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참호전 (문단 편집) === 예상외로 쓸 만했던 참호 === 1차 대전의 주역이 될 각국이 참호의 효율을 몰랐던 것은 아니나, 이들에겐 참호를 적극적으로 사용해야 할 이유가 부족했다. 일단 [[엘랑 비탈]] 교리로 유명한 프랑스군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보불전쟁]]의 복수심에 불타 방어보다는 독일에 대한 복수에 중점을 두었으며 공세를 멈추는 것을 최악의 행위라 여겼다. 나폴레옹 시기부터 이어져 온 공세 중심 백병주의는 보불전쟁과 [[러일전쟁]] 등에서 이미 화력주의에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복수심에 불타던 프랑스군[* 프랑스 입장에서는 프로이센에게 탈탈 털리며 굴욕적으로 패배한 보불전쟁이 끝난지 반 세기도 안 지났을 때다. 일반적인 진급 사이클을 생각해보면 보불전쟁 전후로 사병-위관급 장교(소위~대위)들이 계속 군문에 남았을 경우 영관-장성급에 포진될 시기가 1차대전 즈음이다. 여기에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에 불어닥친 민족주의 광풍을 생각하면 복수심이 없는 게 더 이상할 지경이었다. 당장 [[샤를 드골]]만 해도 보불전쟁이 끝난 지 19년이 지난 1890년생임에도 보불전쟁의 복수와 민족주의 열기에 빠져 사관학교에 입학하여 군문을 시작한 케이스다.]에게는 공세를 멈추고 수비한다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봄이 되면 말 그대로 뻘밭이 되기까지 하는 넓디넓은 영토에서 싸움을 펼칠 러시아군은 참호와 같은 고정 진지를 활용하기 쉽지 않았다. 러시아는 [[러일전쟁]]을 통해 참호와 기관총의 효율을 알고는 있었으나, 러시아에겐 참호를 파고 화력 자원을 갈아넣을 정도로 보급선이나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고 특히 동부전선 특유의 기동전에선 이를 적재적소에 활용하기 어려웠다. 때문에 후술하겠지만, 러시아와 독일의 동부전선에서는 참호전이 크게 나타나지 않았다. 독일 제국군은 러시아 제국과 연합군이 양쪽에서 오는 [[양면전쟁]]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고, [[클라우제비츠]]의 사상과 보불전쟁의 승리 요인을 참고해 최대한 빠르게 전쟁을 끝내고자 했다. 즉 독일군에게 상대의 방비에 맞서 같이 참호를 세운다는 선택지는 사실상 전쟁의 승리를 포기한다는 선언에 가까웠고, 때문에 독일군은 [[슐리펜 계획]]과 같이 꼼꼼한 전투 계획을 기반으로 속전속결식 기동전을 선호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경우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이후 실전을 치른 적이 거의 없다. 보스니아 점령 당시 보스니아에 진주하여 [[보슈냐크인]] 민병대를 제압한 것과 [[의화단 운동]] 때 숟가락 얹기용으로 해군 육전대 조금 보낸 적이 있기는 한데 이걸로 전훈을 얻을 수가 없다. 무엇보다 엄연한 열강의 군대인데도 돈이 없어서(...) 이런 쪽에 대한 대비가 미비했다. [[이탈리아 왕국군]] 역시 [[알프스 산맥]]이라는 천혜의 방어선이 있는 데다가 가상적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전쟁을 하면 오스트리아-헝가리를 향해 공세를 취하는 전략이었기에 참호전에 대한 개념이 부족했다. 예외는 영국군과 벨기에군이었다. 영국군은 두 차례의 보어 전쟁으로 우습게 보던 보어인들에게 엄청난 인적-물적 자원을 낭비하며 개고생을 하던 경험을 기반으로 값비싼 교훈을 얻어 현대전에 빠르게 적응하였고. 벨기에군은 독일군에 비해 수적, 질적 열세인 상황을 극단적인 방어적 교리로 완화하려 했다. 특히나 이 중 벨기에는 프랑스와 독일 간의 전쟁이 시작될 경우, 우회로 확보를 위해 독일이 벨기에를 위협할 것임을 이전부터 알고 있었다. 이를 대비하기 위해 전 국토의 전략적 거점을 요새화해 좁은 영토와 적은 인구수를 효율적으로 사용하고자 했다. 방어적 교리를 중시했던 벨기에의 노력으로, 벨기에 전선의 기지와 참호는 1차 대전 초기부터 독일군의 발목을 잡기 시작했다. [[슐리펜 계획]]으로 최대한 빠르게, 딱 봐도 약해 보이던 벨기에를 통과하려 하였던 독일에겐 벨기에의 저항은 상상도 못한 큰 변수였고, 독일은 벨기에의 요새와 참호를 공략하기 위해 특수 제작한 공성용 중포를 긁어모으거나 비신사적인 전략까지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벨기에군이 참호와 요새로 격렬히 저항한 만큼, 독일군은 [[벨기에 학살|무고한 벨기에 시민들에게 앙갚음했다.]] 그러나 벨기에군은 이미 독일군의 계획을 초장부터 붕괴시켜버렸으며, 병사들을 가다듬고 프랑스와의 전선이 고착화됨에 따라 진격 가능성이 사실상 말소되어버린 독일 역시도 결국 계획에도 없던 참호전에 돌입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 1914년 8월에 있던 몽스 전투에서는 영국군이 참호를 활용해 효율적으로 방어했다. 당시 영국군은 직업군인으로만 이뤄진 정규군이었으며, 그중에서도 몽스 전투에 참전한 영국군은 다수의 식민지 전투 경험을 통해 깊게 판 참호와 [[기관총]]의 위력을 체득하고 있었다. 다른 나라의 군대들이 도랑을 끼고 전투를 펼치며 허리를 겨우 숨길 정도로 참호를 파고 있을 때, 영국군은 독일군과의 첫 번째 전투부터 마을을 요새화하고 몸을 완전히 숨길 수 있을 정도로 참호를 파는 철저함을 보여주었다. 영국군은 몽스 전투에서 독일군의 공세를 매우 성공적으로 방어했고, 사상자 비율 또한 압도적으로 양호했다. 비록 영국군은 프랑스군의 요청으로 파리 사수와 전선 보강을 위한 전략적 후퇴를 했지만, 파리를 향해 거침없이 진격하려던 벨기에 방면의 독일군에겐 벨기에의 방어선과 영국의 참호가 골칫거리였음은 틀림없다. 이렇게만 보면은 독일이 벨기에와 영국에게 호되게 당하고 뒤늦은 교훈을 얻은 것 같지만, 사실 독일은 유럽의 타국에 비해 전쟁 초기부터 참호에 깊은 관심을 보인 나라 중 하나였다. 독일은 1906년부터 기동훈련에 철조망과 참호를 활용했으며, 보어전쟁과 러일전쟁에서 드러난 참호전의 이점을 빠르게 학습했다. 그리고 1914년에는 보병의 군장에 참호 도구가 포함되어 있었다. 독일군이 참호를 건설하지 않은 것은 [[슐리펜 계획]]에 따라 기세를 살려 최대한 빠르게 전쟁을 끝내려고 했던 것이지, 참호를 팔 줄 모르거나 '촌스럽다'고 여겼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파리를 빠르게 점령하려고 계획한 [[마른 전투]]가 실패로 돌아가자, 이들은 전선을 보강하기 위해 다른 국가보다도 더욱 효율적이고 무자비한 참호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후술하겠지만, 충격량을 줄이기 위해 아예 참호를 90도 각도로 파라고까지 했으며, 실제로 독일군의 참호는 열악한 상황 때문에 편차는 있었으나 구조 자체는 1차 세계대전 내내 최상급에 가까웠다.] 이미 승기가 사라지기 시작한 이상 독일군은 더 이상 이기기 위한 진격을 택하지 않았고, 지지 않기 위해 그들은 승기 없는 전쟁에서 그나마 유리한 협상 위치를 얻고자 전쟁이 몇 년이 이어지든 전선에 아예 틀어박혀 있을 작정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