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채병덕 (문단 편집) === 2대 육군 참모총장 === 그러다가 1949년 5월 4일, 6여단(현: [[제6보병사단]]) [[제8보병여단|8연대]] 1대대장 표무원과 2대대장 강태무가 5월 2일에 훈련을 핑계로 병력들을 이끌고 [[월북]][* 다만 이는 두 대대장만 밀약한 것이고, 예하 병력들에겐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아 몇몇 중대는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남쪽으로 탈출하기도 했다. 이 때 강태무 대대에서 [[중대장]]으로 복무 중이던 [[정승화]]도 작전에 참가하겠다고 자청했지만 강태무가 "다 나가면 부대는 누가 지키나? 자네는 남아있으라"며 거절하였다. 덕분에 그는 대한민국 육군 장교로 계속 복무하며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육군참모총장]]까지 임명되는 영예를 누릴 수 있었다. 물론 [[12.12 군사반란]]에 휘말려 이등병으로 불명예 전역하는 치욕을 겪었지만...]하는 [[강태무 표무원 월북 사건|대사건]]이 터짐에 따라 5월 8일 이응준이 책임을 지고 육참총장에서 물러나게 되었는데 그 후임으로 채병덕이 5월 9일 임명되었다. 국방부 참모총장직에는 후임자가 임명되지 않았으므로 그 직위 자체가 폐지되었다. 5월 16일, 국방장관 [[신성모]]를 비롯한 군부의 주요 인사들이 참여한 가운데 채병덕이 정식으로 육군참모총장에 취임했다. 채병덕은 다음과 같은 취임사를 남겼다. >"오늘 평소 존경하며 우리 군의 원로이신 이응준 총장의 뒤를 이어 불초 본인이 제2대 총참모장의 중책을 맡게 되었다. 그간 전임 총장의 영단으로 단행된 대숙군공장으로 군내 좌익 세포망은 점차 붕괴되기 시작하였으나, 지금 북한 괴뢰 집단은 대남 유격대를 대거 남파하여 온갖 수단 방법을 다하여 사회적 혼란을 조성시키며 신생 대한민국의 국기마저 뒤엎으려 한다. 이에 본관은 전임 총장의 지휘방침을 이어받아 계속 대숙군을 전개하여 반공을 국시로 한 군의 기강을 확립하고 국가 민족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한다. 전 장병들에게 국민들로부터 신뢰받을 수 있는 충성된 군인이 되어 행동과 실천으로 국가수호에 전진할 것을 강조하는 바이다." 채병덕은 5월 12일, 육군총참모부장제를 폐지하여 행정참모부장, 작전참모부장직을 신설하여 신태영 대령과 정일권 준장을 각각 임명하였다. 그리고 국군조직법 3하 12조에 의거하여 전국의 6개 여단을 사단으로 승격시키고 옹진지구전투사령부에 1연대과 21연대를 통합하여 8사단을, 서울 용산에 2연대와 7기갑연대를 통합하여 수도경비사령부를 창설함으로 총 8개 사단을 보유하게 되었다. 그리고 1949년 8월 15일에는 북한군 귀순장병 600명을 바탕으로 육군보국대대를 창설하였으며 육군본부의 항공대를 확충하여 공군으로 독립시켰다. 또한 최덕신, 최홍희, 심홍선, 장은산, 강관용, 이승호 등 6명을 미보병학교와 포병학교로 유학시키고 1949년 7월 1일 육본직할 육군참모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을 겸했다. 또한 육군정보학교, 군의학교, 경리학교 등을 만들어 다양한 병과 교육을 추진했다. 또한 1949년 5월부터 9월까지 2차 숙군을 실시, 현역장병 215명, 군관계 민간인 30명을 적발하여 중앙고등법회의에 송치하여 국군 내부의 남로당을 근절하였고 6월 25일 대통령령 134호에 의거하여 국군징계령을 제정, 공포하였다. 또한 8월 20일에 각 지구에 위수사령부를 설치하여 대인안전보호의 책임을 지고 유사시에 일반행정 지휘권을 장악하게 하였다. 공비 토벌에 있어서도 1949년 9월 28일, 단양에 태백산지구전투사령부를 설치하여 충청도의 공비를 토벌하게 하는 한편 개성, 옹진에서의 북한의 무력도발을 분쇄하였다. 허나 1949년 가을에 발생한 명태 사건으로 1사단장 [[김석원]] 장군과 격렬히 충돌하고[* 1946년 2월 미소공동위원회 협의에 따라 1949년 3월까지 남북교역이 지속되었다. 그러나 남측에서는 통제기구도 없이 의약품, 전기제품을 비롯한 군수물자가 북으로 보내졌으며, 북측에서는 교역통제기구를 만들어 명태, [[오징어]] 등 식료품만 남쪽으로 내려보냈다. 1949년 1월 육군 제1[[사단장]]에 취임한 [[김석원]] [[준장]]은 이에 분개하여 남북 교역장에서의 교역을 중단시킨다. 그러던 4월 중순 어느 날 김석원 준장은 이북에서 토성 쪽으로 넘어오는 명태가 실린 트럭 20여 대를 압류한다. 이를 보고받은 채병덕 총참모장은 압류물자를 화주에게 돌려주라는 명령을 수차례에 걸쳐 하달하나, 김석원 준장은 이에 불복종하였다. 오히려 명태를 팔아 [[음료수]], [[과일]], [[사탕]] 등 [[장병]]들의 부식을 구매해 설악산 전투에 투입되었던 병사와 노무자들에게 배급했는데, 이는 [[대한민국 대통령|대통령]]으로부터 직접 남북교역을 잘 단속하라는 분부도 받은 데다가, 일본 육사 한참 후배인 49기 출신 채병덕이 탐탁치 않았기 때문이다. 마침내 두 사람의 싸움은 [[경무대]]로 옮겨진다. 그러나 채병덕 총참모장 역시 군 작전상 첩보 수집활동을 명목으로 이승만 대통령에게 일부 교역 수행의 허가를 받은 상태였으므로, 이 대통령은 김석원 준장과 채병덕 총참모장을 모두 버릴 수 밖에 없었다. 전쟁 발발 후에는 두 사람의 관계가 역전되는데, 초기부터 정부의 무리한 사수 명령을 그대로 받들려는 채병덕과, 서류만 있고 제 위치에 편제되어 있지 않은 사단들을 갖고 뭘 하려나며 현실을 지적하는 [[김홍일(군인)|김홍일]] 이하 숙장들이 충돌하였던데다, 실패를 거듭한 채병덕과 달리 이들 노장들은 혁혁한 전공까지 세웠기 때문이다.] 결국 1949년 10월 1일 현직에서 해임되어 예비역에 편입되었다. 허나 병기분야에서 국군 내부 최고 전문가였기 때문에 병기행정본부가 신설되자 2달도 안되어 12월 14일, 병기행정본부장에 임명됨으로 현역에 복귀하였다. 이에 대해서 다행스러워 하는 여론도 있었으나 같이 해임된 김석원은 복직하지 않았는데 채병덕만 복직된 것에 대해서 비난하는 여론이 있었고 이 때문에 채병덕은 실의에 빠져 1950년 봄에 군에서 은퇴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이종찬 등이 얼마 안가 그가 육참총장에 복직하게 될 것이라고 만류하여 군에 잔류하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