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보고 (문단 편집) === 유년기와 당 장교 시절 === 본명은 이두로 궁복(弓福) 또는 궁파(弓巴)로 표기되었는데 한국 고유어식으로 읽으면 ‘활보’ 가 된다. 여기에서 보는 몇몇 명사 뒤에 붙어 ‘그것을 특성으로 지닌 사람’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로 현대어에도 남아 있어서 꾀보, 먹보, 잠보 등의 어휘가 있다. 예시다. 기록에서 기골이 장대하였으며 활과 창을 잘 다루는 무인 기질을 나타냈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장보고가 [[활]]을 잘 다루었던 것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삼국사기]]》에서 출신을 알 수 없다고 한 것으로 보아 [[가문]]은 [[5두품]] 이하로 한미했던 것으로 보이며 [[골품]]은 수도인 [[경주시|경주]]의 사람들만 대상으로 하므로 골품의 질서 안에 있었는지도 의문이다. 출신지가 명확하지는 않지만 장보고의 [[친구]] [[정연(통일신라)|정연]]이 50리를 단번에 헤엄칠 수 있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보아 바다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다른 곳이 아닌 본인이 청해진을 설치한 완도 인근 출신일 가능성이 높은데 완도라는 지역 자체를 잘 알고 있었기에 [[고향]]인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했다는 개연성이 크며 당나라에서 굶주림에 허덕이던 [[정연(통일신라)|정연]]이 '죽어도 고향에서 죽는 게 낫다'고 하면서 청해진에 있던 장보고를 찾아왔다는 기록,[* 물론 여기서 정연이 말한 '고향'은 완도 청해진이라는 세부지명이라기보다는 신라라는 나라 자체를 지칭한 표현일 가능성도 있다. 고향에서 죽는 게 낫다고 말할 때 대화한 상대가 당에 사는 풍원규였다.] [[문성왕]]이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려 할 때 [[대신]]들이 장보고가 해도(海島)인([[육지]]가 아닌 [[섬]] 사람)임을 지적했던 점을 미루어봤을 때도 그렇다. 이설도 있는데 장보고가 [[기병]]이었기 때문에 당시 서남해안 지역 섬에 [[목장]]을 운영하던 신라 귀족의 생활과 연관시켜 [[목동]] 출신으로 보인다고 전쟁사 교양 서적을 여럿 낸 서영교는 단정하듯이 썼는데 통일신라에서 지금의 [[전남]], [[경남]]에 이르는 남해안 여러 섬에 목장을 다수 운영한 것은 맞지만[* [[입당구법순례행기]]나 [[삼국사기]]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섬 출신이라는 이유로 목동 출신일 거라고 확신할 수 있을만큼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한편 전라북도 [[부안군]] [[http://shindonga.donga.com/3/all/13/107365/1|변산반도]]가 장보고의 고향이라는 주장도 있다. 청해진이 있었던 지금의 [[완도군]] 장도는 장군도(將軍島) 또는 조음도라고도 불렸는데 장좌교 서북쪽 100m의 장좌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면 왼쪽의 동백나무숲 언덕에 6기의 [[무덤]]이 있고 목없는 [[시신]]이 묻힌 1기가 장보고의 것이고 나머지는 장보고의 양친과 선대의 것이라는 전승이 있으며 장보고는 반농반어로 먹고 살던 그의 아버지를 따라 장도 바깥쪽 바다에서 고기잡이, 노젓기, 수영을 배우고 활과 창으로 [[무술]]을 연마하였다는 민간 [[전설]]도 전하고 있다. >신라인 장보고와 정년이라는 자는 자기 나라에서 서주(徐州)로 와서 군중소장(軍中小將)이 되었다. 장보고의 나이는 서른 살이고 정년의 나이는 열 살이 젊어, 장보고를 형이라고 불렀다. 모두 싸움을 잘하였고, 말을 타고 창을 휘두르는데 나라와 서주에서 능히 대적할 사람이 없었다. 정년은 또 바다 밑으로 들어가 50리를 걸어가면서 물을 내뿜지 아니하였다. 그 용맹과 씩씩함을 비교하면 장보고가 정년에게 미치지 못하였으나 장보고는 연령으로, 정년은 기예(技藝)로서 항상 맞서 서로 지지 않았다. >---- >'''《번천문집》[* 당의 시인인 [[두목]]이 쓴 책. 장보고에 대한 당대의 기록으로 《[[삼국사기]]》 편찬자들이 신라본기에서의 장보고 기록은 신라 측 기록을 인용한 것과 달리, 장보고 열전은 번천문집의 기술을 옮겨놓았다. 그래서 열전의 내용을 보면 '본기와는 다르다.'고 언급된 부분이 등장한다.] 권6, 장보고⋅정년전''' 일찍 동료이자 의형제인 정연과 함께 당나라로 건너가 그곳의 군에 입대했다고 한다.[* 자신의 [[스승]]으로부터 당나라로 가서 벼슬을 하면 크게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갔다는 이야기는 2002년 서울무비에서 나온 [[애니메이션]] <청해진 호랑이>의 줄거리에서 나온 이야기이다. 사실 신라의 [[골품제|살인적인 신분 제도]]를 생각하면 골품도 없는 그가 [[출세]]할 길은 당나라에라도 가서 군인이 되는 길 밖에는 방법이 전무했다.] 당시 당나라에는 [[신라방]]이라는 일종의 [[코리아타운]]이 만들어져 있었고 당나라는 번장이라 해서 이민족 출신을 무장으로 쓰기도 하는 등 이민족의 등용에 대해 꽤 개방적인 [[국가]]였다.[* [[절도사]] 가운데 이민족 출신으로 출세한 사람이 많다. 대표적으로 [[고선지]], 부몽영찰, [[이정기]], [[복고회은]], [[가서한]], [[안녹산]]. 특히 안녹산은 본래 이란계 [[민족]]들 중 하나인 [[소그드인]] 출신이다. 본명이 알렉산더인 [[유럽]]계 사람이었다는 설도 있지만 분명하지 않고 진짜 본명은 [[인도인|북인도인]]이나 [[이란인]]에게서 흔한 이름인 '로우샨'의 [[소그드어]]식인 '로흐샨'이다.] 당나라에서 친구 정연과 함께 당나라 [[군대]]에 들어간 장보고는 말 타고 창 쓰는데에 탁월한 실력을 보였으며 곧 [[서주]] 무령군(武寧軍)의 소장(少將)[* 일종의 [[장교]]. 하서절도사 휘하의 [[관직]]으로 1천에서 5천 정도의 군사를 거느리는 직책이었다. 현재의 군 체계에 비유하자면 연대에서 여단급 [[병력]]을 지휘한 셈이다.]으로 출세하기까지 한다. 무령군은 산동반도에 할거하며 당에 맞섰던 [[고구려]] 유민 출신 절도사 [[이사도]][* [[이정기]]의 손자로 당시 그의 세력은 [[허난 성]]과 [[허베이 성]]을 연결하는 [[산둥성]] 지역을 장악해 강력한 지방 [[군벌]]로 성장한 상태였다.]를 정벌하려고 만들어진 부대였는데 장보고는 무령군 소장 신분으로 평로치청번진 진압에 참전했다고 전한다. 모종의 일로 당군 시절을 그만두고 신라로 돌아왔는데 장보고가 귀국을 선택한 이유로 몇 가지 추측이 있다. 장보고가 당에서 [[귀국]]해 [[흥덕왕]]을 만나 '신라인이 당에서 [[해적]]들에게 잡혀 [[노비]]로 매매되고 있었다.'고 문제를 제기했고 장보고가 설치한 청해진(淸海鎭)의 이름[* '바다를 깨끗하게 청소한다'는 의미.]을 감안하면 '같은 신라인들이 노비로 팔려가는데 차마 혼자 호의호식할 수 없어서'가 1차적인 이유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장보고를 다루고 있는 대부분의 [[위인전]]이 이 설을 채택했다.] 함께 당에 갔던 친구 정연은 당에 남았는데 훗날 정연이 당의 군축 조치로 실직해 끼니조차 잇기 어려울 정도로 몰락한 후에도 장보고에게 의지하기를 망설였다는 기록을 보면 장보고가 무관을 그만둔 일이 정연과 관련이 있다고 추측할 수도 있지만 정확한 사정은 알 수 없다.[* [[해신(드라마)|해신]]에서는 장보고가 때려잡은 옛 고구려 유민 출신 군벌 이사도가 자기는 '조상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는 것이 목적이었는데 당군에서 일하는 장보고 너 때문에 실패했다.'고 말하자 충격을 받아 결국 당나라 장수 일을 때려치는 계기가 된다. 원작이 된 최인호의 동명 [[소설]]에서는 이정기나 고구려 유민들에 대한 언급은 별로 나오지 않는다. 신라인으로서 고구려 유민과 싸운다는 설정 때문에 해신 방영 당시에는 [[드라마]]가 의도적으로 고구려 죽이기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나오기도 했다.] 이 시기 장보고에 대한 기록이 부족해 자세한 행적은 알기 힘드나 엔닌의 기록을 볼 때 신라방 신라인 사회를 이용해 [[상업]]에 뛰어들어 국제 [[무역]]업에 종사했고 당나라에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것으로 보인다. 당시 중국 해안 지역은 이사도와 같은 번진들의 발호로 당나라 조정에서 통제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라인들까지 잡아다 노비로 팔아먹는 해적이 들끓고 있었다. 기록대로 단순히 이들이 '[[동족]]인 신라인을 노비로 팔아넘기는 것을 볼 수 없어서'라는 도의적인 이유가 아니어도 장보고로서는 해적 때문에 바다를 통해 오가던 해상 교역까지 위협을 받게 되면 장사에도 차질이 생긴다는 [[상인]]으로서의 실제적인 [[계산]] 때문이기도 했다. 이후에 장보고는 귀국했는데 805년 전후에 당나라로 넘어가 828년에 귀국했으니 20~30년만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