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임진왜란 (문단 편집) === 조총 때문에 초반에 무너졌다? === 조선이 전쟁이 터지고 나서야 [[조총]]이란 걸 처음 접했다고 알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당시 신립 등 조선군 지휘관들과 관리들은 조총이라는 게 있다는 사실 자체는 잘 알고 있었다. 당장에 조선과 전쟁을 할 이유가 하등 없는 [[소 요시토시|대마도주]]부터가 히데요시의 침략을 경고하는 뜻으로 조총을 보내기도 했다. 또 조총은 위력은 강력하지만 장전 시간이 길다는 단점이 있었으며 이것도 조선은 알고 있었다. 문제는 병력을 시간차로 투입해서 단점을 극복해낸 [[오다 노부나가]]의 전술이 조선에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 일본군의 경우 조총병을 사격조와 대기조로 나눠 분리하거나 활을 사용하기도 했다. 조선 육군도 조총'만' 없었을 뿐이지 총통과 같은 화포들은 고려말 우왕 때부터 왜구를 상대로 운용해 왔으며[* 다만 그렇다고 중국보다 화포가 더 발달했다고는 보기는 어렵고 다른 방향으로 발전해왔다고 보는게 맞다. [[화차(무기)|화차]]나 [[비격진천뢰]]같은 조선이 독자적으로 발전시킨 화기도 있었고 해전에서는 [[천자총통]]을 유용하게 사용했지만, 명나라군은 조선에는 없던 [[불랑기포]]를 대량으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 물론 조선군도 명군이 불랑기포를 사용하는 것을 보고 전쟁이 끝나고는 대량으로 도입했다.], 장전 방식과 운용면에서 조총에 비해 효율성이 떨어지기는 하지만 [[승자총통]]과 같은 개인 화기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조선군 지휘관들이 조총을 과소평가한 것과 일선의 조선군들이 조총을 접해본 적이 없다는 건 분명 문제였다. 일선 병사들은 조총에 대응하는 훈련을 받지 못했고, 일선지휘관들도 조총에 대한 경험이 없었다.[* 그나마 동래 일대에서는 일본인들과의 교류로 구경 정도는 해봤을 수 있었다.] 조선군 지휘부조차 한성의 최고수뇌부가 조총으로 시험 사격해본 정도가 전부이지 정규군이 집단적으로 운용하는 위력은 임진왜란에서 처음 경험한 것이다. 당시 조총의 유효 사거리 자체는 50m를 넘지 않았다. 따라서 유효사거리가 130~150m 정도인 국궁을 압도할 수준은 아니었지만, 원래 [[머스킷]]으로 무장한 군대의 위력은 단발의 명중률이 아니라 집단으로 쏘는 화망에서 구축된다.[* 그러나 조총 도래 이후 조선측의 교범이나 훈련 기록을 보면 조총의 사거리를 활보다 더 멀게 잡고 있으며 조선군의 조총 운용은 화망 구성보다는 서구의 엽병 마냥 조준사격을 중요시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조선군 수뇌부가 경험한 것은 임진왜란이 처음일 것이다. 반면 조선 각궁의 그 우수한 사거리는 정작 사수들의 저열한 훈련상태로 인해 제대로 발휘될수가 없었을뿐더러[* 활의 훈련에는 수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조총과는 비교가 안 된다] 사거리와 별개로 저지력은 총에 비해 한참 밀렸다. 총의 강력한 장점은 살상력이 압도적으로 우수해 갑옷을 무력화한다는 점이며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조총에 의한 피해를 기록한 사료가 무수히 나온다. 의외로 일본군의 조총 비중은 생각보다 적었다. 임진왜란을 다룬 사극 등의 창작물에서는 아직도 일본군의 절대 다수가 조총으로 무장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실제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조총병의 비중은 최대 20% 수준이었다 임진왜란 와중에 의병으로 활동한 조경남이 쓴 문헌인 난중잡록을 보면, 1592년 5월 8일 한양에 주둔 중인 일본군을 염탐하였더니 조총에 들어가는 총알을 가진 자는 4~5명 중에서 겨우 1명이고 그나마 1명이 가진 총알의 개수도 15~16알에 불과하다고 하였다[[https://cafe.daum.net/historywar/Nwp/3584|#]] 나머지는 전통적인 창과 칼, 그리고 활 등이었다. 다만 이걸보고 적다고 하는것 또한 과소평가다. '''당대 일본의 조총 보급률은 세계 최고'''였다. 당대는 총기의 초기단계라 서양에서도 총병의 수는 적었고, 총기가 본격적으로 서양 전쟁사에서 두각을 드러낸것도 임진왜란이 종전하고도 25여년 후인 1525년 [[파비아 전투]] 부터다. 총알이 15~16발에 불과하다는것도, 애초에 1800년대 서양 전쟁사에서도 십여발 이상 총을 쏘는 경우는 적었기에 부족한 것도 아니었다. 물론 [[매치락]] [[화승총]]은 느린 장전 속도 때문에 이를 보조하는 전술을 잘 활용해야 한다. 예를들어 [[병자호란]] 당시 [[쌍령 전투]]에서 조선군이 병력2천 대부분이 조총병이었음에도 기병이 부족하고 장창병을 제대로 운용하지 않아서 청나라 기병대의 돌격에 패하게 된다. 대기병 전술이 부재하고 대단위 조총병을 처음 운용해 보았기 때문에 나온 실책일 것이다. 하지만 일본은 이지 전국시대에서 조총을 운영해 보았기에 어느정도 경험이 있었고, 그래서 이런 문제도 적었다. 그렇기에 조선에서, 후대가 아닌 당대에도 조총은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순신]]도 조총의 성능에 감탄하여 정철총통을 개발해 찍어댔을 뿐 아니라, 명군조차 앞에서는 화포 앞에 조총 따위 뭔 소용이냐며 까다가도 뒤로는 조선에게 조총 좀 구해달라고 사정했을 정도였다. 이는 '''일본과는 전혀 다른 조선의 전장 환경'''이 큰 영향을 미쳤다. 왜군의 숫적 주력을 차지했던 장창병대는 무지막지한 리치의 대가로 실제 찌르기 성능은 형편없었기 때문에 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넓은 전장에서 보병간의 회전이 벌어져야 했는데, 조선군이 보병을 대규모로 동원해 평원에서 회전을 시도해본 것은 [[용인 전투]]가 사실상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나마 여기서도 일본군은 장창대로 정면대응하기보다는 문소산에서 진지를 구축하고 조총으로 사격하며 농성하는 것으로 대응했고, 이를 조선군 기병이 제대로 파훼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후로 임진왜란의 전투는 조선군이 최대한 회전을 피하는 가운데 주구장창 공·농성전, 고지전, 유격전 위주로 치러졌고,(조명연합군이 공세를 벌일 때도 마찬가지) 야전을 치를 때는 조선군이나 명군이나 기병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는데, 어느 쪽이든 낭창낭창한 일본식 장창이 역할을 맡을만한 자리가 아니었다.[* 2차 [[금산 전투]] 같이 벌판에서 보병이 근접전을 벌인 사례가 없는 건 아니지만 이건 임란 의병전사에서도 보기 드문 삽질에 가깝다.] 조선군이 [[탄금대 전투]]에서 기마대를 다 소진했다고 착각하기 쉽지만, 당장 [[용인 전투]]만 해도 삼도근왕군은 다수의 기병을 보유하고 이를 과신해서 패전의 빌미가 되기도 했을 정도였다. 이후로도 함경도 북병 기병전력은 건재해서 동북전선에서는 해정창 전투나 [[북관 대첩]] 등 조선군 기병이 주력을 맡은 전투도 여럿 있었고, 서북전선도 [[벽제관 전투]]나 [[직산 전투]] 등 명 기병이 중심이 된 굵직굵직한 전투를 치렀다.[[https://m.blog.naver.com/kkumi17cs1013/221300086390|관련 포스팅]] 심지어 조선 의병조차 기병이 적지 않았다. 보병 간 전투 역시 일본과는 달리 '''너죽고 나죽자는''' 진짜배기 공성전과 고지전의 연속이었고,[* 일본에서의 공성전은 어지간하면 성을 포위하고 지원을 끊어 항복을 받아내는 방식이었다. 근본적으로 내전이었고 비즈니스 관계로 여겼기 때문에 정말 캐삭빵급의 대규모 충돌이 아니면 이런 식으로 세력을 흡수하는 것이 서로 이득이었다.] 자연히 원거리 병기의 역할이 높아진 상황에서 화포 전력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고 궁병 역시 능력이 저열한 일본군이 동원할 수 있는 원거리 전력은 조총 뿐이었다. 당장 초전인 [[부산진 전투]]에서부터 철포대가 언덕을 점거해 공격하면서 공세에 활로를 찾을 수 있었다. 물론 조총의 가장 큰 약점인 사격속도와 명중률 때문에 야전의 일본군은 이와 병행해 근접전도 자주 치렀다. 당장 조선도 전쟁도중 항왜들로부터 적극적으로 근접전을 배웠고 이들이 몇십년이 지난 이괄의 난때도 근접전 전문부대로 활약하고 실록같은 조선기록에도 일본의 단병접전을 높이 평가하고 그들이 근접전에 밀려 조선군이 밀렸다는 기록들이 상당하다. 다만 상술했듯이 야전에서는 주로 기마대를 상대했기 때문에 장창보다는 '큰 칼', 즉 [[오오타치]]를 주로 활용했다. 조선 측에서 임진왜란 초기 전역을 가장 자세하게 기록했다고 평가받는 신흠의 상촌집에서는 탄금대 전투 파트에서 조령을 넘어오는 일본군의 '칼빛'이 번쩍였다(劍光閃爍)고 기록했고[[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0286B_0570_010_0040|#]], [[벽제관 전투]]에서도 징비록&선조수정실록의 기록을 보면 왜군이 긴 칼을 휘두르며 돌격해들어왔다(賊奮長刀, 左右突鬪)고 적고 있다.[[http://sillok.history.go.kr/id/knb_12601001_003|#]] 이러한 노다치 운용능력과 효과를 높게 평가한 조선군은 이후 중국식 쌍수도를 도입하여 [[무예도보통지]]에도 포함시킨다.[* 애초에 쌍수도 자체가 왜구의 오오타치에 대응하기 위해 고안된 무기이다.] 조선군도 일본군과의 전투경험을 쌓아가면서부터는 전투의 양상이 바뀌게 된다. 예를 들어서 동래성 전투에서는 병력 3천 - 4천으로 일본군 2만 명에게 반나절 정도밖에 버티지 못했지만, 전투경험이 쌓인 이후로는 1:7의 병력차에도 불구하고 5일간이나 버티면서 수성 성공([[제1차 진주성 전투]]), 조총보다 훨씬 우월한 사거리와 화력을 갖춘 각종 화포와 신기전등 화약무기를 이용한 ([[행주 대첩]]) 등, 우수한 전과를 거두었다. 화차, 현자총통, 비격진천뢰등 조선의 화약무기로 역관광시키는 양상의 전투도 많이 나왔다. 결론적으로 조선군은 오랜 내전으로 전투경험이 쌓인 일본군의 근접전과 조총을 활용한 선진 전쟁기술에 초반에 많은 고전을 했으나, 계속된 전쟁으로 일본군들의 전술에 익숙해지면서부터 대등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총이 전쟁 자체의 향방을 결정지었다고 보기엔 어려우나 유의미한 영향을 줬다고 볼 수 있는 셈. 이와 같이 조선이 전쟁을 치루면서 실제로 상대해 본 뒤에는 조총이 전쟁병기로서 우수한 성능을 지니고 있다는 기록들이 수두룩하다. [[조선왕조실록]] 이외의 각종 기록들에서도 숱하게 찾아볼 수 있다. 일단 활의 경우 활은 물론이고 화살도 까다로운 관리가 필요하다. 화살은 조총탄보다 부피도 크고 습기에 예민하다. 아교로 만들어진 활은 덥고 습하면 녹아내려 활시위가 풀리기 일수이며 목재 특성상 틀어질 수도 있다.[* 이때문에 이성계가 요동 정벌을 반대한 이유 중의 하나가 활이 상할수 있다는 것이었다. 특히 당시 요동 정벌을 추진하던 시기가 여름이었다.] 더욱이 활은 정확히 쏘기 위해서는 자세와 탄도를 바람에 따라 계산해야하고 사수의 활시위를 당기기 위한 근력 등의 많은 숙련도를 요하는 등 조총보다 마냥 우위에 있다고 볼 수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