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참호전 (문단 편집) == 서론 == || {{{#!wiki style="margin: -6px -10px" [youtube(PZGSfFFuujw)]}}} || || 영화 [[워 호스]]에서 묘사된 [[제1차 세계 대전]]의 참호전 || 참호는 과거부터 현대까지 애용되는 야전 방어 시설이다. 허리높이 정도의 구덩이만으로도 원거리 화력투사에서 충분한 엄폐를 제공하며 기동에도 큰 방해가 된다. 별다른 자재의 필요 없이 야전에서 쉽게 만들 수 있는 장점 덕에 참호와 관련된 전쟁 기록은 동서고금 막론하고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제1차 세계 대전]]의 참호전은 역사적으로 유독 잔혹하고 찾아보기 힘들었던 환경으로 악명이 높다. 때문에 본 문서에서는 제1차 세계 대전 시기의 참호전을 중점적으로 다룬다. 당시 참호전의 본격적 발단은 1914년 9월 [[제1차 마른 전투]]에서 [[독일 제국군]]의 후퇴였다. 당시의 [[파리(프랑스)|파리]]를 50여km 남겨둘 만큼 엄청난 진격속도를 보였던 독일 제국군은 이 전투에서의 패배로 프랑스를 빠르게 제압한다는 기존의 [[슐리펜 계획]]이 틀어진 채 연합군과의 교착 상태에 빠지고 말았는데, 이에 독일 제국군은 점령 지역 유지와 방어를 위해, 연합군은 독일의 진공을 저지하기 위해 각자 참호의 건설을 시작했다. 철조망과 기관총으로 무장한 참호는 보병만으로 돌파하기 몹시 어려웠고 돌파에 성공하더라도 입는 인명 피해가 극심하다. 예컨데 [[솜 전투]]에서 영국군은 전투 당일에만 '''5만 8천 명'''의 전사자가 발생했는데, 이 때문에 양측은 참호를 우회하려 시도했지만 사람과 말이 주요 이동매체이던 당대의 기동성 부족으로 여의치 않았다. 그렇게 적 참호선을 우회하려 시도하다 돈좌되고, 거기 눌러앉아 참호를 파고 그걸 원래 참호와 잇는 것을 되풀이한 결과 끝내 참호선이 [[북해]]에서 [[스위스]] 국경까지 늘어나는 상황까지 이르게 된다.[* 이렇게 당시 북해부터 스위스 국경까지 참호선을 이은 것을 '바다를 향한 경주'라 부르기도 한다.] [[서부전선]] 모든 곳에 참호가 설치되자 참호를 우회하려는 시도는 불가능해졌다. 결국 적 참호선을 뚫기 위해서는 제 아무리 뛰어난 지휘관과 병사들이 있다 할지라도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으로 취급하며 적 참호의 기관총 앞으로 보병들을 돌격시키는 방법만 남게 됐다. 수천 수만 명의 시체를 쌓으며 간신히 참호 하나를 점령해도 그 뒤에 적 참호선이 겹겹이 쌓여 있어 적의 증원군에게 다시 빼앗겼기 때문에 제대로 된 진격도 어려웠으며, 이런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해 현대에 흔히 쓰이는 공격 수단인 전차, 장갑차, 전투기와 같은 병기들은 전쟁 중반이 지나서야 정말 초보적인 수준으로, 제한적인 수량만 투입할 수 있었다. 결국 서부전선에선 서로 진격할 수도 후퇴할 수도 없는 지지부진한 교착 상태가 지속되었다. 양측 간 참호 사이의 황무지는 진흙탕 죽음의 무인 지대가 되었고, 병사들은 살인적인 [[백병전]]을 빈번하게 치뤄야 했으며, 그럼에도 전선은 단 몇 km조차 변하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찾아보기 힘든 이런 특수한 전장이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계속됐고[* 실제로 승기를 잡았던 연합군조차 독일이 항복하는 그 순간까지 독일 본토에 진입하지 못했다. 이는 전후 독일에서 [[배후중상설]]이 크게 유행하는 원인이 된다. 참혹했던 1차대전에서 파스샹달과 함께 손에 꼽히는 솜므 전투에서 연합군이 밀어낸 거리가 10km인데 파리부터 베를린까지 500km가 넘는다.] 이로 인해 참호전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전쟁 양상과 그 당시의 전후 문화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