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채명신 (문단 편집) === [[6.25 전쟁]] === 빨치산을 소탕하던 나날이 계속될 즈음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시작된 북한군의 남침을 전해들은[* 본래 계획대로라면 그가 속한 25연대는 6월 15일까지 [[의정부시|의정부]]로 이동해 [[경기도]] 북부를 담당하던 (구)수도사단(현 7사단)의 예비 연대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병영 문제로 가지 못한채 빨치산이나 상대하고 있었던 것. 이 때문에 (구)수도사단은 예비 연대없이 부실한 장비로 북한군 보전(보병과 전차가 함께 다니는 것) 합동군을 상대해야 했다. 물론 뒤늦게나마 25연대 일부 병력들이 열차 편으로 의정부로 오기는 했으나 [[축차투입]] 속에 하나하나 궤멸당했다.] 채 중대장과 병력들은 완전히 포위당하기 전 산을 타고 내려가 7월에 8사단에 합류, 낙동강 이남에서 벌어진 [[안동·의성전투]]에서 21연대 1대대 중대장(곧 대대장대리가 됨)으로 부임해 [[영천 전투]]를 치른다. 이후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돼 한창 북진을 하던 중 1950년 12월 [[청천강 전투]]에서 [[중국 인민지원군|중공군]]의 물량 포위전에 부대가 와해되었을 때 대대원들 중 50여 명을 제외한 나머지를 먼저 내려가게 한 뒤 포위당한 김영노 연대장과 3대대장인 문용섭 소령을 구해낸다. 그 후 70여 명을 재편성해 채명신의 척후분대와 문용섭의 경호소대로 나눠 국군복을 입은 상태에서 능선을 타고 남하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공산군을 마주칠 확률이 높았는데 어수룩하거나 현지 사정을 모르는 중공군은 간단한 인사나 [[중국어]] 회화로 보내고 경계심이 많고 소수일 경우 은밀히 처치하며 내려갔다. 이 와중에 북한 주민들이 국군복을 미심쩍게 여길 경우 "남조선 [[군복]]을 입고 특작 중인 인민군"이라고 둘러댔다고 한다. 그러나 남하 도중 심신이 지친 연대장이 "닭 1마리만 먹고 가자"며 주저앉는 바람에 별 수 없이 협박조로 마을 하나를 점거했다. 그러나 빨리 배를 채우고 빠져나가야 하는데도 연대장이 계속 꾸물대자 권총을 겨누고 "연대장님 때문에 떼죽음 당할 수 없습니다"라며 강권해 이동을 하기는 했지만 채명신의 우려대로 추격조가 와서 뿔뿔이 흩어지는 등 난리가 났고 연대장의 행방을 알지 못한 채 문용섭을 포함한 8명만 남았다. 그러나 얼마 안가 일대로 중공군이 지나가는 통에 문용섭과도 헤어졌고[* 나중에 간신히 생환하는 데 성공한다.] 그 뒤 정용식 상사, 김영호 중사와 남하하다 민가에 들어가 주린 배를 채우던 중 주민 제보로 북한군이 집을 포위하자 전의를 잃고 나머지는 투항하라고 하고 자신은 권총으로 [[자살]]하려고 머리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으나 불발이 났고 직후 정용식이 권총을 쥔 손목을 억세게 내려치며 "죽지 말라는데 왜 죽습니까!"라며 만류해 이를 하늘의 뜻이라 생각하고 마음을 고쳐 방으로 들어오는 북한군을 사살하고 다른 병사들의 [[총알]] 세례를 피해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