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체트니크 (문단 편집) === 전쟁 중후반 그리고 최후 === 한편 북아프리카 전역을 승리로 마무리지은 연합군은 유럽대륙에 본격적인 [[양면전선|제2전선 개전]]을 준비했다. 연합국이 유럽대륙에 개입할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자 미하일로비치와 체트니크는 연합국이 유고슬라비아에 개입하기 전에 한시라도 빨리 파르티잔을 때려잡고 향후 정국에서 우위를 점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혔다. 이에 따라 점차 독일과의 투쟁 대신 파르티잔과의 투쟁에 더욱 열을 올렸다. 하지만 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치명적인 자충수'''가 되었다. 1943년이 되며 2차 대전이 중반에 접어들고 [[횃불 작전|전황]]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점차]] 연합군에 유리하게 흐르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영국은 어느 정도 여유를 되찾았고 유고로 시선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정작 영국이 보기에 나치 독일을 상대로 가장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것은 티토의 파르티잔이었다. 반면 체트니크는 영미의 전쟁수행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파르티잔이나 우스타샤와의 싸움에 열을 올리고 있고, 심지어 추축국과 협력하기도 하는 상황이었다. 미하일로비치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던 간에 연합군의 입장에서 봤을 때 체트니크의 행태는 '''기회주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영국 내에서는 체트니크 대신 차라리 대독전선에 실질적인 기여를 하고 있는 파르티잔에 힘을 실어주자는 의견이 설득력을 얻기 시작하였다. 영국이 관심 있던 것은 '누가 독일군을 더 많이 죽였는가'였지[* "simply to find out who was killing the most Germans and suggest means by which we could help them to kill more."][* [[윈스턴 처칠]]이 유고 파견 영국군 사절단장 맥클린(Fritzroy McLean)준장에게 지시하며 했던 말. [[https://en.wikipedia.org/wiki/Sir_Fitzroy_Maclean,_1st_Baronet#Yugoslavi|#]]] 유고 내부의 복잡한 사정 같은 것은 알 바가 아니었다. 여기에 유고 내부적으로는 우스타샤와 체트니크가 상호간에 벌이는 인종청소가 체트니크에게 뼈아픈 [[인과응보|부메랑으로 되돌아 왔다.]] 유고슬라비아의 국민들은 피에 피를 부르는 잔혹한 보복전에 질려버렸고, 대안으로 공산당에 대거 가담하여 파르티잔의 세가 급격히 불기 시작했다. 공산당과 파르티잔은 유고 내 특정 민족의 배제가 아니라 파시즘으로부터 인민의 해방, 그리고 궁극적, 최소한 이론적으론 각 민족의 권리를 보장하여 자결주의에 입각한 6개 공화국으로 구성된 '유고슬라비아 공화국 연방' 건설을 목적으로 했다. 이에 따라 우스타샤나 체트니크와는 달리 특정 민족을 목표로 한 인종 청소나 보복 행위에 관여하지 않았다. 1944년 무렵에는 영국은 파르티잔을 연합군의 일원으로 인정하며 독일군을 상대로 승리하고 있던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동년 8월에는 영국의 압박을 받은 망명정부가 추축국 부역 혐의로 체트니크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파르티잔에 적대하는 집단은 모두 반역자라고 선언하였다. 물론 아쉬울 게 없던 티토는 왕실의 선언에 아무런 입장 표명도 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미하일로비치는 총사령관직을 박탈당하고 체트니크는 연합국의 후원을 완전히 상실한다. 이렇게 대세가 기울자 체트니크 조직원들까지 대규모로 이탈하여 파르티잔으로 투항, 전향하기 시작했고 체트니크의 입지는 크게 위축되었다. 결국 전후에는 티토와 파르티잔들이 영국, 소련 등 유고를 둘러싼 승전국들의 지원과 승인을 받은 [[공산주의]] 정권,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을 설립하면서 체트니크는 완전히 몰락했다. 1946년 7월, 미하일로비치를 비롯한 체트니크의 지도부들은 모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하지만 일부는 공산정권 치하의 유고슬라비아를 탈출하여 다른 국가들로 달아나 그곳에서 병이나 노환으로 자연사한 무리들도 있었는데 도브로슬라브 예브제비치(Dobroslav Jevđević, 보스니아 세르비아인)와 몸칠로 주이치(Momčilo Đujić, 세르비아인), 카를 노바크(Karl Novak, 슬로베니아인) 등 일부 체트니크 인사들은 이탈리아와 그리스, 미국 등으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사망했다.[* 티토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우스타샤에 대해서는 [[안테 파벨리치]]와 같이 해외로 도주한 우스타샤 지도부 인사들을 겨냥해 망명한 국가들에 암살자를 보내어 암살을 시도하거나, 유고슬라비아로의 범죄인 인도 송환을 요구했을 정도로 강경한 입장을 취했으나, 체트니크의 경우 미하일로비치를 비롯해 유고슬라비아 국내에 남아있던 지도부 인사들만 처벌하고, 국외로 도주, 망명한 체트니크 인사들은 암살자를 파견해 암살을 하거나 망명을 받아준 국가들에게 인도 송환을 요구하지 않으며 그대로 두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