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청교도 (문단 편집) == 정치관 == > 아메리카에 사람들이 살게 된 것은 스튜어트 왕가의 혐오스러운 폭정과 세속적이고 영적인 폭정에 대한 투쟁 덕분이었다. > 아메리카에서 정착을 계획하고, 실행하고, 완수하도록 이끌었던것은 종교뿐만 아니라 보편적 자유에 대한 사랑, 성직자, 위계조직, 전제적 지배자들에 대한 증오와 불안, 공포 때문이기도 했다. >---- >[[존 애덤스]]의 『교회법과 봉건법에 관한 논문』(1765) 앞서 영국의 청교도들은 스튜어트 왕가와의 정치적 이념의 차이로 100여년간 극심한 갈등을 겪었다. 이들은 왕권신수설을 배격하고 칼뱅주의에 입각하여 통치자의 권력을 제한할것을 주장했고 이는 영국과 네덜란드를 거쳐 미국으로 이주한 청교도들에게도 이어진다. 그리하여 [[미국]]은 건국 이전부터 청교도들의 이주로 인구적 특성이 생겨났으며, 이런 주민들이 영국정부의 식민지 압제에 벗어나 국가를 구성했고 독립혁명의 이론적 기반은 칼뱅주의에 영향받은 공화주의와 존 로크의 사회계약설에 큰 영향을 받았다. 따라서 독립헌장에서부터 "모든 사람은 평등하므로 자유롭다"고 선언했다. 프랑스 혁명이 국가교회인 가톨릭에 반감을 많이 드러냈다면 미국 독립혁명은 청교도 윤리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현재 세속주의에서 주장하는대로 미국의 건국 이념은 종교와 무관하다는 주장은 건국과 독립전쟁 당시 상황을 잘 알지 못하는 것으로[*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이신론자들이 많음을 근거로 음모론이 많은데 미국뿐만 아니라 당시 18세기 서유럽에서도 지식인들 사이에서 이신론이 대유행이었다. 볼테르와 루소도 이신론자였다.] 현재 종교의 자유라는 개념이 세속화된 국가에서 어느 종교든지 믿어도 되거나 혹은 종교를 믿지 않을 자유라면 당시 17~18세기 청교도들에게 종교의 자유라면, [[https://www.lawtimes.co.kr/Legal-Opinion/Legal-Opinion-View?serial=36180|수정 헌법 1조에 명시된대로 [[영국 국교회]]와 같은 국교를 두지 않고, 국교와 같은 지위의 기독교 내 특정 종파를 인정하기 않겠다는 취지로 봄이 타당하다.]] 당시 유럽은 기독교 세계였고, 종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기독교 특정 교파냐 아니냐가 정치적 갈등의 주 양상이었기 때문이다. 미국 청교도들의 주류는 [[제임스 1세]]와 [[찰스 1세]], [[찰스 2세]]의 영국 국교회(성공회) 일원화 정책에 반발하여 가장 극심한 탄압을 받던 회중교회나 [[재세례파]]들[* 아미쉬와 메노나이트들만 연상할 수 있지만 현대 침례회 또한 재세례파의 후신을 자처한다.]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미국 청교도들의 특징이라면 오히려 현대 미국 [[우파 자유지상주의|자유지상주의]](Libertarianism)의 원류를 엿볼 수 있는데, *국가교회 체제에 부정적이며 국가의 권력과 개입을 최소화한다. *개인의 신앙과 양심, 종교의 자유를 주장하고[* 이는 가톨릭이나 성공회에 시달렸던 것에 대한 반감 내지는 방어 논리라는 시대적 배경이 있긴 하다.] '''개인'''의 성경 중심 신앙을 강조한다. *'''자유의지를 강조하기에'''[* 자유의지는 재세례파들이 특히나 강조했는데 각 개인은 자유의지에 따라서만 세례받아야 한다.] 개인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엄격하게 묻고, 따라서 금욕적인 윤리관을 갖는다. 이런 전통을 이어받아 개인주의, 제한된 권력, 작은 정부를 주장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