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참호전 (문단 편집) === 우연과 악재가 만들어낸 참호전선 === 어디까지나 전략적 거점의 방어 수단에 불과하던 참호의 규모를 참호'전'이라는 일련의 대전략으로 확대시킨 계기는, 문서 상단에 서술된 마른 전투의 후퇴였다. [[타넨베르크 전투]]의 승리 덕분에 일약 스타로 떠오른 독일의 장군 [[에리히 루덴도르프]]는 [[동부전선]]에 집중해서 [[러시아 제국]]을 우선 무찌르자고 주장했다. 그에 따라 제1차 [[이프르 전투]]에서 별다른 성과를 못 보였던 서부전선의 병력 일부가, 고전을 겪는 오-헝군을 돕는 동시에 동부전선에서의 주도권을 강화하기 위해 동부전선으로 파견되었다. 서부전선의 독일군 병력이 줄어든 만큼, 프랑스와 영국에겐 이보다 좋은 공세의 기회는 없었다. 독일군의 공세를 막는 데만 급급하던 프랑스군은 벨기에 전선을 유리하게 정리하고 싶었고, 이에 14년 12월 동계공세를 개시했다. 하지만 화력의 부족으로 독일군을 밀어내는 데는 실패했다. 영국군은 포탄 부족과 포병의 유연하지 못한 지원 사격 때문에, 기껏 거점을 빼앗았다가 독일군에게 다시 내주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프랑스군은 예비병력의 활용에 문제가 있어, 일선병력이 괴멸되고 나서야 후방병력이 전선에 도착하여 점령한 거점을 쉽게 내주곤 하였다. 또한 전쟁 막바지인 1918년에서야 연합사령부를 구성할 만큼, 영국과 프랑스는 하나의 전쟁을 별개로 치르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약속된 화력 지원이 이뤄지지 않거나, 공세를 별개로 진행하여 각개격파당하는 일도 허다했다. 반면 독일군은 부족한 인력으로 넓은 전선을 방어해야 하는 만큼, 참호를 더 깊게 파고 진지를 강화했다. 마른 전투가 실패로 끝난 뒤, 1914년 9월 14일 [[소 몰트케|몰트케]]는 현재의 전선에 요새를 건설하고 방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비록 마른 전투가 실패했지만, 전략적 후퇴를 하기엔 벨기에 전선이 지니는 가치가 너무나 중요했다. 양측 모두 이곳을 내어준다면 진격 루트가 [[알자스-로렌]]이나 아르덴 숲을 통한 선택지밖에 없었다. 하지만 전자는 [[베르됭 전투]]에서 알 수 있듯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했기에 치열한 접전이 펼쳐진 곳이며, 후자는 험난한 지형의 아르덴 숲을 통해 진격해야 하는 부담이 따르는 만큼 진격로로 선택하기 어려웠다. 결국 독일군은 협상군의 거친 공격을 끈질기게 방어해 냈고, [[서부 전선 이상 없다|지도상으로 봤을 땐 아무런 변화가 없는 상황]]만 계속되었다. 또한 적이 참호를 우회하지 못하도록 해야 해서 참호의 규모는 점점 커졌고, 독일과 협상국의 참호는 [[북해|바다]]로까지 이어졌다. 참호의 규모가 증가하면서 필요한 인력이 늘어나는 것은 당연했고, 더 이상 참호와 요새를 우회할 길을 찾기가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전선을 돌파하기 위해선 참호 전선을 뚫을 수 밖에 없었는데, 당시의 기술로는 참호 돌파 시도에 막대한 포탄과 병력이 필요했던 만큼, 전쟁은 얇은 참호선 곳곳을 뚫기 위한 참혹한 국지다발전 양상으로 계속 이어졌다. 한편 1915년 이탈리아가 뒤늦게 전쟁에 참전하자, 또 다른 양상의 참호전이 펼쳐지게 되었다. 1915년까지 눈치만 살피던 이탈리아는 기습을 통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를 공략하려 하였지만,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오-헝군의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실패하였다. 수 차례의 [[이손초 전투]]는 큰 성과를 보이지 못했으며, 평지와 요새에서 펼쳐지던 전투는 갈수록 교착 상태에 빠져 험난한 알프스 산맥에서 전선이 형성되었다. 산악지대는 방어에 유리한 것이 장점이나, 물자 수송과 거점 형성에 어려움이 있어 장기적인 대치 상황에 부적격한 것이 큰 단점이다. 그러나 영토를 한 치도 내주기 싫었던 양측은 알프스 산맥의 험준한 봉우리를 따라 [[곡괭이]]를 이용해 암벽에 참호를 건설하고, 산비탈에 [[케이블카]]를 건설해 물자를 수송하고, 어떻게 올라갈지도 모르겠는 봉우리에 야포를 매달아 인력으로 끌어올리는 근성까지 보였다. 이탈리아 전선에서의 전투는 어떻게 보면 오히려 서부전선보다 더 처절했다. 포격이 일어날 때마다 포탄에 맞은 바위 파편이 사방으로 튀어 큰 인명피해를 냈고, 물자 보급의 어려움과 더불어 [[고산병]]과 알프스 산맥의 혹한은 병사들이라도 쉽게 버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거기다 '하얀 금요일'이라고 불린 1916년 12월 13일에는 약 만 명이 넘는 병사가 [[눈사태]]로 인하여 죽음을 맞기도 하였다. 이날 벌어진 참상은 적을 대량몰살하기 위해 양 측이 서로에게 곡사포를 쏘아 인공적으로 눈사태를 유도했다는 점에서 더욱 비극적인 죽음이었다.[*출처 Reader's Digest Association, "Great Disasters : Dramatic True Stories of Nature's Awesome Powers", 1989.] 사실상 이탈리아 전선의 참호전은, 참호전 + 고산지대라는 최악의 환경에서도 양국군이 억지로라도 뭔가를 쥐어 짜내고자 한 현실도피성 발버둥인 셈이었다. 이때 이탈리아군은 타국에 비해 군법 위반에 대한 처벌 강도가 훨씬 높았는데, 이는 열악한 환경에서 군대의 사기를 억지로라도 유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추정된다. 결국 이탈리아 전선 개전 이후 2년 넘게 양군은 서로의 방어선을 제대로 뚫지 못해 대치만 계속 이어갔고 양군이 제대로 승부를 보게 된 시점은 [[카포레토 전투]]로 전선이 이탈리아 영내의 [[베네토]] 평원으로 옮겨온 마지막 1년이었다. 이러한 참호전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본 것은 병사 개개인이었다. 가장 먼저 식량이 크게 줄어들었다. 1914년만 해도 [[톱밥]]과 [[분필]]이 든 말라 비틀어진 빵을 먹는 일은 없었다. 분필 가루를 넣은 이유는 빵을 흰색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서였다. 참호를 돌파하기 위해 몇 날 며칠간 광범위한 포격을 가하다보니 취사 시설이 전선과 점점 멀어지며 규칙적인 식사도 점점 힘들어지고, 포탄과 [[독가스]], 그리고 저격수로 전우가 죽어가니 사기는 바닥을 칠 수밖에 없었다. 대규모 공세의 계획일이 다가오면 적이 쏘는지 아군이 쏘는지 알 수 없는 포탄세례가 지속되었으며, 기관총 세례를 뚫고 적의 참호를 점령하더라도 통신의 미비로 아군의 포탄이 날아오는 경우도 허다하였다. 참호 근무 부대를 교대하는 제도는 전쟁 중 후반기에서야 들어섰는데, 이로 인해 제대로 된 휴식과 영양 섭취가 불가능한 병사들의 위생 상태는 매우 열악하였다. 비가 내리면 땅은 발이 푹푹 빠지는 진흙밭으로 변했고, 참호에 고인 빗물에 발을 담그고 있다가 병사들이 [[참호족]](Trench Foot)이라는 병에 걸리기도 했으며,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는 포탄과 공격해오는 적에 대한 압박감으로 [[셸쇼크]](Shell Shock)라는 일종의 정신공황 상태에 빠지는 경우도 있었다. 아군 참호와 상대편 참호 사이는 '''[[무인지대]]'''라고 불렀는데 그 사이에는 살아있는 것이라곤 시체를 파먹는 쥐와 벌레뿐이었으며, 미처 수습되지 못한 병사들의 시체와 절규를 내뱉는 부상자, 포탄이 떨어진 자리에 빗물이 고여 시체와 병균, 벌레와 독가스를 머금은 독극물로 채워진 "죽음의 구덩이"와 이런 무인지대를 바라보며 참호 속에서 총소리와 포탄 소리에 미쳐가는 병사들이 널려 있었다. 다만 가시성이 떨어지는 밤이 되면 무인지대에서도 병사들이 활동을 했다. 적 참호로 주기적으로 정찰을 떠나고, 전언을 전하거나 철조망과 전선 등을 다시 정비하였으며, 그때까지 살아서 신음하고 있는 운 좋은 부상병을 수습해 후송해오기도 하였다. 또 저격수들은 보통 동틀 무렵 무인지대로 올라가 무인지대를 기어다니며 부상병들을 구하거나 철조망 등을 수리하다 미처 참호로 귀환하지 못한 적군을 상대로 저격 활동을 수행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