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천부경 (문단 편집) === 위작이라는 주장 === [[신채호]]는 1925년 [[동아일보]]에 연재하던 조선사연구초에서 '''"서적의 진위와 그 내용의 가치를 판정할 안목이 없으면, 후인 위조의 천부경 등도 단군왕검의 성언이 되는 것이다." '''라고 하였으며, 1931년 [[조선일보]] 학예란에 연재하던 조선상고사에서 '''"우리나라는 고대에 진귀한 책을 태워버린 때(이조 太宗의 焚書 같은)는 있었으나 위서를 조작한 일은 별로 없었으므로, 근래에 와 천부경(天符經), 삼일신고(三一神誥) 등이 처음 출현하였으나 누구의 변박(辨駁)도 없이 고서로 인정하는 이가 없게 되었다."'''라며 위작이라 주장했다. 민족이라는 실체적 현상을 이념적으로 거부하는 세계시민주의, 범민주의 도그마에 신채호는 힘을 실어 주었기 때문에, 그의 위작 발언은 천부경을 위작으로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기반이 되었다. 역사연구에서 신채호가 범한 여러 오류들이 그의 권위를 빌어 학계에 대한 공세의 도구가 된 것과는 반대의 사례로 꼽힐 듯하다. 천부경을 진본으로 지지하는 사람들은 조선사연구초를 연재하고 6년 뒤에 조선상고사를 썼으므로, 조선상고사의 문장을 근거로 '사실 단재는 조선사연구초 당시에는 천부경을 위작이라 부정했으나, 조선상고사 연재시에는 이를 인정하고 위작설을 철회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조선사연구초나 조선상고사나 단재가 같은 시기에 저술했다는 것이 독립운동사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또한 '''이 말은 조선상고사 총론의 '위서(僞書)의 판별과 선택에 대하여'에도 그대로 실렸다.''' 오히려 연재 당시의 조선상고사 내용 자체의 진위 여부도 애매하다. 연재 당시 신채호는 뤼순 감옥에서 수감생활 중이었고, 신채호가 쓴 원고를 조선일보에서 가져다가 연재한 것이다. 오히려 신채호는 연재를 원하지 않았는데, 아직 완성되지 않아서 더 손을 보아야 하는 원고였기 때문이다. 즉 연재 과정에서 신채호의 의도와는 달리 내용이 가필되었거나 삭제, 변형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http://www.newstof.com/news/articleView.html?idxno=1584|이를 다룬 분석 기사]] 신채호는 민족사학자이기는 하지만 [[신숙주]]의 18대 손이자 [[성균관]]에서 수학한, 이른바 프로페셔널 학자 집안 출신이다. 신채호가 보기에는 아마추어 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선전하는 천부경을 인정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신채호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으로 보는 민중에 근거한 사관을 따랐으므로, 천부경을 인정하기는 더욱 어려웠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