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잉글랜드 (문단 편집) == 역사 == [include(틀:영국과 아일랜드의 역사)] [[게르만족]]의 일파인 [[앵글로색슨족]]이 원주민이었던 [[켈트]]계 브리튼족들을 침략해 [[칠왕국]]을 세운 것이 잉글랜드의 시작이다. 그 전의 [[그레이트브리튼 섬]] 중남부에 있었던 브리타니아는 [[로만 브리튼]]으로 로마 제국의 지배[* C.E. 43~410]하에 있었고 친 로마파 [[켈트]]계 원주민인 브리튼족들이 살고 있었다. [include(틀:5세기 중반 브리튼 제도의 민족 분포)] 5세기에 제국 밖의 게르만계 부족들이 [[서로마 제국]]을 침략하자 [[로마군]]은 유럽 대륙 방어를 위해 브리타니아에서 철수해 버렸고 방위력의 공백을 틈탄 북방의 [[픽트족]]과 스코트족의 준동은 브리튼 족들에게 심대한 위협이 되었다. 특히 지금의 스코틀랜드인 칼레도니아의 스코트 족은 같은 켈트계지만 [[로마 제국]]에 끝까지 강경하게 반항했다. [[서유럽]] 전역에 걸쳐서 켈트계 부족들과 공존 관계를 구축한 로마인들도 이들은 도저히 상종하지 못할 야만족으로 간주했다. 브리튼 족은 픽트 족과 스코트 족의 침입을 막으려고 바다 저편에 사는 [[독일]], [[덴마크]] 일대의 [[게르만족]]들을 용병으로 썼지만 [[브리타니아]]의 브리튼 족들에게는 로마와는 달리 용병 집단을 통제할 수 있는 규모의 군단 방위력이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이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downloads.bbc.co.uk/anglo-saxon_map.jpg|width=100%]]}}}|| || {{{#fff 앵글로색슨족의 브리튼 이주}}} || [[윌란 반도]]에서 앵글족에 뒤이어 이제는 색슨족[* [[작센]]족이라고도 한다. 이들의 고향이 [[독일]] 작센 지방이기 때문이다.]이 대거 바다를 건너 브리타니아를 침략해 들어왔다. 이 과정에서 브리튼족들의 영역은 서부의 산악 지대로 축소되어 현대의 [[웨일스]]가 되었다. 그리고 동부에 남아있던 브리튼족들은 [[앵글로색슨]]족들과 혼혈이 되어 이후 잉글랜드의 기본 주민이 되었다. 잉글랜드는 그렇게 [[앵글로색슨]]족이 지배하게 되었으나, [[게르만족]] 특유의 사회 체제[* 기본적으로 부족 단위로 생활하고 하위 부족이 상위 부족에 종속된다.] 때문에 여러 대립 왕국들이 난립한 데다 본격적으로 바다를 건너 쳐들어오기 시작한 [[바이킹]]들의 침략으로 인해 오랫동안 분열된 상태였다. 그러다 10세기 즈음 [[애설스탠]] 왕 무렵에 [[잉글랜드 왕국]]이 세워져 처음 통일이 되었고 [[에드거 1세]]에 이르러서도 통일이 유지되었다가 [[덴마크]]로부터 쳐들어온 [[바이킹]]들에게 국가 전체가 정복되었다. 그러다 다시 독립을 하는가 싶더니 왕위 계승 문제로 혼란 상태에 놓여 있던 왕국을 [[노르망디]]의 [[공작(작위)|공작]]이었던 [[정복자 윌리엄]]이 1066년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해럴드 2세]]를 물리치고 정복한다. [[정복자 윌리엄]]은 대륙의 봉건제를 잉글랜드에 도입하였으나 많은 부분에서 앵글로색슨의 관습에 따라 잉글랜드를 통치했다. 13세기에는 [[존 왕]]이 귀족들의 요구에 굴복해 [[대헌장]]을 선포하게 된다. 이 문서는 귀족들의 권리를 확인시키기 위한 문서였지만 그동안 공식적인 헌법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중요성이 있다. 잉글랜드 군주들은 웨일즈, 아일랜드, 스코틀랜드에 수차례 원정을 감행해 상당한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장미전쟁]]으로 요크가와 랭커스터가 싸워서 튜더 왕조[* 양쪽의 혈통을 다 받았다.]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13세기에 선포된 [[마그나 카르타]] 때문에 잉글랜드 왕들은 종종 자신이 하는 행위의 정당성을 얻기 위해 의회를 소집해야 했다. [[장미전쟁]]을 제외하고는 대내 투쟁이 15세기에 이르기까지 줄어들었기 때문에 봉건적 봉사 의무도 세금으로 대체되었고 [[백년전쟁]] 시기 잉글랜드 '군대'도 용병이 상당량을 차지했다. 다만 백년전쟁 당시 잉글랜드 군대의 핵심은 여전히 두텁게 무장을 차려입은 기사진과 농민병 궁병대였고 용병은 다른 지역에서도 비슷한 비율로 고용했다. 소작농 중의 일부는 '요먼'이라는 자영농 소지주가 되었다. 기사들은 싸울 일이 없자 토지를 매입하고 '[[젠트리]]'라는 계층을 형성했다. '젠트리'는 작위 없는 귀족에 가까웠지만 후대에는 세습 귀족과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잉글랜드의 주요 산업은 농업을 제외하면 양털 생산이었다. [[백년전쟁]]은 단순히 왕위 계승 전쟁이 아니라 양털 무역 판로를 확보하기 위해 [[플랑드르]] 지방을 두고 벌어진 전쟁이기도 했다. 물론 왕위 계승 전쟁이 바로 땅 얻으려고 하는 짓거리이기는 했다만. 젠트리는 양털이 매우 효과적인 이익 창출 수단이었기 때문에 전통적인 개방 농작지를 전부 목장으로 만들어 요먼 계층을 몰락시켰고 토지의 집약화를 이루었는데 이것을 인클로저(종획) 운동이라고 한다. 실제로는 광범위하게 이루어지지는 않았고 잉글랜드 중부에 한정된 것이었지만 농민들의 생활은 피해를 입었다. 현재와 같이 연합 왕국(United Kingdom)이라는 체제가 탄생한 것은 18세기의 일이다. 18세기 초에 동군 연합 상태에 놓여있던 스코틀랜드 왕국과 연합법을 통해 한 왕국으로 합치면서 [[그레이트브리튼 왕국]](Kingdom of Great Britain)과 [[아일랜드 왕국]](Kingdom of Ireland)이 함께 있는 체제를 만들었고 19세기 초에 다시 한번 합침으로서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Ireland)이 공식적으로 만들어졌다. 이후 연합 왕국의 일원이었던 [[아일랜드 섬]] 남부가 [[대영제국]]의 [[자치령]](dominion)인 [[아일랜드 자유국]]이 되어 영국 본국에서 떨어져 나가면서 현재 영국의 공식 명칭은 그레이트브리튼과 북아일랜드 연합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이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