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선공산당 (문단 편집) == 경성트로이카와 1930년대 노동운동 == 경성트로이카 활동 시기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은 코민테른이나 프로핀테른의 지시를 받는 국제선과 코민테른 등과 직접적 연계가 없고 국내파인 비국제선으로 나눌 수 있다. 박헌영, 김형선, [[김명시]], 권영태, 김희성 등이 국제선이었고 [[이재유 그룹]]이 비국제선이었다. 김형선은 이재유에게 국제선에 대한 협력을 요구했는데, 이재유는 해외에서 어떻게 국내를 지도하냐고 답했다. >이재유가 국제선 사람들과 불화를 빚은 것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는 이미 1933년에 재상해 '콤무니스트' 그룹의 국내 전권위원인 김형선과 미묘한 알력 관계를 보였다. 1934년에는 프로핀테른에서 파견된 권영태와 불화를 빚었다. 1935년에는 김승훈(金承塤), 1936년에는 김희성(金熙星) 등과 같은 국제선 사회주의자들과도 긴장관계에 있었다. 이 때문에 이재유는 국제선에 속하는 사람들에 의해 종파적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중략) > >이재유는 엠엘파의 정체성을 갖고 있다고 간주된 듯하다. (중략) 국제선 기관지 '콤무니스트'에 따르면 당재건운동 대열 속에는 과거의 종파적 전통을 부활시키려 노력하는 그룹들이 존재한다고 한다. 4개 그룹이 거론되었다. 계급투쟁 그룹(엠엘파), 볼셰비키(서상파), 불살(재만주 화요파), 레닌주의(재북경 안광천․김원봉 그룹)가 그들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그룹들을 ‘노골적인 종파’와 ‘복면적인 종파’로 구분한 데에 있다. 노골적인 종파라고 낙인찍힌 세력은 엠엘파 하나였다. >---- >임경석, 국제선 공산주의 그룹과 박헌영[[http://jbreview.jinbo.net/maynews/readview.php?table=organ&no=525|#]] >코민테른 상해지부의 김단야의 명에 의해 파견되었던 김형선에 대하여도 그(이재유)는 국제선에서 파견되었다는 사실 자체를 의심하고 있었다고 진술하였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들 조직과의 제휴는 끝내 이루어지지 못하고 좌절되었다. >---- >김경일,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 이재유 그룹은 코민테른을 맹목적으로 따르기를 거부하며 국제주의와 국내주의를 균형있게 추구하여 조선의 현실에 맞게 공산주의를 적절히 독립운동에 활용하였다. 이재유 그룹은 전위당 이론을 거부하고 즉각적인 당 건설에 반대하였으며 '트로이카 운동'이라는 독창적인 조직론을 만들어서 대중운동에 기반한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이끌었다. >[[이재유]]를 중심으로 한 ‘[[경성트로이카]]’(1933. 8.)-‘경성재건그룹’(1934. 11.)-‘조선공산당재건 경성준비그룹’(1936. 10.)은 국제공산당과 그 산하의 국제적 지도기관에서 파견된 공작원들이 국내의 다른 그룹들에 대해 배타적 권위를 주장하는 것은 오히려 갈등과 대립을 야기할 수 있다고 비판했다. 이재유는 당을 즉각적으로 건설하려는 방식을 반대하고, 생산현장에서의 대중 활동과 대중투쟁의 확대 · 강화를 통해 당재건의 인적 · 물적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이재유는 김삼룡 · 이성출 · 김형선 · 이순금 · 이현상 · 정태식 · 미야케(三宅鹿之助) 교수 등을 차례로 만나서 경성을 중심으로 한 ‘트로이카운동’을 제안했다. 즉 몇몇 지도부가 당을 먼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세 마리 말이 자유롭게 마차를 이끌듯이 회원 모두 저마다 자유롭게 활동하여 널리 동지를 획득하고, 때가 되면 조직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안병춘 · 이현상 · 변홍대는 노동운동, 최소복은 학생운동 조직을 나누어 맡았고, 이재유는 이를 총괄하기로 했다. >---- >박찬승, 한국독립운동사, 2014 한편 이재유가 다음과 같이 당시 열악한 노동환경을 묘사한 바 있다.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은 대중 속에서 대중과 함께하는 독립운동일 뿐 아니라 노동자, 농민, 빈민운동이기도 했다. >처음 1~2년은 식사만 제공받을 뿐 무보수로 18~19시간 혹사당하며 (중략) 기숙사에 기거하면서 한달에 한번밖에 외출할 수 없고 외출할 때는 감독자가 따라 나간다. (중략) 그녀들은 언제나 80도 이상의 더운 곳에서 일하며 바람이 통할 구멍조차도 없는 곳에서 혹사되기 때문에 정확한 내용은 알기 힘들지만 나의 경험만으로도 쉽게 알 수 있다. 내가 알고 있었던 5년 이상의 직공 8명 중에서 지금은 단지 2명밖에 있지 않고 6명은 모두 죽었던 것이다! 내가 일찍이 죽어야 할 사람만을 알았던가? >---- >이재유가 묘사한 일제강점기 여성 노동자의 노동환경 복지 이론이 아직 받아들여지지 않은 1930년대에는 사회주의, 공산주의가 이 시기 자본주의 병폐(대공황, 노동착취 등)를 비판하는 거의 유일한 대안이었다. 또 해외 독립운동은 식민지 조선 대중과는 분리되어 있을 수밖에 없는데 반제동맹, 이재유 그룹, 경성콤그룹의 활동과 같은 국내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은 독립운동 갈래 중 대중 속에서 대중과 함께 운동하는 거의 유일한 갈래였다. 이재유 그룹은 트로이카 운동을 통해 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공장에서 파업을 일으키고 학교의 동맹휴학과 친일교사 배척 등의 운동을 배후조종 하는 등 경성에 항일운동의 바람을 일으켰다. 수많은 조직원이 활동했으나 검거로 한 차례 와해된다. ||<-5> '''경성트로이카가 주도한 파업''' || || '''공장''' || '''일시''' || '''참여자''' || '''배후 활동가''' || '''결과''' || || 편창제사 || 1933.6.1 || 364명의 여공 || 이재유, 김형선 운동선의 양하석 || 패배 || || 중앙상공회사(일명 별표고무) || 1933.8.17 || 150명의 여공, 유종희, 권오상 || [[이순금]], 이현상, 이재유 || 승리(청부제도 부활) || || 소화제사 || 1933.8.22 || 249명의 여공, 유순희 || [[이순금]], 변홍대, 안병춘, 이현상, 이재유 || 일부 승리(교부장 퇴직/이재유 그룹 소속이었던 유해길 해고) || || 고려고무 및 동명고무회사 || 1933.8. || 40명의 여공, 변홍대 || 안병춘, 이현상, 이재유 || 승리(임금인하 취소) || || 조선견직주식회사 || 1933.9.7 || 20명의 여공, 김복금, 이정숙, [[이순금]] || 이현상, 변홍대, 이재유 || 승리(불명) || || 서울고무회사 || 1933.9.19 || 120명의 여공, 허마리아, 지순이, 맹계임, 유순희, 이종희, 권오상 || [[이순금]], 변홍대, 이현상, 이재유 || 패배(연속적 파업으로 감시가 강화된 탓에 수모자 허마리아, 지순이, 맹계임 등 6명과 권오상 검거) || || 종연방적회사 경성제사공장 || 1933.9.21 || 500명의 여공, [[이병희(독립운동가)|이병희]], [[이효정(독립운동가)|이효정]], 이순금, 이종희 || [[이현상]], 변홍대, 남만희, 안승락(기금 모집) || 패배(이종희, 이병희, 이효정, 변홍대, 허마리아, 권오상 등이 검거되어 이재유는 빈민촌 아지트에서 탈출해야 했으며 이듬해 1934.1 이재유가 검거되는 계기가 됨.) || || 용상공작소 영등포 공장 || 1933.9.21 || 100명의 직공, 안병춘, 안삼원, 이순복 || 변홍대, 이현상, 이재유 || 전 직공을 망라하는 대회를 개최하는 이례적인 성과가 있었다.(보통은 주모자가 검거되면 불가능.) 안병춘, 안심원 검거되어 영등포 운동 불가능해짐. || ||<-1> '''평가''' ||<-4> 1933년 부산의 고무 제네스트 등 수개월에 걸쳐 전국에서 연속적 파업이 일어났는데, 서로에게 영향받은 파업들이었다. 식민지 시기 전체를 통틀어서 대표적인 투쟁 사례. ||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이순금여직공.jpg|width=100%]]}}}|| ||'''1935년 8월 24일 <조선일보> '동덕여교 졸업 후 여직공으로 잠신'[br]기사 위쪽 사진이 [[이순금]]으로, 파업에서 굉장히 활약했다.'''|| ||<-5> '''경성트로이카가 주도한 동맹휴업''' || || '''학교''' || '''일시''' || '''재학 성원''' || '''배후 성원''' || '''결과''' || ||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 1933.5. || 김재선, 김영선 등 || 이경선, 최소복, 이재유, 변홍대, 이현상 || 승리(요구조건 승인) || || 조선중앙기독교청년학교 || 1933.6. || || 최소복, 이현상, 변홍대 || 승리(요구조건 승인) || ||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 1933.8.22 || 신진순, 김주원 등 || 이경선 || 실패 || || [[중앙고등보통학교]] || 1933.11. || 한동정 || 최소복, 변홍대, 이현상, 이재유 || 실패(한동정 퇴학) || || 배제고등보통학교 || 1933.12. || 변우식 || 이현상, 변홍대, 이재유 || 실패(변우식 등 검거) || || [[경성여자상업학교]] || 1933.12 || 심계월, 이분성, 차소영, 박온 || 정태식, 최소복, 변홍대, 이현상, 이재유 || 진정됨 ||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이관술동덕여고.jpg|width=100%]]}}}|| ||'''동덕여고보 1932년 졸업앨범. 왼쪽부터 교사 이관술, 학생 [[이순금]], 이종희, [[이효정(독립운동가)|이효정]]이다.''' || 이후 탈출한 이재유는 이순금과 박진홍의 중재로 [[이관술]]을 만났다. >재유 동무와 나와의 평생 잊을 수 없는 전우의 생활이 시작되었는데 (중략) 나는 재유 동무로부터 그의 독특한 여러 가지 자세한 변장법과 생활구실(生活口實) 즉 여관에 들어가서는 어떻게 자고 주막에 가서는 무슨 핑계를 하고 자고 밥집에 가서는 무엇이라 하고 사먹고 하는 등 지하생활에 필요한 각종의 기술을 배웠다. >---- >이관술,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 1946 이재유는 이관술, 박영출과 2기 경성트로이카라고 불리는 '경성재건그룹'을 만들었다. 경성재건그룹에서는 이재유는 출판, 이관술은 학생운동, 박영출은 노동운동 분야에서 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이인행, 이석면, 공성회 등 1기 경성트로이카에 관련된 인물과 접촉하는 책임은 이관술이 주로 맡았는데 그 결과 상당한 정도로 조직이 재건되었다. 이관술이 접촉해서 조직에 가입시키는 등 책임을 맡았던 사람들은 전체 조직원의 30%가 넘는 높은 비율이었다.[*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 199쪽. 판결문에 따른 것으로, 관련자 30명 중 10여명이 이관술이 맡은 사람이었다.]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경성재건그룹지도부.png|width=100%]]}}}|| ||'''경성재건그룹 조직도. 맨 위에 박영출, 이관술, 이재유의 이름이 있다.'''|| 박영출과 박진홍을 포함한 주요 조직원이 체포되자 이재유와 이관술은 피신하여 위장 형제로 같이 살며 3기 경성트로이카라고 불리는 '조선공산당 경성준비그룹'을 만들어 트로이카 방식의 운동을 지속했다.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이관술이재유아지트.png|width=100%]]}}}|| ||'''이재유와 이관술이 살았던 노해면(창동) 아지트, <매일신보> 1937.4.30.''' || 이재유는 경성에 드나들며 조직 재건을 담당하고 이관술은 각종 팸플릿과 기관지의 제작을 책임진다. 기관지 <적기>가 조선공산당재건 경성준비그룹 명의로 발행되었다. 오늘날까지도 다 이루지 못한 선진적인 구호들을 담고 있다. >① 민족적 계급적 정치적 투쟁의 자유 >② 파업 농민의 행동에 대한 경찰 군대의 탄압 반대, 파업 농민투쟁의 자유, 노조 농조 기타 모든 근로자 조직에 대한 무제한의 자유, 부르조아지주에 대한 노동자 농민 투쟁에 조정제도를 적용하는 것과 관헌 재판소 경찰 등이 간섭하는 것 반대. >③ 모든 사형제도의 철폐. >특히 정치범에 대한 사형 절대반대. >경찰횡포에 의한 모든 희생자와 정치범의 즉각 석방. >치안유지법, 출판법, 제령 제7호, 폭력행위취체법 철폐. >④ 근로자의 출판집회언론 등의 무제한의 자유. >정치적 대중집회와 데모의 완전자유, 모든 경영내에서 경영위원회를 창립할 자유, 경영위원회의 승인. >프롤레타리아 자위단의 창설. >⑤ 소작료 지불의 거절, 지주 부르조아에 의한 농민수탈반대. >지주 고리대금업자 은행 크러스트 금융조합에 대한 농민의 모든 차금의 전멸. >잡세 지불거부, 수리조합비 지불거부. >⑥ 노동자 농민을 탄압하는 모든 법령의 철폐. >형평사에 대한 진정한 동정, 부인의 완전한 평등권, 모든 민족적 차별의 철폐. >⑦ 반노예적 농노조건 반대. >기숙사제적 속박 반대[* 이재유가 묘사한 당시 여성 노동자의 환경 중 기숙사에 속박당하는 처지와 관계된다.]. >'''노동자 및 청년에 대한''' 노예제도의 낡은 형태인 '''년기계약제의 반대'''[* 요즘으로 치면 비정규직 반대와 비슷하다.]. >부인, 청년의 이중착취반대. >동일노동에 대한 동일임금 >부인아동의 공연 은묵의 매매제에 대한 형벌 >⑧ 부르조아적 산업합리화 반대 >성인에 대한 하루 '''7시간 노동제''' >16세 미만의 소년에 대한 4시간 노동제 >18세 미만의 청년에 대한 6시간 노동제 >유년노동금지 >'''1주 40시간제''' >1주 1회의 '''임금 전액 지불의 휴일'''과 1년 1회의 '''임금 지불의 2주간 휴가''' >⑨ 임금의 전반적 인상 >아내가 있는 노동자의 '''최저생활비 기준에 의한 최저임금''' 확립 >'''임금에서 공제 선취의 금지''' >임금지불의 지체에 대한 형벌 >⑩ 부르조아 부담의 '''실업 질병 재해 노약 사망의 국가보험'''의 즉각 실시. >---- >이재유와 이관술이 만든 《적기》의 슬로건[* 출처: 김경일,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 p323~324]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