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철종(조선) (문단 편집) == 여담 == * 강화도 시절에 대해 흥미로운 기록이 있다. [[가톨릭]] 신부 [[최양업]]의 편지에 따르면 민간에 알려진 바로는 철종이 친척 집에서 종 노릇도 해봤고 매양 주인에게 채찍으로 맞았다고 한다. >현재의 임금님은 사냥꾼으로 불렸고, 자기 친척 집의 종 노릇을 했습니다. 장날이 되면 가장 값싼 일꾼 노릇을 했고, 인정머리가 털끝만큼도 없는 주인의 채찍을 거의 매일 맞았습니다. > >[[헌종(조선)|전 임금님]]이 [[죽음|승하]]함에 따라 군인들 한 패거리가 [[강화도]]에 몰려가서 그를 [[철종(조선)|현재 임금님]]으로 모셔왔습니다. 그런즉 [[조선왕조]]의 창업 이래 500년 역사상 [[조선/왕실|왕가]]에 이와 비슷한 사례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왕족의 공개된 수치와 치욕을 정화할 필요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청나라|중국]] [[황제]]의 권위로 그러한 불명예를 척결하고 [[조선]] [[조선/왕사|왕]]에게 영예(榮譽)를 회복시켜 주기를 청하는 사신을 중국 황제에게 보낸 것입니다. >---- >-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프랑스인 르그레주아 신부에게 보낸 편지 中'''[* [[http://www.paxkorea.kr/bbs/zboard.php?id=3002&page=2&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49|#]].] 다만 최양업 신부가 조선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맺은 것은 아니고 그렇기에 어디까지나 [[카더라]]를 인용한 것에 불과하므로 전적으로 신뢰하기는 곤란하다. 당시에 그런 소문이 돌았다는 것은 사실이더라도 그 소문의 신빙성은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실제 [[귀양]] 제도에 대해 살펴보면 이는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임을 알 수 있다. 지방 [[관청]]에서 관리하고 식량을 대주고 동향을 보고하는 사람이 항상 있었는데 이를 보수주인(保授主人)이라고 한다. '''유배'''의 형벌을 받은 이들을 감시 혹은 관리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철종은 친척이 극히 귀해 후에 외가 친척을 사칭한 인간도 생겼을 정도인데 무슨 친척 집에서 일한단 말인가. 다만, 식량을 대주는 대신 일을 시키거나 혹은 제대로 식량을 대주지 않아서 일을 해야 하는 경우는 많았다. 마치 [[고구려]]의 [[미천왕]]과 인생 역전이 비슷한데 어쩌면 미천왕의 얘기에서 차용했을 수도 있다. 물론 당시 조선에 이런 소문이 돌았다는 것은 당시 사람들에게 철종이 어떻게 인식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단서라 할 수 있으며 신빙성과는 별개로 나름 의미있는 [[사료(역사)|사료]]라고 할 수 있다. 강화도 시절은 당대 백성들 사이에서도 유명했는지 덕지덕지 살이 붙어서 과장된 루머가 돌아다니고 있었던 것. 잠저시절을 겪어본 [[조선/왕사|왕]]은 많아도 농민까지 겪어본 왕은 철종이 유일하다. * [[강화도]]에서 엉겁결에 [[조선/왕사|왕]]이 되었다는 사실과 빈농으로서 산 전력 때문인지 [[강화도]]에서 자란 [[까막눈]] 왕으로 기억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출생지는 수도 [[한성부|한양]]으로 기초교육은 받았기 때문에 [[문맹]]은 아니었다.《[[조선왕조실록]]》의 행장에 의하면 4세에 《[[천자문]]》을 이미 배웠으며 즉위 이후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이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근년에 통감 2권과 소학 1권, 2권을 읽었다"고 철종 본인이 직접 이야기한 바 있다. 천자문 이야기는 행장에 기록된 것이라 4살에 배웠다는 것은 띄워주기였다 해도 즉위 시점에서 이미 공부한 상태였던 것은 사실이었다. 또한 [[유배]]당한 것은 14세가 되었을 때의 일([[1844년]], 헌종 10년)이고 [[1849년]](헌종 15년)에 [[조선/왕사|왕]]으로 즉위했기 때문에 실제로 [[강화도]]에서 산 기간은 겨우 5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다만 14세부터 청년기를 [[강화도]]에서 보냈기 때문에 아주 억지스러운 수식어까지는 아니라고 볼 수도 있다. 보통 기억이 희미한 7~8살까지를 빼면 왕이 되기 전의 사실상 반을 [[강화도]]에서 보냈다고 볼 수도 있으니 말이다. 사실 14살부터 19살까지면 중1부터 고3 나이까지인데 이 시기를 농사하면서 지냈다면 그냥 농사꾼이나 다름없다. 《[[천자문]]》, 《통감》, 《소학》은 모두 초급 교육에나 쓰이던 교재들이라 19살 기준으로는 부족한 면이 많고 아버지의 사망이나 강화도로 유배되는 등의 사정으로 그 이상 나가지 못한 것은 물론 그나마 어렸을 때 배웠던 것도 많이 잊어버려 처음부터 다시 공부했다고 한다.[* 게다가 철종은 자신이 즉위하던 해에는 읽은 게 없다고 했다. 공부를 아주 안 한 건 아니지만 열심히 한 것은 아니며 [[조선/왕사|왕위]]와 멀었던 만큼 그래야 할 이유도 없고 농사지으며 살아야 했던 사정상 그러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흔히 알려진 대로 일자무식은 아니었지만 요즘으로 치면 초등학교 졸업에서 중학교 중퇴 후 공부를 오래 쉬다가 고3 나이 정도에 다시 중학교 [[검정고시]] 공부를 시작한 수준이니 한 나라를 통치하는 [[조선/왕사|군주]]로서는 확실히 부족한 면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왕족]] [[종친]]을 교육하는 기관이 있었지만 [[성종(조선)|성종]] 때의 [[구성군]] 사건 이후로 직계 왕족의 5대손까지는 관직에 오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왕족]] [[종친]]들은 학업을 열심히 하지는 않아, 《통감》, 《소학》은 커녕 천자문조차 제대로 떼지 못하는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왕족]]이기 때문에 관직에 나가지 않아도 먹고 살 걱정은 없었기 때문. 특히 [[조선/왕사|왕위]]에 가까운 [[왕족]]일수록 영특하다거나 공부를 열심히 한다거나 해서 쓸데없이 찍히는 일[* 당시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 세도가에서 "[[왕족]]이 똑똑하면 명이 짧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 [[방계]] [[왕족]] 정도는 속속히 솎아 쳐낼 수 있던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의 세력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는 말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똑똑한 [[왕족]]은 견제를 많이 받았다는 말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이 말은 굳이 [[세도정치]] 시기가 아니라 어떤 시대라도 똑같았다. 왕 자신 역시도 자신의 [[조선/왕사|왕위]]를 넘볼 만한 쓸데없이 똑똑한 [[왕족]]은 기왕이면 없는게 낫다.]은 삼가야 했을 테니 더더욱 그런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 로맨티시스트라는 얘기가 있는데, [[강화도]] 시절 ‘양순’이라는 이름의 하층 계급 여인과 결혼을 생각할 만큼 가까운 사이였다고 한다. 그러나 철저한 신분제 사회인 조선에서 천한 [[신분]]의 양순이 궁에 들어간들 [[무수리]] 정도밖에 할 수 없는 처지라 바로 철종의 [[후궁]]이 되는 건 불가능했다. 심지어 이런 내용의 [[야사(역사)|야사]]까지도 있는데 양순에 대한 [[상사병]]으로 괴로워하는 철종을 보다 못한 [[조선/왕실|조선 왕실]]이 몰래 사람을 보내 양순을 [[독살]]했다는 것. 나중에 이를 안 철종은 비탄에 잠겨 국사도 멀리한 채 황음의 나날을 보냈다고 한다. 독살인지 어떤지는 얘기마다 다르지만 일찍 죽었다는건 공통적으로 전해진다. 다만, 적어도 [[독살]] 부분은 조선 왕실에 대해 무지한 이들이 만들어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왜냐면 [[조선]]에서 [[조선/왕사|국왕]]은 초월적인 존재라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이라면 신분을 무시하고 [[후궁]]으로 삼을 수 있었다. 너무 미천해 바로 [[후궁]]으로 삼을 수 없다면 [[궁녀]]로 삼은 뒤 [[성관계|승은]]을 내리면 되고, 이나마도 경우에 따라선 생략이 가능하다.[* [[태종(조선)|태종]]의 [[후궁]]이었던 [[가희아]]는 본디 천한 [[기생]] 신분이었지만 [[궁녀]]가 되는 과정조차 전혀 없이 갑자기 [[혜선옹주]]로 봉해지며 [[후궁]]이 되었다.]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가 [[무수리]] 또는 [[천민]] [[궁녀]] 출신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자. [[조선]] 초기의 일이기는 하나 [[태종(조선)|태종]]의 [[후궁]]인 [[효빈 김씨]]나 [[세종(조선)|세종]]의 [[후궁]]인 [[신빈 김씨]]는 [[노비]] 출신인데도 정1품 빈까지 되었다. [[경종(조선)|경종]]~[[영조]] 시대 이후로 법적으로는 [[궁녀]]는 [[노비]]만이 될 수 있었으므로 천한 신분은 이유가 되지 않는다.[* [[혜경궁 홍씨]]가 [[양인]]을 궁녀로 뽑았다가 [[사도세자]]가 [[영조]]에게 야단을 맞은 일도 있다. 물론 [[순조]] 대 공노비 혁파 등으로 [[노비]] 출신 수급은 차츰 어려워졌고 철종~[[고종(대한제국)|고종]] 시대에 특히 지밀, 침방, 수방의 궁녀들은 대부분 [[중인]] 출신이었으며 집안에서 대를 이어 [[궁녀]]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위에서 인용한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편지에서 볼 수 있듯이 철종의 [[강화도]] 시절에 대한 과장된 소문은 이미 당대에도 돌아다녔다는 것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이 일화가 사실이라면 천한 신분이라서가 아니라, 철종이 [[조선/왕사|왕]]이 된 뒤 정신없어서 못 챙기고 있다가 부르려고 보니 병에 걸려 이미 죽었다거나 하는 등 그녀가 입궁하지 못했던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조선]] 후기는 [[헌종(조선)|선왕 헌종]]의 7촌(재종숙)이고, [[강화도]]에서 농사짓던 촌놈인 철종이 즉위할 정도로 [[왕족]]이 귀해진 상태라 더는 찬밥 더운밥 가릴 상황이 전혀 아니었다. [[조선/왕사|왕]]이 마음에 들어해 후사를 볼 가능성이 높은 여자가 있다면 [[노비]]고 뭐고 알 바 없고 [[역적]] 후손이라도 족보 세탁이건 뭐건 해서 어떻게든 데려오려고 날뛸 법한 시점이었다. 그런데도 못 데려왔다는 건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거나, 이야기 자체가 거짓말이라고 봐야 한다. * 특히 신분을 감안해보면 당시 실권을 쥐고 있던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 입장에서도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천한 신분이기에 결국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와 맞서기에는 불가능하고, [[후궁]]의 자식들은 모두 태어나는 즉시 [[조선/역대 왕비|왕비]]의 자식으로 양자 입적된다. 신분상 모든 [[후궁]]의 자식들은 [[조선/역대 왕비|왕비]]의 자식이 되는 셈. 그런 이유로 [[수렴청정]] 또한 [[후궁]]은 절대로 할 수 없으며, 더 중요한 사실은 [[적자]]가 없다거나 [[요절]]했다거나 하지 않는 이상 웬만한 경우에서는 [[적자]]가 [[조선/역대 왕세자|세자]]가 되어 [[조선/왕사|다음 왕]]이 된단 것이다. 그 관점에서 본다면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 입장에서는 양순이 [[후궁]]이 되어 철종의 아들을 낳았다 한들 [[조선/역대 왕비|왕비]]가 아들 하나 낳기만 기다리면 된다. 양순이 낳은 자식이 왕이 되어도 [[수렴청정]]은 어디까지나 생모가 아니라 [[조선/역대 왕비|왕비]]가 하니까 그것도 상관없다. 더 중요한 점은 양순이 낳은 자식도 후사를 얻기 위해선 결혼을 해야 하는데 '''그 아내를 안동 김씨에서 배출한다면?''' 덤으로 양순이 중전이 될 가능성은 0%인데 신분도 신분이지만 이미 숙종 시절에 후궁이 된 여자는 절대로 중전이 될 수 없게끔 되었다. * 물론 [[조선/왕사|왕]]의 나이가 점점 많아지는데 [[적자]]가 없으면 어쩔 수 없이 [[서자]]가 [[조선/역대 왕세자|세자]]에 책봉될 테고, 1번 세자로 책봉되면 죽거나 정말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이상은 [[조선/왕사|왕위를 계승]]할 수 있다. 하지만 [[조선/왕사|왕위]]를 계승해도 역시나 천한 여자의 자식이라는 이유 때문에 [[영조|정치력과 능력이 비범하지 않은 이상]][* [[영조]]는 [[조선/왕사|정통성 문제]]를 자기 자신의 정치력과 능력으로 어찌어찌 해결했다.]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에게 휘둘리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의 권세를 몰아내겠다고 [[조선/왕사|왕]]이 작정한다면야 가능은 하겠지만 그럴려면 상당한 결단력, 의지, 정치력, 배짱, 노력이 필요할 텐데 그러기가 어디 쉽나? [[헌종(조선)|헌종]]의 전례가 있으니만큼 유난증을 떨었을 가능성도 없잖아 있지만 그렇다고 그런 극단적인 수를 쓸 정도까지는 아니다. 막말로 진짜 저런 스토리가 벌어졌다면 위험해지는건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일 수도 있다. 명분이 궁색하기는 하겠지만 [[조선/왕사|왕]] 몰래 누굴 죽이는 것 자체가 일단 불법이고 [[인조]]와 [[민회빈 강씨|강빈(소현세자빈)]]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조선시대]] [[조선/왕사|왕]]은 정말 꼭지--야마--가 확 돌아버리면 없는 [[명분]]과 근거를 지어내서라도 누구 하나 죽여버리는건 일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철종이 정말 꼭지가 돌아서 누구 하나 족쳐야 한다면 당시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의 수장급 인사인 [[김좌근]] 같은 인물은 당연히 위험, 죽기라도 하면 나머지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들은 같은 꼴 되기 싫으니 버로우를 타야 하고 그만큼 철종의 권력은 강화되고 다시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들은 버로우행. 살더라도 일단 명목상 [[조선/왕사|왕]]을 정말 꼭지돌게 만들었기에 또 꼭지가 돌까봐[* [[경종(조선)|경종]]이 [[조선/역대 왕세자|세자]] 시절에 승지가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경종(조선)|경종]]을 꽤나 기다리게 만든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 날은 무슨 일인지 조용하던 [[경종(조선)|경종]]이 꼭지가 돌아서 늦게 온 승지도 사관도 저멀리 꺼지고 여섯 승지들 모두 나문(심문)하라며 있는성질 없는성질 내며 화를 크게 버럭버럭 내었는데, 하도 조용한 사람이 갑자기 화를 내니 신하들이 깜짝 놀라서 엎드려 벌벌 떨기만 했다. 원래 조용히 지내던 사람이 화나면 더 무서운 법이라고 철종 역시도 마찬가지로 꼭지가 돌아버리면 갭 때문에 더욱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나마 [[경종(조선)|경종]]은 늦게 온 정도에서 화를 냈지 위의 [[야사(역사)|야사]]처럼 [[조선/왕사|왕]]이 [[짝사랑]]하던 사람이 다른 사람 손에 죽었다? 화 정도가 아니라 [[옥사]]로 이어질 수 있다. [[경종(조선)|경종]] 역시도 [[왕자]] 시절, [[조선/역대 왕세자|세자]] 시절, [[조선/왕사|왕]]이 되고도 초기에는 어벙한 모습을 보였고 [[노론]]으로부터 대놓고 무시당했으나 [[신임옥사]]를 일으켜 자기를 무시하던 [[노론]] 일파를 일격에 숙청한 바 있다.] 조심스러워질 수 밖에 없다.[* 애초에 이 시기의 안동 김씨들도 철종을 대놓고 무시하지는 않았고 자기네들 권력과 큰 관계가 없어보인다 싶으면 철종이 하고자 하는대로 존중해주는 면도 있었다. 예시로 조병현은 풍양 조씨의 일원으로써 헌종 재위기 말년에 안동 김씨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이 때에는 헌종의 비호로 넘어갔지만 헌종이 죽고 철종이 즉위하면서 결국 사사되었다. 그러나 조병현은 불과 몇년 뒤, 그것도 철종 재위기에 철종의 의사로 사면된다. 안동 김씨 입장에서는 나름대로 사면하기 껄끄러운 면이 있음에도 그래도 자기네들 권력에 직접적인 영향은 안 간다고 봤는지 왕이 행하고자 하는대로 해준 것.] 오히려 철종 입장에선 진짜 이런 일이 터진다면 "오냐 내가 늬들 하는거 가만히 보고 있었는데 이런 일까지 벌였겠다? 내가 만만히 보이는가 보지? '''안 그래도 늬들 하는 꼬라지가 맘에 안 들었는데''' 늬들 나한테 잘 걸렸다. 너네들 쫓아내고 '''나도 왕 다운 왕이 돼보자'''" 라고 나오면 골치아파진다. 이 사건을 빌미로 철종이 왕다운 왕이 돼보자고 안동 김씨와 전면전을 걸어버리면 안동 김씨 입장에서는 딱히 맞설만한 명분도 없고[* 사랑하는 상대가 대단한 사람도 아니고 일개 천출인데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도 독살이든 뭐든 죽여버린다는 극단적인 수를 썼다면 철종이 이들보다 더 극단적이고 분별없는 짓을 저지르지 않은 이상 다른 이들 입장에선 "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게 신하로서 할 짓이냐?" 라는 반응이 돌아올 것이다. 이 시대 왕에게는 자식을 많이 낳아 후손을 번창시켜야 한다는 의무가 있는데다 안 그래도 철종이 왕이 된 것도 정조 계열이 독자로 근근이 대를 이어오다 단절되었다. 제3자 입장에서 본다면 명분은 철종에게 있다.] 게다가 철종이 타 가문들에게 "나와 함께 안동 김씨를 조져주면 너희들에게도 한 자리 주겠다."고 딜까지 걸어버리면 진짜 힘든 싸움이 된다. * [[농민]]으로 살았기 때문에 그 때 먹던 모주([[막걸리]])를 너무 그리워해 [[조선/역대 왕비|왕비]]인 [[철인왕후|철인왕후 김씨]]가 [[신 안동 김씨|친정]]에 부탁해 구해 올렸다는 [[야사(역사)|야사]]가 있다. 이 이야기는 웹툰 《[[조선왕조실톡]]》에도 나온다. * [[경기도]] [[파주시|파주]] 근방에 염종수라는 한 남자가 살고 있었는데 [[조선/왕사|새 임금]] 철종의 외가 집안이 [[염씨|용담 염씨]](龍潭 廉氏)라는 것을 알았다. 그걸 보고 '용담 염씨는 자신의 [[본관]]인 [[파주시|파주]](坡州) 염씨(廉氏)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기 때문에 엄격히 따지면 [[철종(조선)|상감마마]]와 자신은 한 뿌리가 된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 다음에 철종의 외할아버지인 [[염성화]](廉成化)의 가계(家系)가 자신의 가계에서 갈라져 나간 것으로 [[족보]]를 위조하는 엄청난 짓을 꾸민 다음 본인이 철종의 외숙부가 된다고 거짓 [[상소]]를 올렸다. 친척 하나 없어 항상 외로움을 느끼던 철종은 염종수 부자를 대궐로 불러와 잘 대접해고 벼슬도 주었다. 그렇게 잘 살게 된 염종수는 [[완전범죄]]를 꾸미기 위해 철종의 외할아버지 묘 앞에 비석을 세운 다음 거기에다 원래의 용담(龍潭)이라는 글자 대신에 자신의 본관인 파주(坡州)라고 새겨 넣는 짓까지 벌였으며, 그 뒤 본인의 권세를 이용해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살았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했던가? 나중에 [[강화도]]의 파주 염씨 성을 가진 '''진짜 외숙부'''인 염보길(廉輔吉)이 그 사실을 밝혀내면서 결국 염종수는 기군망상죄로 목이 달아났고 그의 아들은 [[노비]]로 전락했으며 외할아버지의 묘도 다시 용담으로 복귀되었다. 철종의 진짜 외숙부인 염보길은 실제로 [[강화도]]에서 하인으로 살고 있었는데 염보길은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의 세력이 무서워서 차라리 하인으로 사는 게 낫다고 생각해 이후 평생 벼슬길에 나서지 않은 채로 조용히 살았다고 한다.[* 사실 왕족도 그렇지만 왕의 외척도 왕족처럼 태어나면서 부귀가 주어지는 자리는 아니다만 그래도 조용히 살기만 해도 자리보전은 가능하다. 왕 입장에선 외척 또한 친위 세력인데다 어쨌든 친척은 친척이니 외면하진 않을 것이고 이 야사에 따르면 철종은 자기 친척은 잘 대해주는 만큼 먹고 살 걱정은 던다.] * [[조선]] 후기의 [[임술민란|농민 봉기]]가 철종의 재임기에 제일 심했는데, 저 멀리 [[미국]]도 비슷한 시기에 남북 갈등기를 겪는 큰 고통을 겪었다. 즉, [[조선]]과 [[미국]] 모두 비슷한 시기에 큰 어려움을 겪은 셈. 그래서 결국 이 왕 치세기의 말에 [[미국]]은 [[남북전쟁]]이 발발했다.[* 그래서인지 이 왕과 얼추 비슷한 시기에 [[재커리 테일러|임기를]] [[밀러드 필모어|보냈던]] [[프랭클린 피어스|미국]] [[제임스 뷰캐넌|대통령들은]] 평가에서 전부 하위권 라인에 속해있다. 다만 이 왕 재임기의 거의 말년에 [[에이브러햄 링컨|미국 대통령을 지냈던 분]]은 1위이긴 하지만.] 다만 두 국가의 차이점이라면 미국은 국력이 성장하던 시기였고 조선은 국력이 떨어지던 시기라는 차이가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