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천도/사례 (문단 편집) ===== 고구려 ===== [[졸본성]][* 공식적으론 [[동명성왕]]이 최초로 고구려의 터전을 잡은 성. 다만 수도로써의 역사가 짧았고 나라의 기틀도 덜 잡힌 상태에서 수도였던 탓에 [[존재감]]은 [[병풍(은어)|병풍]] 그 자체이며, 또한 고구려 관련 역사책들이나 학교에서 고구려 관련 역사를 배울 때도 졸본성은 언급도 아예 안 하거나 설사 하더라도 대충 쪼금만 얘기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상당하다.] → [[국내성]]([[유리왕]]) → [[평양성|평양]][* 남진정책의 일환으로 천도했다.]([[장수왕]]) 사실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를 읽다 보면 고구려의 도읍이 중간에 여러 번 옮겨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현대적 의미의 천도는 장수왕 대의 평양 천도이며, 이를 제외한 다른 천도는 대략 '천도 미만, 이궁(移宮) 이상' 정도의 뉘앙스라고 볼 수 있다. 왜냐, '''고구려는 평지성 - 산성을 동시에 쓰는 이중수도 체제였기 때문'''. [[삼국사기]]에 의하면 198년(산상왕 2년)에 [[환도성]]을 축조한 뒤 209년에 이곳으로 천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246년 고구려의 서안평 공격에 대한 응징으로 [[위나라]]의 [[관구검]]이 대대적으로 고구려의 영토를 침공하면서 함락되어 파괴되었는데, [[동천왕]]은 환도성의 백성들을 보기 부끄럽다고 하여 평양성으로 옮겼다고 전한다. 다만 대체로 환도성은 평지의 국내성 인근에 있는 산성자산성으로 보는 게 정설이며, 여기에서 언급된 평양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환도성 인근'''의 성으로 보는데, [[삼국유사]]에서 [[안시성]]을 평양성으로 비정하고 있지만, 정확치는 않다. 어쨌든 이후 국내성으로 다시 돌아왔다가 [[고국원왕]] 때 [[전연]]의 침략에 대비해 환도성을 다시 수축하고 도읍을 옮겼지만, 342년 전연의 침공으로 함락당하고 만다. 보면 외적의 침략으로 국내성과 환도성을 수시로 오간 것으로 보이는데, 국내성은 평지성이고 환도성은 인근의 [[산성]]이기 때문에 크게 보아 국내에서 수백년간 도읍했다는 말은 틀린 말은 아니다. 이후 국내성으로 옮겼다가 장수왕대에 [[평양성]]으로 완전 천도하게 된다. 장수왕은 평지성인 청암리토성, 산성인 [[대성산성]], 왕궁인 [[안학궁]]을 지었는데, 이후 평원왕이 안학궁 서쪽에 나성을 두른 [[평양성|장안성]]을 건설하고 그 곳으로 천도하여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장안성을 도읍으로 삼게 된다. 즉 졸본성 - 국내성 - 평양성이란 고구려 역대 수도의 변천은 큰 줄거리를 말한 것이고, 국내성 기간 중에 국내성, 환도성, 평양성을 자주 오갔으며, 평양성으로 천도한 이후에도 안학궁+대성산성, 청암리토성 체제였다가 평원왕이 안학궁 서쪽에 나성을 두른 장안성을 축조하고 수도를 옮겼다고 볼수 있다. 장안성 이전까지는 고구려 특유의 평상시에는 평지성, 전시에는 산성으로 옮기는 체제에 따른 것이며, 장안성을 축조한 이후부터는 우리에게 익숙한 일원화된 도성 체제가 구축된 것.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