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임진왜란 (문단 편집) === 후일담 === * 임진왜란중 전사한 다이묘급은 [[명량]]에서 전사한 [[구루시마 미치후사]] 와 [[수원]]에서 매사냥하다가 조선군에게 전사한 [[나카가와 히데마사]] 총 2명으로 그 외에 다이묘급은 아니지만 야규 가문의 후계자 역이자 장남이던 柳生久三郞도 전사. 나머지는 모두 병사했다.(대표적으로 9군 선봉대장 도요토미 히데카츠나 에가미 가문의 당주인 에가미 이에타네등이 병사했고 그밖에 거제도에서 병사한 인물로는 [[시마즈 요시히로]]의 차남인 시마즈 히사야스가 있다 ) 그밖에 죽지 않은 나머지는 모두 돌아가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전했다 (6군 대장으로 참여한 고바야카와 다카카케는 휴전 중 일본으로 귀국 후 병사했다). 물론 다이묘들도 죽을 위기에 처한 다이묘들은 많아서. [[행주대첩]] 당시 일본군 총사령관 [[우키타 히데이에]], 사단장급인 [[이시다 미츠나리]], 참군 [[안코쿠지 에케이]], 연대장급인 깃카와 히로이에 이들 장수들이 모두 [[승자총통]]에 맞고 중상을 입었지만 병사들이 업고 뛴 덕에 다들 목숨은 부지했다. 수군에서는 함대사령관급 인물인 [[도도 다카토라]]가 [[명량 해전]]에서 화살에 맞아 중상을 입었고, 노량해전에서도 시마즈 요시히로의 군대는 다이묘 하나 살리기 위해 거의 50%의 손실을 감수해가며 도주한다. 이렇게 일본 다이묘들은 전투에서 패해 할복하는 경우는 많지만 전투 현장에서 전사하는 경우가 드문 편이다. 그 이유는 위의 시마즈처럼 부하 사무라이들이 자기 목숨을 바쳐가며 필사적으로 영주를 지키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본인이 유독 충성심이 강해서가 아니다. 조선, 명나라 등 군인이 국가의 소속이고 상관이 전사해도 자신의 책임이 크게 없으면 평범하게 직무를 유지하는 관료제 국가와 달리[* 명나라의 뒤를 이은 [[청나라]]의 경우 초기에는 군대가 국가가 아닌 부족의 소속이었다가, 중원 입관을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중국화되면서 관료제를 적극적으로 도입함에 따라 점차 명나라와 비슷하게 군인이 국가의 소속인 경향이 강해졌다.], 봉건제 국가 일본에서는 군인은 국가가 아닌 [[다이묘]]의 소속이고 '''다이묘가 패해서 죽으면 휘하 [[사무라이]]들은 보통 [[로닌]]이 되어 알거지로 떠돌며 비참하게 생활하다 죽게 되기 때문'''인데, 조선에 파견된 일본 고위 무장 중에 전사자가 거의 없는 것도 이러한 일본의 사회 체제에 기인한 것으로 실제 노량 해전의 경우처럼 일본군은 병사들은 다 죽더라도 다이묘 한 명은 살리려고 기를 쓰고 노력했다. * 조선의 전 국토가 전쟁터가 되다시피 했지만 유일하게 [[제주도]]만은 전화를 피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 이전에는 왜구가 출몰해서 노략질을 하는 등의 피해가 있었지만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제주도를 공격 점령했다면 고립된 제주도는 일본에게 장기간 점거당했을 수 있었을 것이나 소규모 왜구들의 준동과 대규모 정규군의 상륙전은 엄연히 달라서 일본군은 제주도에 대한 공격을 전혀 시도하지 않았다. 다만 이건 일본의 사정이고, 조선에서는 일본군이 제주도를 침공할 수 있다며 이에 대한 대책을 강구한 적이 있었다. 당시 제주 목사 [[이경록]][* [[이순신]]과 녹둔도에서 근무했던 동료로, 이순신이 백의종군하게 된 계기인 녹둔도 전투에도 함께 참여했고 백의종군 또한 함께 했다.]이 병력을 선발해서 본토에 지원할 것을 건의했지만, 조정에서는 제주도의 방위가 매우 우려스럽다며 이를 거부하기도 했다. 대신 제주도에서 가축과 식량 등의 물자 지원을 하였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도 제주도에서 소나 돼지 등을 보내주었다는 기록이 몇 차례 나온다. * 언어 면에서는 반치음이 이쯤에서 소멸되며, 사람들이 하루에 얼마나 쓰는지도 모를 만큼 많이 쓰는 주격 조사 '가'도 이 시기 즈음에 생겨났다[* 본래는 주격 조사로 '이'와 그 이형태인 'ㅣ' 및 'Ø(영형태)'가 쓰였으나, 이 중 '이'만 체언에 받침이 있을 때 쓰게 되었고 체언에 받침이 없을 때 쓴 'ㅣ'와 'Ø'의 역할을 '가'가 대신하게 되었다.]. [[아래아]]의 음가가 많이 불안정해진 것도 이때쯤이며, 일본이 건드리지 않은 [[제주도]]에서는 아래아의 음가가 (중세 한국어와는 다를지언정) 변별적 자질로서 살아남았다. 그 외에도 많은 것들이 있으나 적자면 헤아릴 수가 없으니 각설하고, [[고등학교]] 과정 국어와 한국사를 공부하면 관련 내용을 알 수 있다. * 국어학계에서는 정철 어머니의 서간문에서 '가'를 발견하고, 이것이 후대의 주격 조사 '가'의 전신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여기에서의 '가'는 동사 '가다'의 어간인 '가-'와 명확한 구분이 되지 않기 때문에 회의론자들도 존재한다. 일부 책에서 인선 왕후가 보낸 서간문에도 주격 조사 '가'가 발견되었고 1550년대의 일이라고 말하지만 역사상 '''인선 왕후는 효종의 비'''이고 최소 1650년대의 일이다. 위에서 말하는 인선 왕후는 '''인종의 비인 인성 왕후''''와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 주격조사 '가'가 나타났다는 구절을 보면 조금 재미있는 것이 정철의 어머니의 서간문에는 '찬 구들에서 자니, 배'''가''' 세니러서(꼿꼿이 일어나서, 여기에서는 폭풍같은 설사가 일어나서) 자주 (화장실에) 다니니'라는 구절이고 인선 왕후 어필에서는 '두드러기'''가''' 불의예 도다 오르니'라는 구절로 모두 영 좋지 않은 상황에서 쓰였다는 것. * 임진왜란 당시 [[고니시 유키나가]]는 자신이 점령한 조선 지역에서 양반 출신으로 추측되는 여자 아이를 주워다 자신의 [[양녀]]로 삼고 키웠는데 그녀가 [[오타 쥬리아|줄리아 오타아]](ジュリア おたあ)이다. 그녀는 고니시 유키나가로부터 영향을 받아 [[천주교]]를 믿고, 줄리아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세키가하라 전투]]가 끝나면서 고니시 유키나가가 참수당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 아이를 데려다 키웠다. 그녀는 자라면서 굉장한 미인으로 성장했는데, 때문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무척이나 아끼고 좋아했다. 하지만 당시 천주교를 탄압하고 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줄리아 오타아에게 천주교를 그만 믿을 것을 권유하지만 줄리아 오타아는 이를 거부하고 끝까지 천주교에 대한 신앙을 지켰다. 결국 어쩔 수 없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줄리아 오타아를 유배보냈는데 줄리아 오타아는 유배지에서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 마찬가지로 [[우키타 히데이에]]는 자신이 점령한 조선 지역에서 양반 출신으로 추측되는 사람을 전사시키고 그 아들을 일본으로 데려갔다. 그가 자라서 어른이 된 후 마에다 가문의 가신이 되었는데 [[와키타 나오카타]](김여철)이다. 와키타 나오카타는 상당히 유능해서 마에다 가문에 없어서는 안 될 정도로 중요한 인물이었다. * [[흑인]] 용병들이 조선군에 고용되어 참전하기도 했다. 명과 교역하던 포르투갈의 해군에서 용병으로 일하던 흑인 노예들을 참전시킨 것. 임무는 잠수 후 일본 군함에 구멍을 내서 침몰시키는 것이었다고 하며 이들은 [[해귀]](海鬼)라 불리는 해군 잠수병으로 복무했다.이들을 그린 그림이 남아 있고 실록에도 기록이 있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실록 선조 31년 5월 26일. 여기에는 '''파랑국(波浪國)''' 사람이라고 기록되었다.] 사실 이들이 전투 중에 딱히 남긴 큰 업적은 없었지만, 이들을 만나본 선조 임금이 술까지 주었다는 말이 있는걸 보아 매우 특이한 존재로 인식하긴 한 모양. 연회 한자리를 주고 음식과 술을 제공해 주었고 잘 먹고 잘 돌아갔다고 하며, 당시 기록을 보면 머리는 곱슬거리고 피부는 칠흑같으며 푸른 눈을 띄고 기골이 장대하였다고 한다. * [[포르투갈]]에서 일본으로 전해졌던 고추와 담배가 임진왜란 때 국내에 들어왔다.[* 일본인들은 Tobacco를 담박괴’(淡泊塊)라 음차표기 했는데, 이게 한국에서 담바귀로, 그러다 담배로 정착되었다. 고추는 일본군이 생화학 무기처럼 사용하기도 했고 담배는 동래 인근에 많이 심었다.] 지금의 배추절이 김치, 통칭 [[묵은지]] 역시 임진왜란 이후부터 먹기 시작했는데 그 전의 조선의 김치는 [[동치미]]같은 백김치, 짠지에 가까웠다.[* 그런데 여기서도 다른 주장이 제기된 바 있다. 상기한 주장이 사실이라면 고추가 16세기 ~ 17세기부터에나 수입되었고, 그 짧은 기간동안 고추장은 물론이고 지역별로 가지각색인 지역 고유의 김치들이 불과 2세기, 3세기만에 생겨나 정착했다는 말이 된다는 소리인데 이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이다. 다만 조선 시대 당시 기록에 고추를 일본(왜)에서 들어왔다고 왜초(성호사설), 왜자개(지봉유설) 등으로 부르는 것이 남아있고, 궁중 요리에서는 고종 재위기인 20세기 초까지도 고추를 잘 쓰지 않았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결정적으로 고추는 [[아메리카]] 대륙 원산인 작물이니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도달한 1492년 이전에는 구대륙에 존재할 수조차 없다!] * [[요코야마 미츠테루]]의 만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선 [[http://shibah.egloos.com/598332|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노망이 나는 시점으로 표현한다]] / 본작이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많이 띄워주는 편이라 임진왜란을 보고 이에야스가 "저 인간이 미친거 아닌가?"하고 히데요시를 까는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다테 마사무네는 히데요시를 "조선이 순순히 길을 내줄 거라 믿은 멍청한 노인네"로 표현한 내용이 나온다. 실재로 일본에서도 도요토미는 영민했던 젊은 시절과 달리 만인지상에 앉은 말년에는 권력에 도취해 노망이 난 용두사미의 대명사격인 인물로 봤다. 개화사상가였던 [[후쿠자와 유키치]]는 도요토미에 대해 풍신 공은 진 땅을 피해 마른 땅에 오른 인물이나, 다만 진 땅에서 마른 땅으로 갔을 뿐 아무 것도 바꾼 것이 없다고 혹평하기도 했다. 즉, 본인의 패업과 영달을 위해 모험적인 인생을 살았을지는 모르지만, 만민의 복락을 책임지는 천하인으로서는 명백히 실격을 했다는 뜻이다. 도요토미는 일본의 시황제같다는 말도 이것과 상통한다. * 유튜브에 미국인인 Matthew Carrick은 이 8개월간의 한, 중, 일의 자료 조사를 토대로 9편의 다큐멘터리를 만든 것이 있다. 영어로 되어 있으나 상당히 자세하고 양질의 자료를 정리해두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t5490lgtpbc|1화]] 전투신은 [[불멸의 이순신]], [[징비록(드라마)|징비록]], [[임진왜란 1592]] 등에서 따왔는데 일부는 제작자가 별도의 편집(효과음 및 배경음악 추가, 컷신 조정 등)을 가했다. 그 외에도 제작자가 보충을 위해 직접 단 댓글을 보면 상당히 디테일하게 자료를 조사했다는 흔적이 역력하다. 권율이 46세까지 벼슬살이를 하지 않았다거나 [[행주 대첩]] 때 일본군이 축차적으로 병력을 투입했으나 격퇴된 상황도 자세히 정리하고 있다. 조선이 명나라에게 원군을 청하자 명나라가 [[https://youtu.be/6TEil03GrFs?t=638|'혹시 조선이 명나라를 속이고 일본과 함께 명나라를 공격하려 드는게 아닌가?']]라고 의심하는 대목에서는 한국사에서 역대 중국 왕조와 벌인 전쟁들의 목록([[왕검성 전투]], [[고구려-수 전쟁]], [[고구려-당 전쟁]], [[나당전쟁]], [[고려-거란 전쟁]] 등)을 열거하며 '역사상의 경험으로 인해 명나라는 조선이 그토록 빨리 무너진 것을 믿을 수 없었다'라고 상세하게 설명하기까지 한다. 이 때 배경으로 나오는 삽화는 [[안시성 전투]]를 묘사한 기록화이다. 또한 이순신은 거의 주인공처럼 묘사되며 이순신에 대한 해외 네티즌들의 찬사는 덤. 국명을 '명'(Ming), '조선'(Joseon)이 아닌 '중국'(China), '한국'(Korea)으로 통일하였는데, 유럽에서는 이것이 일반적인 명칭이라 혼동을 주지 않기 위해 저리 표기한 것일 수도 있다. * 호남은 한국전쟁의 낙동강방어선 역할을 하며 조선군이 임진왜란에 승리하는데 일조했다. 비록 정유재란시기 남원성전투에서 지며 잠시 점령된적이 있지만 이치와 웅치전투 그리고 먼치킨장수인 이순신 권율등이 호남의 육군과 수군을 이끈덕에 일본군은 조선의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신나게 공격했지만 먼치킨들의 활약덕에 패하고 우회해 진주성을 공격하며 진출을 시도했지만 진주성은 철벽방어선 역할을 하며 실패했다. 그 예가 바로 경상우수영 좌수영은 일본군에게 불타 소실되었지만 전라좌수영 우수영은 아직도 남아있다는 것이다. *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침략을 위해 출병을 명령한 공문서가 처음 발견되었다고 아사히 신문이 2019년 3월 28일에 보도했다.[[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hm&sid1=104&sid2=231&oid=003&aid=0009139377|#]] * 한양이 함락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 육군의 보급선이 두절되었을 당시 한양에 첩자를 투입하여 일본군의 상황을 조사한 적이 있었는데, 조사 결과 일본군의 한끼 식사량이 약 2홉(약 120cc)밖에 되지 않는다는 충격적인 보고가 있었다. 자료에 따르면 당시 조선 성인 남성 기준으로 한 끼 식사량이 7홉(420cc) 정도 되었는데, 이 때문에 '왜놈들은 대체 밥을 먹는거냐, 마는거냐?'하는 말이 오갔고, 심지어 '이건 궁지에 빠진 상태에서 왜장이 몸소 부하들에게 본을 보이려는 것이다'라는 말까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반전이 있었는데, 이 당시에는 보급선이 끊어졌을 뿐이지 아직 육군의 식량이 거덜난 상황은 아니었다. 즉, '''[[한민족의 식사량|하루에 한 되도 안되는 한 끼 식사량이 일본군 본인들에게는 지극히 정상적인 식사량이었던 것.]]''' * 하마터면 더 큰 국제전으로 확대될 뻔한 순간이 있었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개념을 밥말아먹었는지 [[태국]](아유타야 왕국)과 [[류큐 왕국]](오키나와)에게 "너네 나라도 정복할꺼임." 이라는 어그로성의 국서를 보내는 바람에 빡친 태국과 류큐 왕국이 임진왜란이 터지자 명나라에 자국 군대의 조선 파병을 제안했던 순간이 있었던 것이다. 사정이 좋지 않던 명나라도 태국군과 류큐군을 명나라 군대의 휘하에 편제해 넣어 싸우면 이득일 것이라는 생각에 고민을 해봤지만, 더 큰 전쟁으로 번지기 싫어하던 조선 정부의 요청[* 이런 걸 보면 [[선조(조선)|선조]]가 마냥 [[암군]]은 아니고 상황 파악 능력이 뛰어난 걸 알 수 있다.]으로 명나라는 마음만 받겠다는 답서를 보내며 두 국가의 군대 파병을 거절했다.[* 다만, 류큐는 국력의 한계로 과연 충분한 군대를 보낼 수 있을지 회의적인 걸 제쳐두더라도 태국의 경우는 16세기 말부터 17세기 초까지 이웃국가이자 강대국인 버마의 대규모 침략을 여러차례 받아 수도 인근에서 왕이 직접 친정하여 대규모 회전을 벌였을 정도의 상황이었다. 때문의 전근대 시절 운송, 보급의 한계로나 당시 국난이었던 자국 형편에 대해 회의적인 지적이 부흥에 올라왔었다.] 이때 기록을 보면 아유타야 왕국쪽에서는 일본놈들이 조선출병으로 나라가 빈 상태이니 동쪽 해안으로 병력을 투사하겠다 라고 했고 류큐왕국은 바로 북진할 수 있다고 서신을 보냈다고 한다. 이 외에도 만주의 지금 기준으로 말하자면 대규모 군벌쯤 되는 여진계[* [[천명제|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를 말한다. [[후금]]을 세우기 전에도 이미 그 지역의 실력자였고 사실상의 지배자였다.]들도 명나라측에 참전 요청을 했으나 어디 오랑캐들이 숟가락을 얹으려 드느냐는 명나라에 의해 싸그리 무시당했다고 한다. 만약 이 모든 계획이 승낙되었다면 전 아시아로 확전될 수도 있었던 일이다.[* 이 내용이 제대로 확인되지 않고 인터넷 상에서 떠돌다가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나라가 명나라 포함 10개국이라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나라 이름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경우도 있는데, 명나라, [[포르투갈|파랑국]]에 위에 언급된 [[아유타야]](태국), [[류큐]], [[여진]]에다가 [[몽골]], [[천축]](인도), [[베트남|월남]], [[캄보디아|참파]], [[미얀마|버마]] 등을 포함했다.] * 이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조선 왕실의 자손, 특히 아들이 매우 귀해지기 시작한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직전 즉위한 선조만 해도 적자는 전후 태어난 영창대군 뿐이긴 하지만 대신 서자만 14명을 두면서 다산했다. 그런데 임진왜란 이후 출생해서 즉위한 효종부터는 적자인 현종 1명만 태어나고, 이후에는 적통은 고사하고 서자도 제대로 남지 않는 상황이 되면서 왕위 계승이 어려워지기 시작한다. * 유래없는 국난이라서 전후 야담들을 보면 전쟁 발발 직전 일종의 갖은 징조는(태조의 건원릉에서 울음소리가 났다 류의) 물론 디스토피아적인 분위기가 사회 각지에 형성되었다. 대표적으로 이산해의 아들 이경전, 정언신의 아들 정협, 허난설헌의 남편 김성립 등 명문 양반가 자제들이 술을 먹고 무리를 지어 등등곡(登登曲)이라는 노래를 부르고 무당의 춤을 따라하는 등 퇴폐적인 기행을 벌이다가 폐인이 되거나 가산을 탕진하기도 했다. 또한 남사고, 금선자 등 도인들은 물론, 당대의 명사들인 조식, 서경덕, 이지함 등이 임진왜란을 예견하고 대비할 것을 주변에 강구했다는 설화도 많은데 이들이 실제로는 유학자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왜란 후 정계에서 배제된 서경덕과 조식 학파에서 자신들을 돋보이기 위해 일부러 퍼트린 소문으로 추정된다.[* 금선자 이언휴는 산에 묻혀 도를 닦는 사람이였는데 전국 방방곡곡과 일본 일부를 돌아다니며 조선을 침공하기 위해 사전에 침투한 일본의 스파이들의 존재를 자세히 설명하기도 했고 훗날 요동을 둘러보며 명나라의 쇠망과 만주족의 발흥을 예견했다고도 한다. 이미 상술했듯이 당시 조선 정부에서 곧 전쟁이 날 것이라는 암묵적인 동의와 소소한 준비가 있었기에 어떤 초인적인 능력이나 도술을 부려 미래를 예견했다기보다는 금선자 개인이 이런 분위기에 맞춰 주변 정세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실제로 탐방을 하며 일종의 정보분석을 한 것으로 보인다. ] * 먼 훗날 일본 제국은 미국에게 [[진주만 공습]]을 통해 어그로를 끌면서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고, 대외적으로는 우린 3천년간 외세와의 전쟁에서 패전하지 않았다는 구라를 쳐 아돌프 히틀러도 이 말을 듣고 낚여 의기양양했다.[* 영국의 수상이던 [[윈스턴 처칠]]도 이 말에 낚이기는 했지만 도리어 '3천년간 무패였어? 그럼 이번엔 깨질 때가 됐네.'라는 반응을 보이며 오히려 자신감을 보였다. 진주만 공습 덕분에 참전에 회의적이던 미국을 동맹국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임진왜란을 비롯해 신라 성덕왕 시절 일본과의 전쟁에서 일본의 침입을 격퇴한 기록, 백제와 왜가 나당연합군에게 패한 [[백강 전투]] 등 이미 일본이 명백히 패전하고 물러난 사례가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미합중국 해군 원수이던 [[체스터 니미츠]]도 임진왜란에서 맹활약한 [[이순신]]을 거론하면서 이미 일본은 임진왜란 때 패배했음을 상기시켜준다. [[https://www.nytimes.com/1944/10/10/archives/nimitz-startles-reporters-with-communique-of-victory-off-korea-adds.html|#]] * 조선 시대 제주도 태생 선비인 장한철(張漢喆 1744~?)이 1771년에 쓴 기행문인 표해록(漂海錄)에서는 임진왜란을 두고 "[[왜노]](倭奴)는 하늘 아래 같이 살 수 없는 원수이다. 선릉(조선의 9번째 임금인 성종의 무덤)과 정릉(조선의 11번째 임금인 중종의 무덤)이 (일본군한테) 도굴을 당한 일(을 떠올리면) 간이 소리를 치고 피가 끓으며 운다. 사람들이 천 번으로 칼로 왜노를 찌를 만하다. 하늘이 내린 생물은 모두 사람에게 이롭지만, 오직 왜노란 종자는 사람한테 터럭만한 이로움도 주지 못하고 그 해로움이 호랑이나 뱀보다 더 심하다. 하늘이 어찌하여 왜노란 종자를 만들었는가."라고 기록했다. 여기서 언급된 [[왜노]]는 일본인을 난쟁이 노비라고 폄하하는 멸칭인데, 임진왜란 이후 극에 달한 조선의 반일감정을 볼 수 있는 자료다[[https://cafe.daum.net/historywar/2LjP/2069|#]]. * 임진왜란이 터지자 처음에는 선조를 따라 피난길에 동참했던 사관들인 조존세, 박정현, 임취정, 김선여 등이 1592년 6월 1일 밤 선조가 압록강을 건너 요동행을 결정하자 사초책을 모조리 불태워 버리고 도망가 버렸다. 그리하여 정묘년(1567년 선조 즉위년)부터 신묘년(1591년 임진왜란 직전)까지 25년 동안의 역사기록이 죄다 알 수가 없게 되고 말았다. 이 사관들의 도주에 대해 [[기자헌]]은 "사초책을 불태운 것이 아니라 그냥 버리고 갔을 뿐이다."라고 변명했으나 선조 임금은 "길가에 버려진 사초를 주워 아무개 조신(朝臣 벼슬하는 신하)에게 주었다는 사람의 이야기도 있다. 불태웠는지, 버리고 도망갔는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오십보백보 아니냐. 그렇게 변론할 필요없다."라고 화를 냈다. 그로 인해 1609년(광해군 1년), 춘추관이 [[선조실록]]을 편찬해야 하는데 평시의 사초책이 전혀 없으니 역사 기록을 만들 수가 없다고 상소를 올렸다. 고심 끝에 조정에서는 "그동안 사대부들이 작성한 일기 같은 개인 기록이나 각 지방의 관아에 보관된 문서들을 전부 조정에 갖다 바쳐라."고 명령을 내렸고, 그렇게 해서 모은 기록들을 바탕으로 간신히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을 편찬할 수 있었다[[http://v.media.daum.net/v/20130730115311455|#]]. 하지만 그렇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은 분량이 적고 그 정확성도 떨어지기 때문에 임진왜란을 연구하려면 [[난중일기]], [[징비록]], [[난중잡록]], [[임진일기]], [[난적휘찬]] 같이 임진왜란을 직접 보고 경험한 사람들이 작성한 기록들도 함께 보아야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