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보고 (문단 편집) === 장보고의 난과 비극적인 최후 === >서울에서 사자(使者)가 이르렀는데, 대신(大臣)이 [[희강왕|그 왕]]을 시해(弑害)하고 나라가 어지러우며 왕이 없다 하였다. 장보고는 드디어 군사 5천을 나누어 정년에게 주며, 정년을 잡고 울며 말하기를 “그대가 아니면 환란을 평정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정년은 [[서라벌|국도(國都)]]에 들어가 [[민애왕|반란자]]를 베고, [[신무왕|왕]]을 세우고 보답하였다. 왕은 드디어 장보고를 불러 재상으로 삼고 정년으로 장보고를 대신케 하였다. >---- >'''《번천문집》 권6, 장보고⋅정년전''' ---- >4월 20일 >이른 아침에 신라인이 작은 배를 타고 왔다. 문득 듣건대 '''“장보고(張寶高)가 [[신무왕|신라 왕자]]와 합심하여 신라국을 징벌하고 곧 그 왕자를 신라국의 왕자로 삼았다." 하였다.''' 남풍이 다소 세차게 불고 역류하는 조수의 물결이 거셌기 때문에 한 곳에 가만히 머물 수가 없었다. 동서로 왔다 갔다 하여 요동이 매우 심했다. >---- >'''《입당구법순례행기》''' 개성사년(839년) 이렇게 청해진이라는 신라 중앙과는 유리된 특수한 환경에서 막대한 수익을 올리고 해적을 소탕하면서 경험이 쌓인 정예병력들과 막대한 재력을 다시 군사력에 투자하며 힘을 기르던 장보고는 신라 조정에까지 엄청난 영향력을 끼치기에 이르며, 더이상 중앙조정에서도 무시가 힘든 독립 군벌이 된 상황이었다. 결국 838년 2월 중앙 정계의 왕위 다툼에서 패한 후 청해진으로 도망쳐 온 [[신무왕|김우징]]을 도와주기로 약속하고 군사를 일으키기까지 한다. 삼국사기 및 신당서에는 바로 이 즈음에 정년이 당에서 귀국해서 장보고를 찾아온 것을 장보고가 맞이하여 잔치를 열고 있는 중에 서라벌에서 반란[* 김명이 희강왕을 주살하고 자신이 왕으로 즉위한 것을 가리킨다.]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고, 장보고는 '네가 아니면 이 반란을 진압할 사람이 없다.'며 정년에게 5천 군사를 맡겨[* 청해진을 창설할 때 군사가 1만 명이었다고 했으니 거의 '''자기 병력의 절반'''을 내준 것이나 다름없다.] 반란을 진압하게 했다고 한다. 3월에 지금의 [[남원시]]인 남원경까지 쳐들어갔다가 잠시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지만 이후 5개월이 지난 838년 12월에 다시 출격해 달벌([[대구광역시]])에서 이찬 김흔, 대흔, 대아찬 윤린, 억훈 등이 지휘하는 신라 정부군 10만을 상대로 한 [[달벌대전]]에서도 대승을 거둬 병력의 절반 이상을 괴멸시키는 기염을 토했고, 이 소식을 듣고 별궁으로 도망친 [[민애왕]]을 추격해 시해하고는 우징을 왕으로 옹립하였다. 그렇게 옹립된 [[신무왕]] 김우징이 1년도 못돼 승하하면서 그의 아들인 [[문성왕]]이 왕위에 올랐다. 이 기간 동안에 장보고는 감의군사(感義軍使)의 직책과 식읍 2,000호를 하사받고, 진해 장군에 임명되는 등 신라 조정으로부터 나름의 포상을 받기는 했지만,[* 이런 청해진대사, 감의군사, 진해장군 같은 직책들은 장보고 이전 신라에는 없었던 관직이다. 낮은 신분 출신 장보고에게 [[골품제]]의 규정을 초월하는 포상을 내린 것으로 추측하는 견해도 있다. 참고로 삼국사절요에서는 삼국사에 의하면 장보고를 상신 즉 상대등에 임명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신무왕 초기에는 상대등 혹은 그에 가까운 직위를 장보고에게 내렸는데 이후 다른 명예직으로 돌리면서 골품제에 따른 논공행상을 다시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장보고의 딸|자신의 딸]]을 왕의 아내로 들이겠다'''고 했던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않았다. 이미 신무왕이 임금이 되기 전 자신을 도와주면 장보고 본인의 딸과 혼인하겠다는, 다시 말해 사돈이 되겠다는 것을 사전에 약속했었다는 이야기가 [[삼국유사]]에 버젓이 실려 있다. 이는 신무왕으로서는 장보고와 사돈관계가 되어 연결을 단단히 함으로써 장보고라는 거대 세력의 힘을 앞세워 왕권을 높일수 있었고 장보고 또한 왕가 일원이 되고 왕가를 우군으로 삼아 청해진을 중심으로 친청해진 정책을 요구할 수 있었기에 윈-윈 약속이었다. 그러나 장보고의 기대와는 무색하게 그 신무왕이 약속을 지키기 전에 금방 승하하여 그가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되자 그 후임인 [[문성왕]]에게 앞서 신무왕과 했던 약속을 이행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8년(서기 846년) 봄, 청해(淸海)의 궁복이 그의 딸을 왕비로 받아주지 않은 것을 원망하여 청해진에 근거지를 두고 반란을 일으켰다. 조정에서는 그를 토벌한다면 생각하지도 못한 후환이 있을 것이 염려스럽고, 그를 그대로 두자니 그 죄를 용서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 근심하였다. >---- >'''《삼국사기》 제11권 신라 본기 제11 문성왕''' ---- >이 무렵 궁파는 청해진(淸海鎭)에 있으면서 군진을 지키고 있었는데, 왕이 약속을 어긴 것을 원망하여 반란을 모의하려 하였다. 이때 장군 염장(閻長)이 이 말을 듣고 아뢰기를, “궁파가 장차 충성스럽지 않은 일을 하려 하니 소신이 청하건대 그를 없애겠습니다”라고 하니, 왕이 기뻐하여 이를 허락하였다. >---- >'''《삼국유사》 기이 신무대왕(神武大王) 염장(閻長) 궁파(弓巴)''' 원래 문성왕도 아버지의 약속을 이어 장보고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결혼을 하려 했지만 귀족들의 반발[* 첫째 왕비로 들이겠다는 것도 아니고 둘째 왕비로 들이겠다고 하는데도 반대했다.]로 단념하고 말았다. 이후의 상황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미묘하게 다른데, 삼국사기상으로는 이 소식을 들은 장보고가 반란을 일으켰고, 삼국유사상으로는 원망하여 반란을 모의하려고 했다고 한다. 즉 삼국유사의 장보고는 반란을 실제로 행동으로 옮기진 않은 것으로 보인다. 장보고가 세력을 일으키기 전에 신라 조정은 [[염장(통일신라)|염장]]을 장보고에 보냈고, 염장은 장보고에게 가서 '제가 왕에게 원망이 있는데 당신에게 의지해 살려고 도망쳐 왔다.'고 전하게 했다. 장보고는 처음에는 '너희들 때문에 내 딸이 왕비가 못 됐는데 이제 와서 무슨 염치로 나를 찾아와?' 하며 받지 않으려 했지만 염장은 '그건 백관들이 간언한 거지 저하고는 아무 상관 없거든요?'라며 기어이 청해진에 들어가 장보고를 대면할 수 있었다. 장보고는 평소 [[협객]]을 아꼈던 탓에 염장을 협객이라며 반겼지만, 그날 염장을 환영하기 위해서 열었던 연회에서 장보고가 잔뜩 술에 취한 사이 염장이 '''장보고의 칼을 빼앗아''' 취해 있던 그의 목을 베어 암살해버렸다고 한다.[* 이와 유사한 경위로 최후를 맞은 인물로는 훗날 [[고려]]의 [[무신정권]]을 열어젖힌 [[이의방]]이 있다.] 이렇게 장보고는 너무나도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다. 장보고의 최후와 당시의 정황에 대해서는 일본 측 기록인 《속일본후기》 제11권 [[닌묘 덴노]](仁明天皇) 조에서도 어느 정도 전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장보고 사후 그의 부장이었던 [[이창진(신라)|이창진]] 등이 반란을 일으키려 하자 염장이 군사를 일으켜 토벌했다고 적혀 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와 살짝 다른 부분인데[* 물 건너가 소식으로 전해진 기록이란 점에서 신빙성이 정사보다 낮을 수도 있지만, 반면 《속일본후기》는 장보고가 죽고 불과 몇십 년도 지나지 않은 9세기에 편찬된 기록인 만큼 먼 훗날 고려시대에 편찬된 《삼국사기》, 《삼국유사》보다 더 정확할 수도 있다.], 상황을 보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된 장보고 암살 사건 직후의 상황을 묘사한 것일 수도 있고, 살짝 와전된 것일 수도 있어 보인다. 그리고 장보고가 죽은 후 장보고 휘하의 세력은 염장이 대신 차지하려 한 듯 보인다. 속일본후기의 해당 기록에서도 장보고의 부하가 일본에 가지고 간 물건들을 다시 찾아가려고 하는 상황을 다룬 기사다. 장보고의 사망 시기에 대해 《삼국사기》에 기술된 기록과 일본 측이 작성한 기록이 다르다는 사실 때문에 장보고의 사망 시점에 관해서도 계속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신라]] 측 기록을 참고해 적었을 《삼국사기》에는 846년(문성왕 8년)에 암살당한 것으로 나와 있지만 《속일본후기(續日本後紀)》에는 841년 11월에 사망한 것으로 적혀 있어 삼국사기에서 나온 시기보다 5년 앞서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대해 당사국인 신라의 기록을 참고했을 삼국사기의 정확도가 높다고 볼 여지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장보고 관련 기록 중 하나인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 845년 7월 9일, 엔닌은 중국에서 청해진 병마사 직위에 있던 최훈과 만났는데 이 때 최훈이 중국으로 건너온 이유와 관련해 "신라의 국난을 피해서."라고 언급하는 대목이 나온다. 직접 최훈과 만나서 그에게 직접 듣고 이를 적었을 테니 청해진 병마사가 나라에서 뛰쳐 나올 정도로 신라 내에서 큰 변란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는데 청해진 병마사가 도주할 정도의 사안이라면 사실상 청해진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중앙 관군에 의해 진압된 것 밖에는 생각할 게 없는데 이를 근거로 841년에 청해진에서 반란이 터졌고 이 때 장보고가 암살된 것이 아니냐는 추측도 있다.]에 속일본후기의 기록과 아귀가 어느 정도 맞아 들어가는 부분이 있고 일본 측의 기록이라 해도 '''당대에 지어진 것'''이어서 신뢰도가 높다고 볼 여지도 있다는 점이 학자들의 머리를 아프게 만들고 있다.[* 실제로 예전 그것도 고구려의 케이스이긴 하지만 [[안장왕]]의 암살과 [[안원왕]] 이후 벌어진 고구려 왕실의 혼란상이 《일본서기》에 전해오는데 학계에선 안원왕 이후 고구려의 왕권이 떨어지고 혼란이 가중되는 듯한 정황 탓에 이를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