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청러관계 (문단 편집) === 17~18세기 === 카자크들은 유라시아 스텝 지대의 유목민과의 정면 대결 대신에 시베리아의 삼림 지대를 장악하는 방식을 통해 급속히 동진하기 시작했다. 한 지역에서 모피 자원이 고갈되면 이들은 다시 동쪽에서 새로 모피 사냥터를 확보하고 다시 모피 자원으로 사용할 동물들이 멸종되면 다시 동쪽으로 모피 사냥터를 넓히는 방법을 거치며 시베리아 영토를 넓히기 시작했다. 17세기 중반 시베리아 카자크가 [[바이칼 호]] 일대를 넘어 [[스타노보이 산맥]]을 거쳐 [[아무르 강]] 유역까지 탐사하기 시작했다. 1643~46년 바실리 포야르코프가 이 지역을 탐험하고 나서야 처음으로 아무르 강 일대의 지리와 자원에 대한 정보가 러시아 측에 알려졌다. 카자크는 1650년에 아무르강 상류의 약사(yaksa) 지역을 공략하여 [[다우르족|다우르인]]들을 침략하였으며, 이듬하 9월에는 아무르강과 송화강의 합류처까지 남하하여 듀체르인들을 노략했다. 10월 달에 이르러 카자크인들이 우자라(ujala)를[* 우자라인들은 허저 퍄하의 일원으로 분류되었다.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gil092003&logNo=221337983089&categoryNo=33&proxyReferer=|#]]] 공략하자, 이들은 패망한 채 닝구타(ningguta) 주방에 주둔 중인 닝구타 머이런 장긴(Ningguta meiren-i janggin, 寧古塔梅勒章京) 하이서(haise, 海色)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하이서는 베이징에 이 사실을 보고하였고, 청 측도 이미 작년부터 척후병을 보내어 이 지역 동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곧바로 출정이 단행되었다. 하이서는 만주군 600명과 기타 원주민들을 징병해 총 1,600명에 이르는 군대로 우자라를 구원하고자 하였으나, 결과적으로 소극적인 공세 전략과 카자크의 청동대포로 인해 대패하고 말았다.[* 이훈(2018), "17세기 중엽 청-러시아의 충돌과 흑룡강 유역의 부족민", 《洌上古典硏究》 65, p.187~192.] 샤르후다는 부임 이후 아무르강 하류 유역인 [[나나이족|사견]](使犬, indahūn takūrara) 지방 10성의 조공 초유, 아무르강 하류 유역 주민들을 무단강 유역으로 사민, 닝구타와 길림을 군사 거점으로 개발, 카자크에 대한 군사작전을 진행하였다. 청은 1654년 2월, 정축조약 5조에 따라 징병을 명령했다.[* 다만 이명제는 청의 파병 요구가 정축절목의 징병 범주와 다르며, 과거 명대의 제후국에 대한 군사적 요청의 차원도 아닌, 외번 몽골과 같이 외번에 대한 군사 동원 지시였다고 해석한다. 그는 홍 타이지대 정명전의 연장선상에서 러시아의 동진에 맞서 조선을 동원하였다는 사실은 청이 조선을 중화제국의 영역보다는, 초원 지역 대청제국의 영역 내에 위치시키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하였다. (이명제(2021), "17세기 청ㆍ조선 관계 연구",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조선은 이에 따라 파병을 할 수 밖에 없었고 변급(邊岌)이 이끄는 조총병 152명이 [[나선정벌|출병]]하여[* 효종대 청은 마음만 먹으면 조선에 대해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다.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 조선 조정이 청병에 대해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또한 이 경우 정벌 대상이 명이 아니었기 때문에 정신적, 정치적 부담이 적었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계승범(2009), 《조선시대 해외파병과 한중관계》, p. 257~259. 계승범은 [[역사저널 그날]]에서 '''"조선은 청나라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대등한 두 나라가 연합군을 형성한 게 아니죠.''' 당시 청나라의 만주족은 팔기제로 유명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청나라 장수는 조선군 260명을 독립적인 부대로 자기 휘하에 두는 게 아니라 260명을 여덟로 나누어서 그냥 분산해서 배치해버립니다. 그러니까 신유도 작전 지휘권이 없는 겁니다."'''라고 하였다. [[https://books.google.co.kr/books?id=qW93DQAAQBAJ&pg=PT141&lpg=PT141&dq#v=onepage&q&f=false|#]] ] 청군은 총 752명이 넘는 병력으로 카자크를 상대로 크게 승전하였다. 1655년 북경에서 정백기몽고 구사 어전(gūsai ejen) 밍안다리(Minggandari)로 하여금 후마르강 어귀에서 러시아의 후마르(쿠마르스크) 요새를 공격했으나 함락에 실패하고 퇴각하였다. 이외에도 1657년에는 무단강과 송화강의 합류처인 샹얀 워허(Šanggiyan wehe. 尙堅烏黑)에서 양측의 전투가 있었고, 이듬해 2월 순치제는 조선에 군수품과 조총병과 200명을 급파할 것을 명했다. 조선은 [[신유]] 인솔 하에 260명의 조총병을 파병하여 청군과 합류했고, 송화강과 아무르강의 합류처에서 북상하던 카자크 병력을 공격하여 승전했다. 이때 스테파노프 이하 다수가 전사하였고, 1660년(순치17)에는 지금의 [[하바롭스크]] 북쪽에 있는 구법단촌(古法壇村) 전투에서 청군이 카자크를 습격하여 다시 한 번 승전하였다. 1658년과 1660년의 패전으로 인해 카자크 병력은 네르친스크로 후퇴, 청군은 알바진(약사) 요새를 파괴했다.[* 이훈(2018), "17세기 중엽 청-러시아의 충돌과 흑룡강 유역의 부족민", 《洌上古典硏究》 65; 宋寅宙(2018), "淸朝의 順治~康熙年間 黑龍江 유역 통합과정과 ‘吉林將軍體制’의 성립", 《明淸史硏究》 50; 박지배(2018), "17세기 중반 러시아의 동북아진출과 ‘나선정벌’의 의미", 《歷史學報》 240.] 1665년 [[폴란드계 러시아인]] 귀족 출신 니키포르 체르니고프스키와 몇몇 카자크들이 알바진에 [[작사(국가)|요새를 하나 세웠다]]. 이 요새는 3백여 명을 수용할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다른 한편 [[다우르족]]-[[어웡키족]] 계통의 추장 간티무르가 휘하의 전사들을 이끌고 1666년 러시아로 귀순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때마침 청나라의 [[강희제]]는 [[삼번의 난]]을 진압한 이후 여유가 생겨 루스 차르국과 본격적으로 외교에 나서기 시작하는데, 본격적으로 협상을 하기 앞서 수천여 명의 병력을 보내 1685년 알바진을 함락시켰다. 청나라에서는 알바진에서 사로 잡은 포로들을 좋게 풀어주었지만 이들은 청나라 군이 떠나자 다시 요새를 점거하였고 1686년 요새는 재차 함락되었다.[* 알바진 요새 함락 이후 청나라 측에 투항, 귀순한 카자크들은 청나라 내에서 러시아 정교회를 믿을 권리를 보장받고 현지인 여성들과 통혼하였는데 이들은 오늘날 [[러시아계 중국인#알바진인|알바진인]]으로 이어진다.] 알바진 문제가 일단락된 이후 '''청나라와 루스 차르국은 1689년에 [[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해 국경을 확정시켰다. 네르친스크 조약 당시에는 중국어는 사용되지 않았고'''[* 명나라 시절에도 러시아 사절단이 중국 베이징을 방문한 적이 있었으나 러시아 사절단이 한문으로 된 초청장을 읽지 못한 것에다가 조공으로 바칠만한 귀중품을 휴대하지 못한 이유로 사절단이 명나라 황궁을 알현하지는 못했다.] '''[[만주어]] 조약문, [[라틴어]]/[[러시아어]] 조약문이 각각 체결되었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네르친스크 조약 당시 대표단은 협상에 앞서 '쌍방 중 누구도 모국어를 쓰지 않을 것'과 '동수의 인원이 협상에 참여할 것'을 약속한 상태로 협상을 진행하였다. 당시 청나라의 관리들은 쓸 만한 러시아어 통역관들을 데리고 있었지만 실제 협상에서는 이들을 배제시켰다. 다른 한편 러시아에서는 [[다우르족]] 가운데 만주어 통역을 할 만한 사람을 찾았지만, 러시아에 귀순한 다우르족 중 만주어를 유창하게 잘 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러시아인이나 만주인 모두 몽골어를 잘 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몽골어 대신 라틴어가 협상 언어로 선택된 이유가 묘한데 당시 네르친스크에 모인 러시아 사절단이나 청나라 사절단 중에 라틴어가 가능한 사람들이 [[폴란드계 러시아인]] 한 명[* 폴 안드레이 벨로보츠키]과 중국으로 선교하러 왔다 네르친스크로 불려나온 예수회 성직자 두 명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협상이 이렇게 철저한 보안 속에 유지된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는데 전근대에는 상대방 국가에게 보내는 외교 문서에 이런저런 비하적 인신공격을 써서 보내면[* 이를테면 중앙아시아의 여러 나라의 왕들은 중국 황제에게 편지를 보낼 때 중국 황제를 도스트(친구)라고 지칭했는데, 이를 외교사절이 직역했다가는 목이 당장 날아가거나 아니면 몇 년 동안 감금당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외교 사절단들이 알아서 순화해서 번역, 통역하는 일이 많았다는 점을 생각해보자. 즉 러시아 차르와 중국 황제가 모두 주시하는 상황에서 협상을 하는 작업은 상당한 위험부담이 따르는 일이기도 했다.[* 쉽게 말해서 협상 내용을 정확히 아는 사람이 두 명 밖에 없으면 협상을 잘못했다고 처벌당할 가능성이 줄어드는 것은, 물론 협상에 황제가 만족할 경우 그에 대한 보상은 두 명이 독점하게 되어있다. 아닌게 아니라 협상 이후 골로빈과 벨로보츠키의 러시아 사절단은 러시아 황실로부터 훌륭한 협상으로 국위를 선양했다며 상당한 포상을 받았고, 예수회 선교사 두 명 역시 강희제로부터 과거보다 더 자유로운 조건에서 가톨릭을 포교할 권리를 받게 되었다.] 동수의 인원이 협상에 참여할 것이라는 조항은 러시아 측에서 요구한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는 당시 시베리아가 식량 자원이나 도로가 빈약한 이유로 중대한 외교 협상에 약 1천5백여 명의 사절단을 파견하는데 그쳤으나, 청나라 측에서는 군인 1만 2천여 명에다 예수회 선교사들 뿐만이 아니라 불교 승려 1만여 명도 함께 대동하여 러시아 사절단에게 압박을 가했다.[* 출처 : 피터 C. 퍼듀 / 중국의 서진] 협상에 나선 골로빈은 알바진을 포기하는 대신 [[https://ko.wikipedia.org/wiki/%EC%95%84%EB%A5%B4%EA%B5%B0%EA%B0%95|아르군 강]] 북쪽의 염호 접근권을 얻었다. 이를 계기로 아르군 강은 오늘날에도 러시아의 중국의 경계로 기능하고 있다. 청나라는 좀 더 유리한 협상 결과를 얻었는데 우선 국경 분쟁 지역 중 "자신들이 한 번도 통치한 적이 없는 지역"들의 영유권을 포기했고, 러시아인들이 청나라와 계속 교역할 것을 허락하는 대신 [[준가르 칸국]]의 갈단 칸을 돕지 않을 것을 보장받았다. 당시 시베리아 동부에서 생산된 모피는 모스크바까지 다시 이동하는 것보다는 베이징에 갖다 파는 것이 훨씬 남는 장사였고, 이러한 연유로 이후 러시아는 준가르 칸국에 대한 군사동맹이나 원조를 완전히 중단하였다. 1713년 8월에는 청나라의 만주족 외교사절이 [[준가르 칸국]] 견제를 목적으로 [[토볼스크]]에 도착하였으나, 당시 러시아 제국이 스웨덴과 대치중인 상황이라 차르와 면담은 성사되지 못하였다. 만주족 사절은 대신 토볼스크에서 남하하여 [[칼미크인|칼미크 칸국]]을 방문한 후 1715년 베이징으로 귀환하였다. 1727년에는 [[캬흐타 조약]]을 체결해 국경이 확정되었다. 다만, [[베이징 조약]] 체결 이전에는 연해주가 청나라의 영토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