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천명제 (문단 편집) ==== 이성량 ==== 위에서 보았듯이 누르하치는 명나라의 요동총병 [[이성량]] 휘하에서 성장한 인물이었다. 이성량이라는 인물은 '''‘요동왕’'''이라는 별명을 가졌을 정도로 요동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참고로 이 [[이성량]]의 아들이 바로 [[임진왜란]]때 [[조선]]에 파견된 [[이여송]]이다.] 누르하치는 이성량의 부대내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이성량의 양아들이라는 소문도 퍼져 있을 정도로 이성량과 사이가 좋았다. 명나라는 만주를 장악한 이래 [[이이제이]]와 분할지배를 통해 여진족을 분열시키고, 서로 싸움을 붙였으며, 일부 여진족은 명나라편에 붙어서 동족을 공격하거나 [[북원]](몽골) 원정에 동원되었다. 이성량은 능력이 출중해서 여진족을 분열시키고 [[북원]]의 좌익을 견제하는 공작을 성공적으로 해냈으며, 특히 [[북원]]의 대칸인 [[차하르]]부의 투먼 칸의 공격을 몇번이나 저지했다. 그래서 당시 암군인 신종 [[만력제]]의 재위 기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명나라의 북방은 안정되어 있었다. 이렇게 이성량이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여진족]]들은 이성량을 두려워했고, 누르하치조차 [[이성량]]이 좌천되기 전까지는 명나라에 직접적으로 도전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성량은 만주를 영지화하고 전횡을 일삼았으며, 사치도 엄청났다.[* 자택에는 기생이 2,000여 명이나 있었고, 정원의 너비가 10리에 달했다고 한다.] 이렇게 이성량은 점점 독립 군벌처럼 행세하기 시작했다.[* 사실 이런 행태는 중국 역사를 통틀어 자주 일어나던 일이다. 이렇게 하다가 중앙 권력이 약화되면 바로 이런 군벌들이 중앙 권력에서 독립하여 대륙 전역에서 할거하곤 했다. 《[[삼국지]]》가 바로 이런 행태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당시 [[만력제]]가 등극하고 있었음에도 군비를 마음대로 쓰며 만주를 개인왕국화하는 이성량의 행태를 북경의 조정에서 두고 보기 힘들어졌다. 게다가 이성량은 휘하 여진병을 이용하여 왜란으로 약화된 조선을 침공해 [[전주 이씨]]를 대체하고 한반도를 지배할 생각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본인의 뿌리가 한국계인 [[성주 이씨]]인 것을 어느 정도 의식은 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이성량의 행태가 너무 심각하여 결국 [[1591년]] [[웅정필]]에게 탄핵되어 자리를 잃었다. 이후 어떻게 다시 복직하여 요동으로 돌아갔으나 임진왜란이 끝난 후인 1608년 다시 재탄핵되었고, 베이징에 돌아와 사망했다. 그러나 이렇게 이성량을 해임한 것은 결과적으로 명나라의 섣부른 판단이었는데 이성량이 아무리 타락했다고 하더라도 몽골이나 여진 같은 전투민족들을 제대로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명 조정은 이성량을 파면시키고 경험도 없는 사람을 보내버렸다. 새로운 인사들도 본국에서 들었던 것과 달리 예상외로 강한 누르하치의 세력에 놀랐고, 함부로 제압하지 못했다. 여기서 누르하치의 선택은 대적도 아닌 뇌물이었다. 누르하치는 해서여진과의 전쟁 중에 적을 동시에 여럿 만드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았고, 일단 명나라에게는 굽신거리면서 이성량의 후임자들에게 뇌물을 바쳐 명나라 조정을 안심시켰다. 게다가 건주여진과 해서여진이 싸우는 것은 명나라가 보기에는 그동안 여진족을 분열시켰던 [[이이제이]]책이 먹혀들어간다고 생각하는 면도 있어서 그다지 경계하지 않았다. 하지만 누르하치는 예전의 건주-해서 전쟁과는 달리 아예 해서여진을 복속 및 합병하려고 했고, 명나라는 여기서 누르하치의 대전략을 읽는 데 실패했다. 그래도 명나라는 당시의 건주여진 '''따위는''' 충분히 제압할 힘이 있었지만, 불운했던 것은 건주여진이 이렇게 누르하치 휘하에서 흥기할 때 쯤, '''[[명나라]]가 [[만력 3대정]]에 휘말린 것이었다.''' 이 '만력 3대정'은 누르하치에게 있어서는 천재일우로 이후 명나라의 시선은 전부 이 3대정에 집중되어 누르하치는 아웃 오브 안중이 되어버렸다. 만력 3대정 중에 건주여진은 해서여진 및 야인여진을 모두 통합했다. 이성량은 두 번이나 좌천되었어도, 누르하치가 유일하게 두려워하고 존경한 명나라 장군인 듯하다. 이성량이 죽은 다음에야 누르하치는 소위 "7대한"을 이야기하며 명나라에 정식으로 선전포고했다. 또한 훗날 조선으로 망명하지 않고 청나라에 남은 이성량의 후손들은 한인 [[팔기군|팔기]]에 소속되어 청나라에서도 대접을 받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