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7보병사단 (문단 편집) == 역사 == || [[파일:external/file.agora.media.daum.net/pcp_download.php?fhandle=MXA0UXpAZmlsZS5hZ29yYS5tZWRpYS5kYXVtLm5ldDovSzE2Mi8wLzEzLmpwZw==&filename=%B1%EA%B9%DF1_1-soda_fashion.jpg|width=100%]] || || 사단의 원래 마크 || [[1949년]] [[1월 7일]], '제7여단'으로 창설되었고, [[2월 1일]] '수도여단'으로 개칭. 1949년 [[5월 12일]] ''''(구)수도사단''''[* 현재의 [[수도기계화보병사단|수도사단(수기사)]]과는 다른 부대다.]으로 승격한 뒤, 1949년 [[6월 20일]] 용산에서 이준식 대령을 초대 사단장으로, 1, 9, 19연대를 근간[* 현재 해당 연대들은 전부 타 사단으로 소속이 바뀌어 지금은 [[제1기계화보병여단]]([[수도기계화보병사단]]), [[제9기계화보병여단]]([[제11기계화보병사단]]), [[제19보병여단]]([[제6보병사단]])이 되었다.]으로 정식 창설되었다. [[6.25 전쟁]] 발발 이전까지는 후방에서 [[빨치산]] 소탕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다 50년대에 동두천과 포천 경계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는데, 이 와중에 후방 3연대가 (구)수도경비사령부로 예속이 변경되고 [[충청남도]] [[온양시|온양]]에 주둔 중인 2사단 25연대가 예속되어 [[6월 15일]]까지 후방인 의정부로 이동하도록 되어있었다. 그러나 이 연대는 [[병영]] 문제로 제때 올라오지 못했고, 그 상태로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의 기습 남침을 맞이해 [[동두천 전투]], [[포천 전투]]를 치르게 된다. 그러나 전력의 격차[* 개전 당시 7사단은 보병연대 둘, 포병대대 하나와 각 직할대를 포함해 7,211명이 있었고, 반대로 북괴 측은 3사단, 4사단, 105기갑여단, 2개 전차대대 등 28,000명이 있었고, 대전차포와 로켓포로도 전차를 완파할 수 없어 결국 기관총과 소총만으로 보병들만 상대해야 하는 등 장비의 격차도 컸었다.]와 [[예비대]]가 없어 동두천의 1연대, 포천의 9연대는 그야말로 속수무책으로 밀려났고, [[의정부 전투]]에서조차 밀려나고 말았다. 북한군 주공이 동두천 포천지역에 집중되었고 북한군 전차 240여대중 150대가 7사단 방어지역으로 집중되어 대전차 방어 무기가 없는 상황에서 속절없이 무너지게 된다. 참고로 당시 사단장은 후일 [[영천 전투]]와 [[현리 전투]]로 좋은 쪽과 안 좋은 쪽 양극단의 유명세를 날리게 된 [[유재흥]] 장군이다. 게다가 [[한강 방어선 전투]]를 치르는 과정에서 1/3까지 줄어버리는 바람에 병력과 장비들을 아직 건재하던 다른 부대들에게 넘기고[* 이 과정에서 1연대와 '수도' 명칭을 (구)수도경비사령부에게 넘겨 지금의 수도사단(수기사)이 탄생되었다.] [[7월 5일]] 해산되었다가 전주에서 잔류병력을 기간으로 학도의용군, 지원병들을 모집하여 재편 중 북한군이 전라도에 진입하자 목총으로 제식훈련 중이었던 보충병들을 대구로 보내고, 한강 북쪽 전투에 투입되었다가 서해안을 통해 기적적으로 귀환한 보병학교 교도대대를 중심으로 민부대를 만들어서 지연전을 담당한다. 왜 하필 '민부대'였냐면 당시 재편성을 맡은 지휘관이 [[민기식]] 대령이었기 때문이다.[* 이름 + 부대가 일본식을 따랐다는 말이 있는데 잘못된 말이다. [[일본군]]의 경우 그런 이름을 사용한 이유는 따로 있다. 임무에 따라 여러 부대소속 장병을 임시로 모아 조합 편성해 파견하는 방식을 사용할 때는 숫자를 붙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후 낙동강 전선 [[안강-기계 전투]]가 한창인 8월 20일 대구에서 3, 5, 8연대로 재창설[* 3연대는 재편 후 예속되었고, 5연대는 민기식 부대를 기간으로, 8연대는 독립 유격대를 기간으로 재편 후 예속되었다. 하여간 이 때문에 육군 중 유일하게 한자릿수 보병연대/여단을 보유한 사단이 되었다.] 후 [[영천·신녕전투]]에서 1군단 예비사단으로 8, 6사단에게 예하 부대들을 보내 도움을 주다 인천상륙작전을 전후로 상황이 역전되자 8사단과 함께 잔적들을 소탕하며 북진했다. 이후 [[서울]]을 [[9.28 서울 수복|탈환하고]] 북진하는 과정에서 누가 먼저 [[평양 탈환작전]]을 치르고 [[평양]]에 입성할지를 두고 경쟁이 일었는데, 당시 대통령 이승만은 서울 선봉 입성을 미 해병대에게 뺏긴 트라우마가 있어 미 1기병사단과 평양 돌입을 다투는 [[제1보병사단|국군 1사단]]만으로는 안심할 수 없다고 정일권 참모총장에게 말해 결국 유재흥 2군단장을 거쳐 평양에 가장 근접한 황해도 수안까지 진격해있던 7사단에게 평양으로 방향 전환하라는 특명이 하달된다. [[http://www.7xx.org/bbs/board.php?bo_table=01_2&wr_id=130&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8%BF%AC%B4%EB&sst=wr_datetime&sod=desc&sop=and&page=2|3연대장 이기건 중령 증언]] 이에 8연대 9중대가 [[차량화보병]] 상태로 신나게 달려 18일 오후 [[대동강]]을 도하해 평양 [[김일성종합대학]]에 [[태극기]]를 게양하였다. 그러나 1사단의 영역을 멋대로 침범한 것이었기에 이후 모란봉을 점령하고 북한군과 교전 중 1사단 11연대로부터 57mm 대전차포로 공격당하는 참사도 벌어졌다. 하여간 1사단의 영역을 멋대로 침범했기에 대외적으로는 1사단이 입성 부대로 지정되었지만 7사단 역시 대통령의 명령과 육본과 2군단의 지원 속에 평양에 입성한 건 사실이라 지금도 양 사단에선 각각 자신들이 평양을 최선두로 입성했다고 주장하며 7사단은 18일, 1사단은 19일에 각자 평양 최선두입성 기념행사를 열고 있다. 자세한 건 [[평양 탈환작전]] 문서로. 이후 다른 부대들과 함께 계속 북진했으나 중공군이 가세하면서 [[개천-비호산 전투|개천과 비호산에서 분투하다]] [[청천강 전투]] 2차전에서 8사단과 함께 전멸당하고 두 사단장이 빤스런하는 굴욕을 겪고 서부전선이 붕괴되는데 일조하기도 했다. 게다가 유명한 참패인 [[현리 전투]]에서도 미10군단에 배속돼 3군단의 유일한 병참선인 오마치(=오미재) 고개 일대를 사수하다 중공군에게 밀려 퇴각하게 되었지만 문제는 7사단장 [[김형일(1923)|김형일]]과 그 수뇌부는 퇴각하는 와중에도 중공군이 고개를 피탈했단 사실을 3군단에게 '''알리지 않아''' 3군단 와해의 단초를 제공했다. 물론 3군단도 오마치 고개의 중요성을 그 전부터 인지해 [[초병]]을 배치하려 했으나 문제는 그곳이 미10군단 예하의 7사단 영역이었고, 급기야 이를 알게 된 군단장 [[에드워드 알몬드]]는 무슨 깡으로 [[월권]]하냐며 아주 강경하게 막아 사실상 무주공산으로 만든 것도 이유다. 하여간 3군단장 유재흥은 이후 벌어진 군단 와해와 무질서한 패주[* 다만 [[현리전투]] 항목에도 적혀있듯, 불행중 다행으로 이게 [[전화위복]]이 되었다. 전후 공개된 중공군측 기록에 따르면 이들은 3군단을 '지워버리기' 위해 철저한 포위망을 짰는데 이렇게 뿔뿔이 흩어져 남하하는 바람에 인명 피해는 포위망에서 쌈싸먹히는 것에 비하면 적은 편이었다고 한다.]의 책임을 지고 후방으로 경질되지만, 7사단장 [[김형일(1923)|김형일]]은 10군단장 [[에드워드 알몬드]]가 워낙 별종인데다 앞서 초병 배치 건으로 이미 3군단과 사이가 안 좋았는데, 그런 상관을 무시하고 직접 옆 군단에게 알려야 할 의무나 깡이 없었기에 현리 전투의 패배를 다룬 글에서 크게 비난받지 않거나 아예 그 이름이 언급되는 일도 드물다. 이후 강원도 양구군에서 [[고지전]]을 치열하게 반복하다 [[1953년]] [[7월 20일]]부터 종전 당일인 [[7월 27일]]까지 벌어진 한국전쟁의 마지막 전투, [[425고지-406고지 전투]]에서 중공군의 공세를 격퇴해 주변의 백암산, 적근산, 삼천봉을 끼고 군사분계선을 38km 정도 끌어올려 철원 [[김화군]] 일부와 [[파로호|화천댐]]을 대한민국 영토로 확정지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정전협상 과정에서 [[군사분계선]]이 고지 한가운데를 관통해[[https://www.sedaily.com/NewsView/1Z56N7Q852|#]] 이곳을 사수하던 장병들은 피눈물을 흘리며 내려와야 했다.[* 그래서 이에 대한 불만도 있었으나 하루빨리 휴전하고픈 미군 측에서 압박해서 별 수 없었다.] 참고로 [[http://www.korea.kr/news/policyNewsView.do?newsId=148764575|이영선 국방일보 기자에 따르면]] 영화 [[고지전(영화)|고지전]]은 [[425고지-406고지 전투]]를 모티브로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 여러모로 문제가 많은 악어중대를 현존하는 특정 부대 소속으로 할 경우 생길 명예훼손 문제, 몰입도 등이 있었다.]로 상당 부분이 [[각색]]되었는데, 일례로 악어중대는 3연대 1중대[* 이는 초반부 방첩대 강 중위가 신임 중대장과 신병을 태우고 운전할 때 잠깐 언급된다.]이나 국군에 존재하지 않는 10사단 예속이다.[* 다만 20사단과 발음이 유사하고 [[M-1고지 전투]] 당시 이 사단의 피해가 막심하자 임무교대 후 후방으로 물러났었던 8, 5연대가 차례대로 불려나온 적이 있기에 이 전투도 참고한 듯 싶다.] 또한 중공군 대신 북한군을 자주 상대한다. 게다가 현실에선 악착같이 사수하다 정전 협정 결과에 피눈물을 쏟으며 내려와야 했으나, 영화에선 정전 협정 때 한 명을 빼면 모두 사망한다. 한국전쟁 중 7사단이 참전한 전투는 다음과 같다. * [[1950년]] * [[동두천 전투]] * [[포천 전투]] * [[의정부 전투]] * [[내촌-태릉 전투]] * [[한강 방어선 전투]] * [[영천 전투]] * [[경주-서울 진격전]] * [[평양 탈환작전]] * [[개천-비호산 전투]] * [[청천강 전투]] (2차) * [[1951년]] * [[매봉·한석산 전투]][* 1951년 4월 인제-간성-원통-양양의 주도권을 두고 벌어진 전투로, 워낙 격전이 되자 3,5연대가 [[제5보병사단|5사단]]에, 8연대는 [[제3보병사단|3사단]]에 배속돼 싸웠다.] * [[현리 전투]] * [[피의 능선 전투]] (대전차대대 한정) * [[백석산 전투|송현리-송정동 전투 ~ 백석산 전투]] (중간에 [[제8기동사단|8사단]]과 임무교대) * [[크리스마스 고지 전투]] (1차) * 1952년 * [[크리스마스 고지 전투]] (2,3차) * 1953년 * [[M-1고지 전투]] (+선우고지 전투) * [[425고지-406고지 전투]] 휴전 이후 현재까지 중동부 전선을 담당하고 있으며, GOP 작전&근무환경은 [[제21보병사단|21사단]]과 함께 국내에서 손꼽히는 험지라 힘든 편이다. 특히 [[제8보병여단|8여단]] 우선에서 21사단 좌선으로 이어지는 구간이 극심한데, 7사단이 절벽이나 다름없는 산비탈과 계곡을 까서 호러스러운 섹터를 만들었다면 21사단쪽 섹터는 그보다는 좀 낫지만 섹터의 길이가 [[양구군]] 만큼 호러다. 참고로 [[원빈]]이 7사단 우선 중에서도 최우선 구역에서 섹터 돌다가 무릎이 아작나서 [[의병 제대]]했다.[* 당시 연대장이 악명이 높았다고 한다. 여담으로 원홍규 전 사단장과는 3사관학교 동기였다.] 칠성부대는 155마일 휴전선 경계부대 중 가장 좁은 방어정면을 가지고 있다. 이는 두말할 것도 없이 가장 험준하고, 가장 중요한 축선에 부대가 위치해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며, 또한 부대 전투력에 대한 신뢰의 증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1967년 4월 12일에는 7사단 관할의 DMZ 남방에서 40~60명 규모의 북한군 침투 병력과 2시간 동안 교전이 벌어졌고, 이를 격퇴하는 과정에서 수백발 규모의 포격까지 동반되기도 했다. 이는 지금까지도 휴전 이래 최대 규모 침투로 기록되어 있다. 이때 사단장은 본래 북한군 중좌이다가 [[다부동 전투]] 때 국군으로 귀순해 국군 장교가 된 [[정봉욱]] 소장이었는데, 그는 즉시 제7보병사단 휘하의 포병[[연대(군대)|연대]]를 동원하여 포격으로 침투하는 북한군을 격멸하고, 다음날 직접 사단 GP로 직접 올라가 방송을 통해 북한군 사단장 및 연대장 이름을 부르면서 만일 여기로 다시 침투하면 그때는 직접 북한군 진지에 포격하겠다고 엄포를 놓은 적이 있다고 한다. 그때 호명한 북한군 지휘관들은 과거 그가 귀순하기 전에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라고 한다. 이 사건 이후 문책을 요구하는 미국 측에 의해 제3사관학교장으로 보직 변경을 당했다. [[박정희]]가 사단장을 역임한 부대라서 [[5.16 쿠데타]] 당시 동원되었다는 오해도 있다. 그러나 쿠데타 당시 박정희는 2군 부사령관이었으며, 동원된 부대는 해병여단[* 김포에 주둔하던 해병대의 반란 가담은 쿠데타의 성공에 결정적이었다.]과 공수특전단 및 수도권의 예비사단 중에서도 소수병력 약 3,000명이었다. 게다가 당시 제7보병사단은 휴전 이후 강원도 최전방에 계속 주둔하고 있는 상태로서 거리상으로도, [[빈집털이|안보적]]으로도 쉽사리 동원시킬 상황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 시절 보급은 매우 열악해서 겨울에 동사자가 속출했다. 7사단은 다른 사단과 달리 동사자가 적었다고 박정희가 상부에 표창을 받았다. 참고로 주둔지 대부분이 [[화천군]]에 있으나, 전방 GOP여단들은 옛 [[김화군]] [[금성]]지역인 3개면[* 원남면, 원동면, 임남면.]에 상당수가 주둔중이다. 현재 저 세 곳은 주소상으로는 [[철원군]]이나,[* 원래 [[김화군]]이라는 별개의 행정구역이지만 분단 후 관리를 위해 철원군에 편입된 결과다.] 지뢰가 산재한 민통선 지역이라 철원에서 직접 가는 길이 없기에 군의 협조 하에 화천군을 경유해야 갈 수 있는 [[월경지]]다. 기타 사항으로 역대 육군 보병사단장들중 예비역 육군대장(13명)을 가장 많이 배출했으며, 6.25.전쟁 중 태극무공훈장 서훈도 많은 편이다.[* [[춘천-홍천 전투]]에서 공을 세우고 7사단 수색중대장으로 재직 중 순직한 심일소령, [[개천-비호산 전투]]에서 순직한 김옥상 일병, [[백석산 전투]]에서 순직한 김용배([[김용배|당시 7사단장]]과는 동명이인이다.) 5연대장, [[선우고지 전투]]에서 특공대였던 최득수 이등상사, [[425고지-406고지 전투]]의 주역이었던 김한준 대위 등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