 아니라 명나라에서 찾았는데 그 이유는 명나라를 높이 세우면서 [[명나라군]]을 요청한 자신의 공을 인정해달라는데 있다. 이후 조선 조정은 청조의 감시까지 피해가면서 [[경복궁]] 뒤뜰에 대보단을 만들어서 새벽에 제사를 지내기도 한다. 명군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이기도 하지만, 이것 역시 [[인조]]가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면서 [[청나라]]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하자 청에 대한 반발 심리 역시 적용된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