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조(조선) (문단 편집) == 기타 == * [[사망|승하]]하기 2년 전인 [[1798년]](정조 22년) 다시 새로운 호를 지었다.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는 무척 길고도 독특한 호였다. 하늘에 떠 있는 달이 1만 개의 개울을 비추듯이, 자신의 다스림이 일부 특권 계층이 아닌 만백성에게 두루 혜택이 미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특히 다른 호와는 달리 정조는 '''만천명월주인옹'''에 담은 자신의 간절한 뜻과 의지를 조정의 모든 신하와 백성들이 알 수 있도록 ''''만천명월주인옹자서(萬川明月主人翁自序)''''라는 글까지 지어 발표했다. 글은 [[창덕궁]] 후원 [[창덕궁 폄우사|폄우사]] 옆 [[창덕궁 존덕정|존덕정]]에 있다. * 정조와 [[의빈 성씨]]의 장남인 [[문효세자]]의 세자 책봉 때, [[청나라]] 황실은 문효세자의 장수를 기원하는 [[미얀마]]산 옥불을 선물했다고 한다. 정조는 이 옥불을 보관하기 위해 승가사를 중건했으나, 오늘날 그 옥불은 어디에 있는지 행방이 묘연하여 알 수 없다.[[http://v.media.daum.net/v/20161230161602710|관련 기사]] * 시력이 나빠 [[안경]]을 애용하기도 했다. 즉위한 지 23년째 해([[1799년]])부터 눈이 나빠져서 [[안경]]을 썼다는 기록이 《[[정조실록]]》에 있다. 다만 본인도 공식석상에서는 쓰기가 부담스러웠는지 다음과 같은 언급을 남겼다.[* 이후 1년 뒤인 [[1800년]](정조 24년)에도 비슷한 언급을 한 기록이 《[[승정원일기]]》에 남아 있는데, 내심 안경을 쓰고 업무를 보고 싶었지만 주변의 시선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발언을 하고 몇 달 지나지 않아 정조는 승하한다.] > "'''나의 시력이 점점 이전보다 못해져서 경전의 문자는 안경이 아니면 알아보기가 어렵지만, 안경은 2백 년 이후 처음 있는 물건이므로 이것을 쓰고 조정에서 국사를 처결한다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 것이다.''' 요즘 일기 등 문서를 상고해 볼 일이 있었는데, 역시 마음대로 훑어보기가 어려웠다. 이는 예사로운 눈병이 아니어서, 깊은 생각을 한다거나 복잡한 일이 있을 경우 어김없이 이상이 생겨 등골의 태양경(太陽經)과 좌우 옆구리에 횃불이 타는 듯한 열기가 있는데, 이것이 눈병의 원인이 되고 있다. 간혹 시험삼아 불을 때지 않은 온돌바닥에 누워 있으면 몸의 열기로 바닥까지 차츰 따뜻해지므로 처음에는 조금 시원한 것 같아도 나중에는 또 견디기가 어려우니, 이는 전부 태양경의 울화가 팽배해 있는 결과로서 나의 학문의 힘이 깊지 못해 의지의 힘이 혈기(血氣)를 제어하지 못한 때문이다." >---- >- '''《[[정조실록]]》 52권, 정조 23년([[1799년]], 청 가경(嘉慶) 4년) 7월 10일 (병인) 1번째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va_12307010_001|#]].] * 증조할아버지인 [[숙종(조선)|숙종]]과 할아버지 [[영조]]를 이어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높이는 사업을 계속했는데[*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산시|아산]]에 있는 [[현충사]]를 대폭 확장하고 [[숙종(조선)|숙종]] 본인이 직접 [[이순신]]의 제문을 지었다. [[영조]]는 추숭 자체보다도 정작 신하들을 까는데 [[이순신]]을 이용했다. 대표적인 피해자가 [[박문수]]. 사실 영조 뿐 아니라 [[임진왜란]] 이후의 왕들이 이순신과 신하들을 상호 비교하면서 까는 통에 피해자들이 여럿 있다. 특히 더 두드러진 것은 유명 수군 도독을 사후 유일하게 열거한 것. 숨덕을 넘어 대놓고 [[덕질]]. 즉, 대표 대덕이다.] 《[[정조실록]]》이나 개인 문집인 《[[홍재전서]]》를 보면 [[이순신]]에 대해 정말 침이 마르도록 찬양하고 있다. 예를 들면 '''"우리 나라에 진정으로 문무를 겸비한 인물은 이 충무공(忠武公) 밖에 없다."'''라든지, '''"그가 만약 고대 [[중국]]에 태어났으면 [[제갈량]]과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다."'''라고 평하기도 했다. 실제로도 어명으로 《이충무공전서》를 공식 발간케 하는 등[* 여기엔 왕의 사유 재산인 [[내탕금]]까지 직접 투입했다.] 재위 기간 내내 이순신 기념, 추모에 신경을 정말 많이 쓰기도 했다. * [[삼국지]]의 [[촉한]]의 황제 [[유선(삼국지)|유선]]도 높게 평가했다! >후주(後主)가 촉(蜀)을 생각한다고 대답한 것은 천고의 비웃음거리가 될 만하다. 그러나 그 말의 뜻을 자세히 음미하면 혹 자신을 보전하려는 계책에서 일부러 이러한 말을 하여 속마음을 감추려고 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대저 그 사람은 참으로 말할 것이 없고 평소 그의 사적(事蹟)을 살펴보더라도 진 혜제(晉惠帝)에 비할 수 없으니, 그렇다면 비록 극정(郤正)이 말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어찌 촉을 그리워하는 한 생각이 없겠는가. 이는 참으로 말을 해도 아무 소용이 없고 단지 저들의 의심만 야기시킬 뿐이기 때문에 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극정이 말한 것에 대해서도 가부를 살피지 못했어야 하는데, 오히려 어떻게 극정을 너무 늦게 알았다고 한스러워할 수가 있겠는가. >---- >- '''《[[홍재전서]](弘齋全書)》 제114권 中.''' * [[강희제]]에 대해서는 정치적으로 상국이기는 하지만 문화적으로는 금수같은 [[오랑캐]]라고 무시했던 [[청나라]]의 황제지만 의외로 '''[[성군]]'''(聖君)이라는 평가를 하기도 했다. >“[[강희제|강희(康煕)]]는 그 자체로 '''성군'''이니, [[청나라|이적(夷狄)]]과 똑같이 일률화할 수는 없다.” >---- >- '''정조''' * 스스로 재판을 집행하여 판결을 내린 경우도 많았는데, 한 번은 모함 사건을 혼자 눈치채고 옳게 판결한 경우도 있었다. [[황해도]]에서 이가원과 조환이 "조재항이 아내 윤씨를 밥에 돌이 섞였다는 이유로 걷어차 죽였다"고 관에 고발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가원은 윤씨의 외삼촌이고, 조환도 윤씨의 인척이었다. 관에서 즉각 [[부검]]을 실시하려 했으나 죽은 지 오래되어 시신의 부패가 심했는데, 등뼈에 피부가 붙었음을 근거로 타살을 확정 지었다. 더불어 마을에 '나는 밥 한 사발 때문에 맞아죽었다'는 내용의 노래가 돌아 조재항의 살인 혐의는 더 명확해졌다. 형조와 [[황해도]] 관찰사는 조재항의 살인 혐의를 유죄로 보고 [[사형]]을 내릴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장계를 받은 정조는 "모름지기 그러한 노래는 원통함을 알 듯 말듯 숨기는 법인데, 너무 정확하게 범인을 확정 짓고 있으니 도리어 의심스러우므로 다시 조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곧 이가원이 노래를 지어 퍼뜨렸고, 조환이 이가원의 꼬드김에 넘어가 소장을 작성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가원이 조재항에게 금전을 요구했으나 조재항이 듣지 않아 무고했다. 조재항은 사형 직전에 무죄 방면되었고 이가원은 종신 유배, 조환은 도형 정배(중노동 처벌 후 특별 감시)에 처해졌다. * [[정약용]]의 다산시문집에 의하면, [[시]](詩) 짓기 시험을 내서 제 시간 내에 시를 짓지 못하는 관료를 [[창덕궁]] 부용지 한가운데의 둥근 섬으로 귀양 보내서 크게 망신을 줬다는 이야기가 있다. 《[[조선왕조실톡]]》 [[https://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642598&no=35&weekday=wed|33화에 이 에피소드가 나온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img9.uploadhouse.com/22127519f6041a36dfdd3a82354b66c46c5927b6.jpg|width=100%]]}}} || || {{{#gold ''' 창덕궁 부용지와 섬. 이런 곳에 조각배 띄우고 노 저어 들어가게 했다. '''}}} || * 전해지는 [[어진|초상화]]를 보면 온화해 보이지만, 이는 후대에 이길범 화백이 표준 영정으로 그린 상상화이다. 실제로 [[순조]]의 회상과 선원보감, 열성어진에 의해 그려진 초상화를 보면 상당히 억세고 굳건한 인물로 보인다. 그에 대한 묘사로 정조는 반듯한 이마, 우뚝선 콧날에 펑퍼짐한 눈자위, 네모난 입에 겹으로 된 턱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정조가 조심태에게 보낸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7603135|편지]]에서 '경처럼 뚱뚱한 사람이 어떻게 견디겠는가. 실로 [[동병상련]]이니 우습다.'라는 말을 한 내용 즉 동병상련으로 정조 자신이 뚱뚱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확실한 것은 정조의 외모가 표준영정처럼 문약한 외모는 아니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한편 정조가 비대하다고 칭한 조심태의 초상화는 전해지는 것이 없어 한동안 정조 어진을 그린 이길범 화백이 그린 상상화로 대체되었는데 2023년 삼성 일가가 2021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이른바 ‘이건희 컬렉션’의 수집품 2만 3300여 점 속에 파묻혀 있었다. 2점의 초상화가 현존하며 수원유수 부임 전 어영대장을 역임했을 때 그려진 초상화로 추정된다. 초상화에 그려진 조심태는 동시대 연암 박지원처럼 굉장히 매서운 인상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반신상이라 체구가 어떠했는지 알 수 없다.] * 당시 에피소드 중 하나로, 윤광류라는 농민이 '''운종가의 종'''(현대의 종로 [[보신각]])을 멋대로 친 사건이 있었다. 운종가 종은 [[한양 도성]]의 시간을 알리는 기능을 했으므로 이는 심각한 사건이다. 그런데 관헌에서 당장 잡아들여서 조사한 결과 종을 친 이유가 참으로 황당했는데, 이유는 '''정조에게 [[참외]]를 바치고 싶어서.''' 행위 자체는 중죄이고 이유도 황당하긴 하나, 딱히 나쁜 의도는 아니어서인지 정조는 그냥 윤광류를 경고에 훈방조치만 하고 바로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신하들이 종을 멋대로 친 것은 중죄이므로 엄히 처벌할 것을 주장했지만, 정조는 "[[영조]] [[조선/왕사|임금]] 때도 [[경복궁 광화문|광화문]] 종을 친 자가 있었는데, 뭔가 억울한 일이 있어서 그랬을 것이라며 넘어가고 대신 종을 담당하는 관리를 파직했다. 이번 일도 그냥 모르고 한 것일 테이니 대충 넘어가자"며 사건을 흐지부지 끝냈다.[* 출처 : '''《[[정조실록]]》 16권, 정조 7년([[1783년]], 청 건륭(乾隆) 8년) 8월 2일 (신유) 3번째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va_10708002_003|#]].] * 백성들의 민원을 직접 다가가 수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격쟁]] 항목 참조. 신료들이 안전상의 문제를 들어 반대하기도 하였으나 정조는 '''"백성들은 나의 자식들이고, 백성들이 격쟁을 통해 나에게 호소하는 건 부모에게 호소하는 것과 같다. 그들이 잘못된 게 아니라, 그들을 그렇게 만든 이가 잘못된 것이다."'''라고 강행했다. * 이덕무의 저서 《[[은애전]]》은 정조 치세에 벌어진 실제 사건과 정조의 실제 판결 내용을 나타내고 있다. * [[의빈 성씨]]에 관한 기록을 보면 상당한 로맨티시스트였던 것으로 보인다. * 수시로 [[성균관]]에 방문해서 유생들로 하여금 쪽지시험 비슷한 시험을 치르게 한 적이 있는데, 한번은 문제가 너무 어려웠는지 유생들이 단체로 백지 답안지를 제출하자 노해서 쓴 경고문이 〈정조어필 시국제입장제생〉이란 글로 남아있다.[* 요즘 식으로 알기 쉽게 내용을 요약하자면 대략 다음과 같다. ''''니들이 그러고도 성균관 학생들이냐? 중고딩보다 못한 게 말이 되냐고. 별로 어렵지도 않은데 어떻게 백지로 내냐? 똑바로 하자.''''] 정조 본인도 얼마나 빡친 채 썼었는지 오타를 그냥 먹으로 쓱쓱 지워버린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어 정조의 불같은 성미를 엿볼 수가 있다.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ulPageNo=3®ion=&searchCondition=&searchCondition2=&s_kdcd=&s_ctcd=31&ccbaKdcd=12&ccbaAsno=16320300&ccbaCtcd=31&ccbaCpno=1123116320300&ccbaCndt=&ccbaLcto=12&stCcbaAsno=&endCcbaAsno=&stCcbaAsdt=&endCcbaAsdt=&ccbaPcd1=&chGubun=&header=region&returnUrl=%2Fheri%2Fcul%2FculSelectRegionList.do&pageNo__=2_6_1_1&pageNo=1_1_2_0|보물 〈정조어필 - 시국제입장제생〉.]] * [[대한민국 해군]]은 [[2022년]] [[6월 11일]] KDX-III Batch-II 이지스 구축함 1번함의 함명을 '''정조대왕함'''으로 명명했다. 이후, KDX-III Batch-II급은 [[정조대왕급 구축함]]이 될 예정이다. * 윤승운 작가의 만화 맹꽁이서당 7권의 능참봉과 정조임금 편에서 언급된 일화로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에 참배후 수원에서 하룻밤 묵는데 비가 내리자 더욱 아버지가 생각나고 "아버님은 차가운 땅속에서 비 맞으며 누워계시는데 참봉놈은 더운 구들장에서 잠을 자겠지." 라는 생각이 들고 괘씸해서 선전관을 불러 능참봉이 구들장에서 편히 자고 있거든 불문곡직하고 목을 치라고 칼을 줬다. 그러나 능참봉 왕성은 며칠전 점을 봤다가 며칠후 목이 달아난다는 말에 살 방도를 물었고 점쟁이가 초닷새날 저녁에 비가 오거든 관복을 갖춰 입고 사도세자의 묘 앞에 축시까지 엎드려 있으라고 했고 정말 초닷새날 저녁에 비가 오자 왕성은 점쟁이 말대로 했고 선전관이 말을 타고와서 왕성의 위치를 묻고 저녁에 능에 올랐다는 말에 올라가보니 비를 철철 맞으며 사도세자의 묘 앞에 엎드려 있었고 이에 선전관은 왕성의 젖은 관복을 가져가서 보고하고 이에 정조는 기특하게 여겨 새 의복과 상금을 주고 벼슬도 올려서 왕성은 지방 수령관이 되었다. 이 이야기가 정사인지 야사인지는 알 수 없으나[* 맹꽁이 서당은 실록에 실린 정사와 야사가 섞여 있다.] 정사라면 정조의 행동은 후대에 욕 먹을 행동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