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소결렬 (문단 편집) == 배경 == [[중국공산당]]은 창립 이후부터 [[코민테른]]의 지도를 받으며 당 노선을 정했다. 이런 배경으로 [[쑨원]]과 [[소련]] 외교관 요페의 회담 끝에 소련은 [[중국국민당]]을 원조하고 국민당과 소련이 함께 반제국주의 노선을 펼치기로 함에 따라 [[1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져 공산당원이 개별적으로 [[중국 국민당]]에 입당하는 방법으로 일단 국민당이 [[군벌]]을 물리치고 중국에 통일정부를 세우는 것을 돕기로 했다. 이에 따라 소련의 원조를 받은 국민당군은 광둥성에서 출발하는 북벌([[국민당의 1차 북벌]])을 벌여 각지의 군벌을 격파하고 [[상하이]]까지 함락시키게 된다. 하지만 1927년 3월 [[상하이]]를 점령하고 나자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충돌이 격화되었고 장제스는 [[4.12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공산당에게 선제공격을 가하고 숙청을 단행하였다. 이 결과로 국공합작은 붕괴되고 전체 공산당원의 80%가 처형되면서 국공 양당은 원수지간이 되었다. 공산당은 이에 따라 복수를 위해 소련식 전략을 추종하여 봉기하지만 압도적인 국민당군의 병력 앞에 모두 진압당하고 소련식 전략 대신 "중국 실정에 맞는 혁명 전략"을 추구하는 [[마오쩌둥]]이 특유의 [[게릴라]] 전법으로 대성공을 거뒀다. 이에 따라 [[코민테른]]은 또다시 마오쩌둥이 구축한 해방구에 소련식 전략을 추종하는 소련 유학파 중국 공산당원(소위 "28인의 [[볼셰비키]]")를 내보내고 여기에 전략지도를 위해 [[프룬제 군사대학]]을 나온 [[독일인]] [[오토 브라운]]까지 함께 보내 마오쩌둥의 지휘권을 인수하게 된다. 그러나 이들의 전략은 다시 실패로 돌아갔고 중국공산당은 광서성에서 중국 대륙을 시계방향으로 반바퀴 돌아 산시성까지 도피하는 [[대장정]]을 벌이게 되는데, 이 와중에서 마오쩌둥은 다시 지휘권을 인수했다. 이렇게 경쟁자들의 삽질로 중국공산당에서 신화적인 위치가 된 마오쩌둥은 자신의 사상을 중국 공산당의 지도 이념으로 확립하고 점점 소련의 입김은 중국 공산당 내에서 옅어지게 된다. 하지만 소련이나 스탈린의 권위는 제 아무리 마오쩌둥이라도 쉽게 격하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며 마오쩌둥이 [[국공내전]]에서 승리해서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한 이후에도 외교적으로는 소련의 입장을 충실히 지지했다.[* 물론 중공 정권 수립 후 소련이 여러가지 지원을 해 주긴 했다.] 하지만 [[흐루쇼프]]가 집권 후 스탈린을 격하할 뿐만 아니라 서방과의 화해를 모색하자 아직 미국의 군사적 위협을 강하게 받고 있던 마오쩌둥 및 중국 지도부는 큰 충격을 받았다. 이때부터 점점 [[중소관계]]는 금이 가기 시작했다.[* 다만 중국이라고 마냥 나쁘다고는 볼 수 없다. 몇 년 동안 미군을 등에 업고 싸우던 장제스를 무너트리고 정권을 세운지 10년도 안 된 상황에 [[6.25 전쟁]] 등 여러가지 면으로 미국의 압박을 받는 중국이 소련처럼 미국과 화해하자고 달려들기는 힘들었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