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3보병사단 (문단 편집) == 역사 == [[1947년]] 12월 1일 [[부산광역시]]에서 제5, 6, 9[[연대(군대)|연대]][* 이 초기 배치 연대 번호는 3사단 내에 존재하지 않는데, 5와 9연대는 현재는 전부 다른 사단 예하 부대이고, 6연대의 경우 대구에서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해체 후 22연대로 재창설되었기 때문이다.]와 [[이응준]] [[대령]]을 초대 [[여단장]]으로, [[조선경비대]] '제3보병여단'으로 창설되었으며, 이후 1949년 5월 12일 최덕신 대령을 초대 사단장으로 하여 '제3보병사단'으로 승격되었다.[* 그래서 부대 최초 창설과는 별개로 이 승격일을 사단 창설 기념일로 하고 있다. [[부산광역시]] 중앙동에 창설 기념비가 있다.] 별개로, 해당 사단의 핵심부대인 18연대(진백골연대)는 3여단 창설에 맞춰 3여단 내에서 창설되기도 했으며, 자원 입대한 [[서북청년회]] 회원들이 중심이 된 부대였다. 따라서 극도의 반공 성향과 전투적 기질[* 18연대 창설 요원이었던 김구현 백골원로전우회 회장(6.25 전쟁 발발 당시 정보과 선임하사, 기계 안강 전투 후 한신 장군을 따라 수도사단 1연대로 전출)의 인터뷰에 따르면 월남 전 가족들이 공산주의자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데서 반공주의가 발현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을 자랑했다. 그리고 자신들의 [[철모]] 좌우에 '''"죽어 백골이 되어서라도 [[이북 5도|고향 땅]]을 되찾겠다."'''라는 의미로 백골(白骨) 마크를 그려넣었다고 한다.[* 백골 도안은 지금의 모습과 다른데 한신 장군(창설 당시 부연대장&1대대장 겸직)이 고안하였다고 한다.] 다만 [[6.25 전쟁]] 초기에는 뱅뱅 돌다가 황해도 옹진을 찍고 수도경비사령부에 들어가 수도사단([[김석원]] 준장) 소속이었다. 개전 1개월도 못 되어 엄청난 손실에 부대 건제를 도저히 유지할 수가 없어 7월 24일에 18연대는 재편되어 산하의 1대대로 격하되고, 같은 사령부 내에 있던 3연대는 2대대, 8연대는 3대대가 되는 등 18연대 내부로 포함되며 부대 편제가 1/3로 줄어들었다. 이 모든 게 5,7,수경사 3개 사단이 1개 사단으로 통폐합되는 과정에 발생된 일이다. 하지만 3개 연대의 핵심 요원들이 제18연대로 재편되자 이후 막강 연대로 변모하였다. 한때 수도 사단 봉급의 태반을 차지할 정도로 고참하사관들이 많아 BAR 사수까지 중사, 상사로 짜여 있었다고 한다. 당시 연대장이 [[임충식]](국방부 장관)[* 연대장 시절 전투를 앞두고 훈시 중 "만약 전투 중에 내가 도망간다면 너희가 날 총으로 쏴죽여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부연대장이 [[한신(국군)]](합참의장), 3대대장이 [[정승화]](육군참모총장)이다.[* 참고로 당시 수도 사단은 백골 외에 제1연대(이후 연대장 한신), 기갑연대가 있었다. 이들은 공격은 백골, 방어는 1연대, 잔적 소탕은 기갑연대로 역할 분담이 되어 있었다.] 어쨌든 부대 통합으로 18연대에서 서북청년회원의 비중은 확 줄어 들었다. 그래도 '백골부대'라는 명칭은 여전히 사용했는데, 워낙 용맹하다 보니 수도사단의 궂은일은 다 도맡아 하여 스스로 '등골부대', '산골부대'라고 자조했다고 한다. 북한에서는 "백골부대 놈들은 미국 놈들보다 더 악독하여 사람만 보면 죽인다"고 선전하여 국군을 보면 '백골부대'는 지금 어디쯤에 있냐며 걱정했다고 한다. 또한 국군 포로 중에 백골부대원이 있으면 무조건 총살했다고 한다. 북한군 내 백골 공포증이 얼마나 심했는지 1950년 11월 22일~24일 주을 전투 중에는 너무 치열한 교전에 질린 하사관 한 명이 벌떡 일어나 "이 새끼들아! 백골부대다!"하고 외치며 뚜벅뚜벅 걸어가니 그토록 완강하게 버티던 북괴군이 삽시간이 무너졌다는 일화도 있다[* 이후 북한군으로 복무했다가 귀순한 한 탈북민이 백골부대로 강연갔을 당시 "북한에 있을때 '치가 떨리도록 악랄한 놈들'이라고 듣던 백골부대로 강연을 오니 무척이나 떨렸다"라고 증언하기도 했다.]. 이후 [[흥남 철수작전]] 기간 중 당시 3사단 26연대와 에피소드가 있었는데, 흥남 철수 전 함흥으로 철수하는 과정에서, 18연대는 수도사단과 같이 철수하다가 폭설로 길이 막히는 바람에 배편으로 흥남으로 이동, 다시 수도사단과 만날 예정이었고, 3사단 또한 22,23연대가 배편으로, 26연대가 기차편으로 흥남으로 이동, 집결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18,22,23연대가 배에 올라있던 그 순간에 흥남철수가 결정되면서, 배에 탄 연대들이 그냥 부산으로 직행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결국 수도사단하고 26연대를 바꾸기로 결정하며, 18연대는 3사단으로 예속 전환되었다.[* 3사단장이었던 최석 장군이 18연대 창설 연대장으로 3사단장 부임 후 이왕 26연대와 바뀐거 18연대를 3사단으로 26연대를 수도사단으로 전환하자고 육본에 건의하여 받아들여졌다.] 전환 직전에는 수도 사단장은 [[송요찬]]이고 3사단장은 백남권. 연대장은 임충식 대령으로 그대로였다. 그리하여 비로서 18연대가 22·23연대와 만나게 되었다. 이 때문에 "백골부대" 명칭으로 더 자주 불리게 되었으며,[* 참고로 [[채명신]] 장군의 백골병단은 또 다른 월남자들이 같은 동기로 자칭한 것 외엔 공통점이 없다.] 이 와중에 3보병사단의 별명은 "사자부대" 였는데, [[6.25 전쟁]] 이후 여력이 생기자 보다 전투적인 명칭을 원하는 사단장의 의향에 따라 "백골부대"가 사단의 공식 명칭이 되었고, 18연대 역시 자신들이 원조 백골이라는 의미로 명칭을 진백골로 바꾸었다. 이 당시의 18연대에 대해서는 당시 대대장이었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대한민국 군인 정승화>, 중대장이었던 김종민의 <대전쟁> 참조. 그리고 본진인 3사단에 대해 살펴 보자면 [[6.25 전쟁]] 발발 초창기 진짜 어이없는 일들을 겪어왔다. 서울 지원을 위해 22연대를 서울로 보냈는데 뭐하다가 1사단으로 편입되는 바람에 7월 5일부터 14일까지 보고서에 독립 23연대로 기재되어 3사단이 소멸해버렸다. 어이없는 건 부대가 없던 7월 10일 유승렬 사단장이 해임되었다는 기록도 같이 있다는 것. 중동부로 빠져버린 8사단을 대신하여 지속적으로 동해안 전투에 참여해 왔고, 낙동강방어선 대에도 위수구역이 영덕-포항이었다. 특히 '10월 1일' [[대한민국 국군]] 최초로 [[삼팔선]]을 돌파해(사단 예하 23연대 10중대) 현재 [[국군의 날]]의 유래가 되었다. 이때 3사단장이 참군인으로 이름 높은 [[이종찬]]이었다. 이종찬은 1950년 11월 12일에 최석 준장으로 사단장이 취임할 때까지 3사단장직에 있었다. 그러나 1951년 그 유명한 [[현리 전투]]에서 부대원 2/3가 전사, 실종당하는 참패를 당하기도 했다.[* 그런데 부대 역사 배울 때는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고 배운다.] 6.25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에 당시 3사단 사단장이 전장병 외출 및 귀가 통제 조치를 하여 전쟁이 터지자 빠르게 대응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휴전 후에는 1973년 3월 7일 전방에서 군사분계선 푯말 보수 작업을 실시하던 중 인민군 육군 초소에서 총격을 가하자, 사단장 [[박정인]] 장군의 지휘로 예하 71포병대대가 도발을 가한 인민군 초소를 제압하고, 부대원들을 구출하는 전과를 거두기도 했다. [[박정인#s-3|3.7 완전작전]]은 휴전 이후에 전방에서 발생한 30여 건의 북한군 침투에 가장 성공적, 모범적으로 대응한 '완전작전'의 사례로 손꼽힌다. 매년 3월 7일에는 3.7 완전작전 선봉 대대 영내에서 기념 행사를 실시한다.[* 이 일이 있은 후 박정인 사단장은 보직 해임 되었는데, 그 이유는 박정인이 이 작전 이후에 북한군을 골탕 먹이려고 사단 모든 차량을 DMZ까지 진출시킨 것이 문제가 되었다. 이 일로 북한은 전시동원령까지 선포하였고, 여차하면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는 문제였다. 그것을 독자적인 작전권을 가지는 [[야전군사령관]]이나 군령권을 가지는 [[육군참모총장]]의 허락 없이 사단장 "단독"으로 한 것이다. 사실 [[비무장지대|DMZ]]로 군 병력을 보내는 것은 [[유엔군사령부]]의 허락이 있어야 하는 것이고, 당시에는 평시 작전통제권도 [[대한민국 국군]]이 단독으로 행사할 수 없었다. 그런데 전술한 규정들을 다 무시하고 실시한 것이다. 아무리 실제 병력이 없었다고 해도, 군 차량도 결국 군 병력의 일부이므로 이는 명백한 지휘 통제 위반이다. 쉽게 비유하면 한국군의 한 소대장이 병력을 이끌고 철책 경계 중 북한군의 공격으로 아군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치자. 소대장이 '응사하고 부상자를 후송하라'까지는 흠잡을 데가 없는 정상적인 대응이지만, '전투 가능한 총원 휴전선을 넘어가 북진해 보복한다'라는 명령을 내린다면 내심 통쾌하기는 하겠지만 그 어떤 장교도 옳게 대처했다고 보지 않을 것이다.] [[6.25 전쟁]] 때부터 백골부대로 불렸다고 알려져 있으나 전쟁 당시에는 백골부대가 아니라 사자부대(獅子部隊)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6.25 전쟁]] 당시 3사단은 제2913부대로도 불렸다. 정승화 총장의 회고록에 따르면 흥남 철수 이후 3사단으로 18연대가 오자 사단장이 이제부터 우리 사단은 백골부대라고 했다고 한다.[[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3053100329202005&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3-05-31&officeId=00032&pageNo=2&printNo=2169&publishType=00020|#]] 물론 상술했듯 공식으로 바뀐 건 휴전 후 여력이 생겼을 때다.] 현재는 [[제5군단]] 예하 사단으로 중부전선 철원 지역에서 [[제6보병사단]]과 함께 GOP 경계 임무를 수행하고 있으며, 아래에는 국군 최초의 기갑여단인 [[제1기갑여단]]과 국군 최강의 화력을 자랑하는 [[제5포병여단]] 있으며, [[대한민국 육군]]을 대표하는 메이커 사단이다. 전통적으로 [[해골]]을 좋아하는지라, 자체 행사나 내부 구조물, 현판 등에는 무수히 많은 해골을 그려넣고 있다. 예를 들면 아래의 사진이다. [[파일:attachment/3xxskull.jpg]] [[47번 국도]]를 타고 [[포천시]] 이동면에서 [[철원군]] 서면으로 넘어가면 만날 수 있는 조형물. 43번 국도 문혜리에서 와수리로 가는 길에도 있다.[* 네이버나 카카오 로드뷰에서는 이 조형물도 군사시설의 일부로 간주되어서 모자이크 처리가 되어있다.] 사단 사령부 입구에도 당연히 있다. 훈련소에서 퇴소하는 이등병들에게 주는 술도 '''백골주'''라고 부른다. 해골 모양 잔에 술을 담아서 백골주였다.[* 물론 진짜 술을 줄 수는 없으니 잔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맛스타]]였고 2011년 1월 1일부로 [[생생가득]] 혹은 맹물이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경례 구호도 다른 부대와 달리 '''"백골!"''' 이라고 한다. 1972년까지 경례 구호가 "돌격"이었는데, 제25대 박정인 사단장이 '살아 국가에 충성하고 죽어 백골이 되어서라도 나라를 지키자'는 의지를 나타내기 위해 "백골"로 변경하였다. 의외로 회관 이름은 삼성회관인데 삼성회관 옆에 영외 PX인 삼성마트가 있다.[* 실제로 3사단 부대 애칭이 삼성대(三星臺)로 자매결연 맺어져 있다. 1970년대 이건희 전 삼성회장이 부대에 방문한 사진이 부대 역사관에 남아있다.] 진백골연대의 회관 이름이 백골회관이다.[* 병 감축과 함께 이제는 사단에서 관리한다.] 2020년 [[국방개혁]]으로 인해 12월 1일부로 예하 연대들이 [[여단]]으로 변경되었다. 한편 임무변경등으로 인해 강원도에 있었던 사단본부가 근시일 내 [[경기도]] [[포천시]]로 이전할 계획이다. 다만 [[https://www.youtube.com/watch?v=GwUXGTvImo4|철원군 주민들이 수입 감소를 이유로 반발하고 있다.]] [youtube(nvCqRNMZ97M)] 2020년 5월 13일 육군 유튜브에서는 3사단 장병들이 KCTC 훈련을 실시한 이야기가 공개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