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조(조선) (문단 편집) == 평가 == >[[군주]]로서 사명감이 투철했던 정조는 진정한 위민 정치를 구현하겠다는 높은 이상도 가지고 있었다. 제2의 [[세종(조선)|세종]]이라 할 만큼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군왕. 그래서 그의 짧은 생애가[* 물론 상대적인 것으로, 정조의 집권 기간은 절대치로 보면 짧지 않다. 16권 본문에서도 정조의 즉위 당시 나이와 재임기간을 두고 '뜻을 펴기에 부족하지 않은 세월이었다'고 언급한다.] 더욱 안타깝지만, 과연 그가 더 오래 살았다면 [[조선]]의 운명이 달라졌을까? 그는 진정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끈 개혁 군주였나?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16권 中''' >정조의 통치 행태는 권모와 술수였다. 연전에 발굴된 [[영의정]] [[심환지]]와의 [[정조 어찰첩|비밀 편지]] 속에서 그의 [[마키아벨리]]적 면모가 잘 드러났다. 정조가 죽자 '[[세도정치|세도 정치]]'가 시작되었다. 세도기의 경직된 반동 정치는 [[조선]]을 일제의 [[일제강점기|식민지 처지]]로 몰아갔다. 그래서 우리는 [[영조]]·정조 대의 짧은 황금기를[* 물론 상대적인 것으로, 영정조 집권기는 다 합치면 무려 76년이나 되긴 한다.] 내내 안타까워한다. 그러나 짧은 막간은 정조의 통치 스타일 때문이었다. 혼자 고민하고, 혼자 결정하고, 혼자 지시하는 '헤드십', 이른바 카리스마 콤플렉스가 잉태한 추락이었다.[* 정조를 성인으로 존경했던 [[정약용]]도 정조의 정책에는 매우 비판적이었다. 참고로 정약용은 "[[경세유표]]"에서 [[규장각]], 초계문신, [[장용영]]의 존재 이유를 모두 부정했다.] >---- >'''영산대학교 배병삼 교수''' 왕 - 의정부(대신) - 삼사(대간)로 대표되는 [[조선]]의 전통적인 통치 구조는 [[태조(조선)|태조]] 그리고 [[정도전]]이 기반을 다지고 이어 [[세종(조선)|세종]]과 [[문종(조선)|문종]]이 열심히 가꾸고[* 세종이 말년에 세자인 문종에게 [[대리청정]]을 맡겼기 때문에 세종 말년에 치적들은 사실 [[문종(조선)|문종]]의 치적이다. 그리고 [[세조(조선)|세조]]도 경국대전의 편찬을 시작하는 등의 나름대로 치적을 쌓았지만, 선대왕들이 공들여서 만든 제도와 [[정책]]들을 함부로 훼손하고 근시안적이고 편협하게 정책을 만들었으며, 정난에 참가한 자기 측근들에게만 권력을 몰아주고 자신을 비판하는 신료들을 척살하는 병적인 독선으로 후대에 굉장한 악영향을 끼쳤다는 한계점이 있다.] 완성한 체제였다. 이러한 왕 - 의정부 - 삼사로 대표되는 삼각 상호 견제 체제는 [[연산군]]의 폭정과 [[중종(조선)|중종]]의 빈번한 대[[옥사#s-8]]로 인해 금이 가기 시작했다. [[선조(조선)|선조]] 이후로는 무수한 [[사화]]의 숙청이 일어났으며, [[선조(조선)|선조]], [[효종(조선)|효종]], [[현종(조선)|현종]] 시절 때나 작동한 시기였지, [[숙종(조선)|숙종]] 이후 본격화된 [[환국(조선)|환국]] 정치에서 알 수 있듯 이후의 대부분은 [[동인(조선)|동인]], [[서인]], [[북인]], [[남인]], [[노론]], [[소론]], 시파, 벽파 할 것 없이 왕의 전제왕권 강화를 위해 숙청의 대상이 되면서 조정에 피바람이 난무했고, 이는 오히려 조선의 합리적인 통치 체계를 망가뜨리는 행위가 되었다. 그래서 [[영조]]는 이러한 피를 부르는 숙청보다 온건책인 [[탕평책]]을 실시해 각 대간들 간의 강경파인 준노와 준소를 배제하고 온건파인 완노와 완소를 키워서 조정에 대한 견제력을 약화시키고 전제왕권을 강화했다. 하지만 영조는 재위 중후반부에 그 자신의 심각한 권력욕으로 이러한 쌍거호대와 탕평의 도를 무시하고, 자신을 지지하는 척신들을 등용해 조정의 당파를 억업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한 부작용으로 [[풍산 홍씨]]로 대표되는 척신 세력의 발호와 전횡이 이어졌다. 이러한 경험을 한 정조는 집권 초반에 영조 시기의 강력한 [[외척]] 세력인 [[풍산 홍씨]]와 즉위를 위해 도왔던 [[경주 김씨]] 세력을 몰아내서 외척과 관련이 없는 [[신하]]들을 등용시켜 강력한 척신 세력을 막으려고 했다. 그러나 인척중심 등용과 측근 [[홍국영]]에게 권력을 너무 몰아주어 훗날 [[세도정치]]의 문제점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홍국영이 특정인들만 요직에 앉히고 인사권을 휘둘러 전횡하기 시작한 것이다.[* 정조가 측근에게 지나치게 [[권력]]을 몰아주어 폐단을 유발한 점은 여러모로 본인의 13대조인 세조가 [[공신]]들을 지나치게 키워주어 [[훈구파]]를 양성한 것과 닮았다.] 이에 정조는 [[홍국영]] 세력을 밀어내고 준론 탕평을 펼쳤으며, 이는 국왕 - 신료 간의 삼각 상호 견제 체제를 통해 돌아가는 [[조선]]의 전통적인 통치 구조를 회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정조가 추구한 준론[[탕평책|탕평]]은 옳고 그름을 임금이 가른다는 구조적 한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사망]] 이후 [[순조]]의 즉위와 함께 [[정순왕후(조선 영조)|정순왕후 김씨]]의 [[수렴청정]]이 시작되었고 극단적인 전제왕권은 왕실 외척 가문에 의해 [[세도정치|악용되게 이른다.]] 왕권을 견제할 신권을 탕평으로 약화시켜 그 권한을 잡은 이들을 견제할 세력은 없었다. 분명한 정조의 실책이고, 이로 인해 조선은 결정적인 타격을 입어 붕괴했다고 볼 수 있다. [* 하지만 정조 입장에서 할 말은 있는 것이, 당시 조정 내 당파들은 숙종과 영조의 잘못된 정책들과 권력욕으로 인해 당파들이 스스로의 의리를 잃고 '''만인의, 만인에 대한, 만인에 의한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나마 준론 탕평을 하려면 왕이 직접 막후에서 신료들을 통제를 하는 수밖에 없는 형국이었다. 하지만 조선의 당파는 숙종과 영조 연간기의 환국과 정치 투쟁들을 거치며, 의리를 잃은 채로 극단화되고 교조화되어 왕의 막후 통제마저 듣지 않았다는 게 문제다.] 정조의 정치의 특징으로 바로 '''준론 [[탕평]]'''이라는 것이 있다.[* 할아버지 영조의 완론 탕평과는 상당히 대비된다. 영조는 각 당파의 온건파들인 완론을 중용하고, 탕평책을 마땅찮아 하던 강경파인 준론은 노론, 소론 할 것 없이 대거 쫓아냈고, 그마저도 재위 중후반기에는 탕평을 기치로 당파를 억압하고 척신만을 기용해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데 골몰하였는데, 정조는 이러한 완론 탕평이 명분을 저버리고, 의리를 상실케 하며, 영합주의로 가는 등 문제가 있자 준론 세력을 다시 조정에 들여 준론 탕평을 시험한다.] 준론 탕평의 명목은 척신 세력의 발호를 막고 당파의 [[의리]]를 중요하게 하고 각 당파끼리 당파색이 강한 인물을 등용시켜 다른 당파의 독주를 방지한다는 명분이다. 하지만 준론 탕평은 오늘날 많은 비판이 존재하는데 정조가 완성시킨 극단적인 전제왕권을 견제할 주체가 전무하게 되었다.[* 사실 견제수단이 아예 전무하지는 않았다. 근데 재위 말년에 급격히 악화되는 건강 때문에 조급증에 걸려 견제 수단들을 무력화하고 [[김조순]]과 같은 척신을 중용하는 자책골을 넣어서 문제였을 뿐.] 그래서 결국에는 조선을 [[멸망]]으로 몰고 가버린 [[세도정치]]의 바탕을 만든 인물이 바로 정조라는 점이다. 정조가 [[김조순]]을 세자의 [[장인어른|장인]]으로 삼으면서 세도 정치, 더 나아가 조선 몰락의 씨앗을 뿌렸다는 평가가 다분하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듯 숙종과 영조가 만들어놓은 개막장 정국과 상황으로 인해 정조가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게 최선이었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물론 그 뒷수습을 제대로 해놓지 않았다는 것은 비판받아 마땅한 일이지만.] 조선의 유일한 언론기관인 삼사를 무력화 시킨 상태에서 세자 순조는 자신의 치세에 문제가 있음을 인식조차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주변이 모두 태평성대를 말하는 와중에 순조 혼자 개혁을 논하라는 것은 너무나도 이율배반 적이다. [[세도정치]]는 임금을 등에 업은 외척 세력이 견제장치가 없는 무소불위의 전제왕권을 행사할 때 얼마나 악용될 수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선례라 할 수 있다. [[순조]] 대에 [[세도정치]]의 막을 연 [[김조순]]은 정조 말 정조의 지원를 가득 받은 탓에 아들인 [[김좌근]] 대에 이르러서는 모두가 흔히 아는 [[막장]]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보아도 [[세도정치]]는 견제장치가 전무한 극단적인 전제군주제의 폐단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정조가 [[세도정치]]의 본격적인 폐단을 만든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에게 그러한 힘을 실어주는 역할을 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한 정조의 죽음이 세간에서 떠드는 독살이나 예상치 못 한 사고사, 감염사 같은 것도 아닌 이상 건강관리 못한 것은 그냥 본인의 책임일 뿐이다. 본인이 술담배와 같은 건강에 안 좋은 요소를 최대한 멀리하며 몸관리를 했어야 했고, 다름아닌 자신의 할아버지 [[영조]]라는 아주 좋은 선례도 있었는데 제 스스로 수명을 계속 깎아먹었으니. 정조의 전체적인 정치 방식 또한 [[논란]]이 될 수 있는데 표면적으로 '''[[탕평책|탕평]]'''이라는 이름 아래 정조 자신의 의중으로 옳고 그름을 갈랐을 뿐이고 다수결의 합의제 및 표결 같은 개념이 아니었다. 쉽게 말하자면 다당으로 상호 견제를 하는 삼사 정치에서 왕실 척신정치를 열었다고 보는 것이 적합하다. 정조의 정치가 전제[[왕권]]과 왕의 능력에만 너무 의존한 정치였다는 게 오늘날 중론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하고 지적한 것처럼 정조로서는 나름 최선을 다한 것이라는 반론이 존재한다. 그 근본원인은 숙종과 영조 등의 선대왕들에게 있기에.] 정조가 현대적 시각에서 과연 [[개혁|개혁적인]] [[조선/왕사|군주]]였느냐는 의문도 존재한다. 정조가 [[실학자]]들을 등용하고 [[외국]]의 문물을 일부 받아들인 것은 사실이지만, [[문체반정]]을 일으켜 학문의 다양성을 탄압하고 [[성리학]]적 정통에 집착하는 등의 행위를 보면 상당히 모순적인 면도 분명 존재한다. 때문에 정조의 행위는 [[조선/왕사|자신의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 중론이다. [[서양]] 문물의 수입과 서학도 이게 다 패관잡문이나 읽어서 그러니 순정고금체만 쓰라는 명령을 내려 사실상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정조는 스스로를 [[조선]] [[성리학|유학]]의 대통(大統)으로 칭하는 등 전형적인 유교 원리주의자의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 대중에게 알려진 개혁 군주라는 모습과는 거리가 멀고, 성리학 근본주의로 돌아가 18세기 말의 조선 사회의 복합적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보수적 근본주의를 주장하는 군주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세도정치]]의 원인이 된 정조는 '''[[개혁]] 군주'''로 추앙받는데 반해 [[세도정치]]를 척결한 [[흥선대원군]]은 '''[[수구]]'''의 대명사처럼 되어버린 것이 어찌 보면 아이러니. 한편 서양 배들이 [[조선]]에 본격적으로 접근하기 시작한 것이 정조 재위기였다. 《[[정조실록]]》을 보면 [[1797년]](정조 21년) [[영국]] 해군 [[군함]]인 프로비던스 호가 부산 용당포[* 지금의 [[부산광역시]] [[남구(부산)|남구]] [[용당동(부산)|용당동]]]에 닿은 기록이 등장한다. 그러나 정조도 [[흥선대원군]]과 마찬가지로 이양선이 오면 통상 [[수교]]에는 관심이 없었고 물과 식량과 같은 기본적인 것만 빨리 제공하고 쫓아냈다. 정조는 재위 15년차 이후 경연을 사실상 중단했으며 알려진 바처럼 어느 순간부터 [[권신]]들과 비밀 어찰을 통해서 막후 정치를 하였다. 경연은 흔히 알려진 왕이 [[공부]]하는 자리로서의 성격도 있지만 어떤 면에서는 신하들과 서로 소통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정조는 신하들이 무식하니 내가 가르치겠다는 명목으로 경연을 없애고, '''초계문신제'''라는 미명 하에 권신들과의 막후 정치에만 몰두하였다. 결론적으로 말해 정조 시대의 한계는 '''정조 자신'''이었는데, [[박시백]]이 지적한 것처럼 자질과 실천력 모두 있었지만 그는 [[개혁]] 군주이기 이전에 [[유학자|유교원리주의자]]였다. 그것도 뿌리까지 유학 그 자체인 대(大)유학자이며 설사 정조보다 뛰어난 국왕이 권좌에 있었다 하더라도 조선이라는 [[국가]]임과 동시에 조선의 체제를 변혁시켰을리는 만무하다. 설령 그럴 의지가 있더라도, 그 자신의 정통성과 여타 상황들 때문에 그럴 수조차 없었고. 정조가 구축한 국가 운영 체제는 견제장치가 상실된 모순점이 가득했고 조선을 멸망으로 몰아간 단초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 하지만 그 근본 원인이 모두 숙종과 영조에게 있다는 지적 역시 만만치 않다.] 정조의 사상 통제도 원인이 있다는 지적이 있다. [[https://www.chosun.com/opinion/column/2022/04/27/EQD5M5B47JACVB52DGF3PZMNH4/|(조선일보 칼럼)정조의 사상 통제로 조선 학문은 몰락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