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전쟁 (문단 편집) === 전후 피해 === >"전쟁터에서 나는 더 나은 사람이 됐소...... 확실히! 내가 전쟁터에서 훨씬 괜찮은 인간이 된 건 사실이오. 그런 고초를 겪었는데 당연하지 않겠소? 수많은 고통을 봤고, 나 자신도 많은 고통을 겪었소. 그곳에선 살아가는 데 중요하지 않은 것들은 금방 제거돼버리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거든. 그곳에서 그걸 깨닫게 됐소......" > >"하지만 전쟁도 우리에게 앙갚음을 했소. 우린 그 사실을 인정하기를 두려워하지만...... 전쟁이 우리를 쫓아와 나란히 가고 있소...... 우리 딸내미들 중에는 불행하게 사는 아이들이 많소. 그건 전쟁터에 나서 싸운 엄마[* 당시 소련은 상황이 급하다 보니까 여성들까지 전투원으로 일선에 배치돼 직접 독일군과 싸우는 상황이었다. [[류드밀라 파블리첸코]]와 [[리디아 리트뱌크]]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 인터뷰의 인터뷰이(남자)는 본인은 물론 부인도 참전용사였고, 군대에서, 전선에서 만나 결혼한 부부였다.]들이 자기들이 살았던 전장의 방식으로 딸들을 키웠기 때문이오. 아빠들도 마찬가지고. 전선의 윤리로 말이오. 전쟁터에서 사람은, 당신한테 이미 말했듯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가치를 지닌 사람인지 단박에 드러났소. 그곳에선 감출 필요가 없었거든. 우리 딸들은 세상엔 다른 방식의 삶도 있다는 것을 상상도 못했소. 전쟁을 겪은 부모들이 딸들에게 이 세상에 감춰진 추악한 이면은 알려주지 않았으니까......" > ---- >사울 겐리호비치, [[레닌그라드 공방전]] 당시 [[소련군]] 보병 중사.[*출처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박은정 역, 문학동네(2015), p.198~199.] 사실 전쟁 그 자체로 인한 피해는 크지 않을 때도 많다. 상대가 제정신을 가지고 있으면 복구를 할 수도 없을 정도의 피해를 입히려고 하지는 않는다. 민족 또는 국민 말살 같은 건 생각보다 경제력과 인력, 기회비용이 많이 소모가 된다. 특히 [[민족주의]]의 발흥 이후 집단의 조직 능력과 저항력이 크게 향상되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인프라 역시 복구가 불가능할 정도의 피해를 입히는 것보다 그걸 이용하는 편이 훨씬 이익이다. 실제로 2차 세계대전 때도 [[바르샤바]]나 [[도쿄]] 같은 극단적인 예를 제외하면 의외로 많은 도시들이 멀쩡한 편이었다. 인명 피해 역시 현대에는 상대를 다 죽이려고 전쟁을 내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에 보통 그렇게 심각한 편은 아니다. 보통 징집된 성인 남성 세대가 전멸한다 해도 20대나 30대 남성에 한정되기에 그 이전 세대와 다음 세대를 이용하는 걸로 대체가 충분히 가능하고, 여차하면 여성 노동력을 재건에 투입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독소전쟁과 같이 극단적인 경우라면 이야기가 다르지만 이건 나치의 공식적이고 계획적인 민간인 학살정책이 크고, 다른 나라는 그 정도 상황에 이른 사례가 없다. 전쟁을 일으킨 그 독일조차도 그 정도 피해는 입지 않았고, 민간인 인명 손실도 실상을 보면 해외 거주 독일계가 많지, 본토 피해는 공습으로 인한 사망자를 제외하면 얼마 안 된다. 이건 독일 본토로 진입한 소련군이 너무 전쟁을 빨리 끝낸 게 크다. 또한 독일에 대한 도덕적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민간인에 대한 보복을 가능한 한 막았다. 민족을 말살하고 도시들을 다 초토화시키는 일들은 과거에나 일어나는 편이었는데, 활동 범위가 좁아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국가들이 근본적으로 적기 때문에 국력을 굉장히 낭비해도 다른 세력들을 요즘처럼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고대 제국들 혹은 역청야전술까지 쓸 수 있는 과거 유목민들이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들도 도시에서 대량학살을 한 경우는 흔하지 않고, 주로 농촌의 경작지를 초토화시키며 도시 인구도 말려죽이는 형태였다.[* 허나 [[코소보 내전]]과 같이 현대에 벌어진 전쟁에서도 민족적 갈등이 개입된 경우, 대량 학살이 자행된 경우가 있기에 없다고는 볼 수 없다. [[시리아 내전]]에서도 민간인과 반정부군이 섞여있어 정부군의 폭격에 민간인이 휘말려 희생되는 사례가 많이 발생했다. 물론 군인에 비해 사망하는 비율은 민간이 더 적지만 삶의 터전에서 전쟁에 휘말려 죽는 비극은 현대에도 언제든지 벌어질 수 있다.] 전쟁 피해를 복구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자국이 전쟁터가 되었다 해도 평균 수년 가량이다. 예컨대 한국전쟁으로 인한 피해는 전후 복구가 휴전 전부터 이미 후방 지역에서는 시작됐고, 휴전과 동시에 서울을 비롯한 전방지역도 복구에 착수하여 아무리 늦게 잡아도 1955년 즈음에는 전쟁 전 수준으로 복구가 완료되었다. 간혹 1970년 즈음에야 복구됐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 또한 전쟁 시기 성년이었던 세대가 자리를 잡고 경제성장에 전념하면서 극단적인 반공 분위기가 가라앉기 시작했기 때문일 뿐, 물질적 피해와는 별 관련이 없다. 그래도 전쟁이 문제가 되는 건 심리적인 충격과 더불어 앞서나가는 다른 국가들에 비해 뒤쳐지는 것 자체로 인한 국민들의 빈곤 의식 때문이다. 다른 나라들이 앞서 나가면서 상대적으로 경쟁력이 떨어짐에 따라 국민들의 상대적인 생활 수준은 떨어지기 마련이고, 또한 전쟁을 치른 결과 형성된 심리적 충격은 이후 그 사회를 한 세대 이상 트라우마에 빠뜨리는 결과를 낳는다. 또한 정신적으로 국민들이 패전했다면 패전에 대한 원인을 찾거나, 승전했어도 보상 받은 게 희생에 비해서 적다고 느끼면 사회에 대한 분노가 커지며 집단적 [[극단주의]]가 판치기 쉬운 정치적 환경이 마련된다. 반공주의가 팽배하던 1950~1980년대의 [[대한민국]]을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낙후된 경제와 혼란한 정치에 대한 불만으로 [[공산주의]]와 [[파시즘]]이 전세계를 휩쓸었으며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홍역을 다시 한 번 치러야 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로도 각국의 독립운동가들 중 온건 노선을 추구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매카시즘이나 공산주의를 등에 업은 극단주의 독립운동가들도 더러 있었다. 이렇게 전쟁이 당사자들의 인간성을 말살하고, 사회를 폐쇄적이고 편집증적인 불안감에 몰아 넣고 일상적인 도덕관이 마비시키면 극단주의가 퍼지기 쉬운 환경이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