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미카제 (문단 편집) === 통상공격과의 비교 ===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쟁 말의 미 해군을 상대로는 '''카미카제를 투입하는 게 통상 공격을 실시하는 것보다 기체도 덜 잃고 조종사도 덜 죽었다.''' 어떻게 이렇게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었는지에 관해서는 미국의 저명한 해군사가 노먼 프리드먼(Norman Friedman) 박사가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첫 카미카제 공격은 1944년 10월 필리핀에서 이루어졌다. 훗날 수집된 정보에 따르면, 이 전술은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 당시 일본 해군 항공대가 궤멸했던 것을 계기로 시행되었다고 한다. 이유는 간단했다. 미 해군 함대 방공망이 매우 효율적이었기 때문에 미국 항모 기동부대에 대한 공격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카미카제는 통상 공격보다 성공률이 높았다. 당시 전투 공중 초계 임무를 수행하는 함재기들은 공격대의 60% 가량을 격추했다. 카미카제 공격이 계속됨에 따라 미숙한 조종사들도 자살 공격 임무에 투입되었는데, 이들은 목표를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드는 게 전부였기 때문에 훨씬 쉬운 목표물이었다. 1945년 4월 기준으로 통상 공격에 투입된 공격대에서 33.6%는 아무런 성과 없이 격추되었고, 자살 공격에 투입된 특공기들은 50%가 격추되었다. 그러나 대공포화때문에 통상 공격은 명중률이 10%밖에 되지 않았지만 생존한 특공기들은 거의 대부분 목표에 명중했다. > >이 계산대로라면 300대로 편성된 공격대는 요격기에게 180대가 격추되어 120대가 남는다. 남은 120대 중 40기는 대공포에 격추되기 때문에 80대가 살아남고, 이 중에서 12대만이 유의미한 피해를 입힌다. 즉 통상 공격을 시도할 경우 12발을 맞추기 위해 일본이 손실해야 하는 항공기는 220대였다. 반면 카미카제 공격은 60대만 투입해도 똑같이 12발의 명중탄을 기록할 수 있다. 60대 중 요격기가 36대를 격추하고, 남은 24대 중 12대가 대공포에 격추되기 때문이다. 1/5의 소티 수와 27%의 조종사 손실로 같은 성과를 낼 수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카미카제 공격의 효과를 낮추기 위해서는 12발을 맞추기 위해 소모되는 특공기의 숫자를 통상 공격 시 소모량과 같은 220대로 크게 늘릴 필요가 있었고, 이 계산대로라면 요격기와 대공포들은 공격대의 95%에 해당하는 208대를 격추해야만 했다. 이를 위해서 요격기가 공격대의 78% (172대)를 격추하고 생존한 특공기의 36% (36대)를 격추해야 한다는 1945년 4월의 제안은 일본이 대규모 카미카제 공격을 기꺼이 실행하려 하는 시점에서 자살 공격의 효과를 낮추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나를 보여주고 있다.[* Friedman, Norman, ''Naval Anti-Aircraft Guns and Gunnery'', Naval Institute Press, 2014] 즉 전쟁 말에 접어들어서는 미 해군의 방공능력이 너무나 강력해져서 급강하 폭격이나 뇌격처럼 상대적으로 명중률이 낮은 통상 공격으로는 '''소티 수로는 5배, 조종사 손실로는 4배'''의 대가를 치러야 카미카제와 동일한 "명중 탄수"를 기록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다음의 표는 전쟁이 지속되면서 미 해군 방공전력의 효율이 얼마나 급격히 상승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 교전 || 카미카제 || 손실된 항공기 || 해당 교전에서 침몰된 연합군 군함[* 항공기에 의한 것이 아닌 포격, 뇌격 등을 포함한 모든 군함이다.] || 단순한 항공기:군함 교환비 || || [[말레이 해전]] || X || 4 || [[프린스 오브 웨일스(동음이의어)|전함1]] 순양전함1 || 2:1 || || [[산호해 해전]] || X || 97 || [[렉싱턴급 항공모함|정규 항모1]] 구축함1 급유함1척 || 24:1 || || [[미드웨이 해전]] || X || 248 || [[요크타운(항공모함)|정규 항모1]] 구축함1 || 124:1 || || [[동부 솔로몬 해전]] || X || 75 || 0 || 75:0 || || [[산타크루즈 해전]] || X || 92 || [[호넷(항공모함)|정규 항모1]] 구축함1척 || 46:1 || || [[필리핀 해 해전]] || X || 476 || 0 || 476:0 || || [[오키나와 전투]] || O || 1,450 || 36 || 40:1 || 산타크루즈 해전까지는 일본 해군도 커다란 피해를 각오한다면 통상 공격을 가해 미 해군 항모를 격침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필리핀 해 해전부터는 일본 해군이 얼마나 다수의 항공기를 동원하든 동원하는 족족 기체만 손실할 뿐 레이더로 관제되는 전투 공중 초계와 VT신관으로 무장한 미 해군의 방공망을 도저히 뚫을 수 없다는 사실이 명백해진다. 500대 가까운 항공기를 손실했음에도 주력함은커녕 그 흔한 구축함조차 제대로 건드리지 못했던 것이다. 카미카제는 이런 극단적인 상황에 대응하기 위한 극단적인 수단이었다. 결국 자살 공격의 상대적 효율성은 전장에서 입증되었다. 카미카제가 본격적으로 전장에 등장하기 시작한 시점부터 일본군의 항공 공격이 다시 미 해군의 골칫거리로 재부상한 것이다. 그나마도 미 해군의 주력함은 잡아내지 못했지만. 이하의 내용은 왜 이런 결과가 초래됐는지에 관한 보다 상세한 설명이다. 말레이 해전 이후 1942년 말까지 미 해군과의 전투에서 일본군 조종사들은 보통 시속 250에서 280km 속도로 항공 어뢰를 투하했는데, '''숙련된 조종사들이 이 정도 속도로 떨궈도 맞출까 말까하는 수준이었다.''' 연합군 측 항공 엄호가 전혀 없었던 말레이 해전 당시 일본의 육상 공격기들은 어뢰 51발을 투발해서 9발이 명중했다. 약 18%의 명중률인데, 이는 오키나와에서 카미카제 공격의 명중률과 대동소이하다. 여기에 적에게 본격적인 전투 초계세력이 존재할 경우 손실률까지 극심해지는데, 산호해 해전에서 18대의 뇌격기가 투발한 어뢰 중 렉싱턴에 2발이 명중했다. 반면, 이 중 10대가 손실되었으므로 명중률은 11%에 손실률은 56%가 된다. 미드웨이 해전에서는 토모나가 공격대에 소속된 10대의 뇌격기가 요크타운에 2발을 명중시켰던 반면, 5대가 격추되고 3대가 파손이 심해 폐기된다. 이 당시엔 일본 해군에 숙련된 조종사들이 상당수 있었지만, 그 조종사들마저도 어뢰를 명중시키기는 힘들었던 반면, 그렇게 맞춰놓고서도 손실이 극심했다. 하물며 대전 말의, 나는 것만 배운 조종사들이 뇌격을 실행해 명중탄을 낸다는 것은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 실제로, 필리핀 해 해전에서는 48대의 뇌격기가 참여했고 이들이 낸 명중탄은 '''없었다.''' 반면 손실률은 대략 60~70% 수준이었다. 설상가상으로, 1944년 말엽에는 미 항공모함의 함재기 중 전투기의 비중이 40%에서 70%까지 확대되어 공중 초계능력이 대폭 강화되었다. 지속적으로 고갈되어 가는 일본의 숙련병 자원들을 경험이 부족한 조종사들이 채워나가고 있었다는 걸 감안하면, 이들에게 뇌격을 시키더라도 결과적으로 돌아오는 전과는 사실상 제로가 될 뿐더러 카미카제 공격을 하면 무조건 죽는다 뿐이지, '''통상 공격을 실행하더라도 어차피 살아돌아오는 조종사는 2~3할 남짓'''일 뿐이다. 즉 일본이 시간을 끌기 위해 뭐 하나라도 격침시키는 발악을 해보기 위해서는 카미카제가 그나마 해답이었던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것들은 전부 항공 어뢰를 이용한 공격 사례지만, 급강하 폭격 역시 뇌격과 마찬가지로 웬만큼 숙련된 조종사가 아니면 명중을 기대하기 힘든 공격방식이었으므로 달라지는 것은 별로 없다. 통상 공격을 실행했더라면 돌아오는 조종사는 몇 있었을 지언정, 미 해군에 준 손실은 카미카제 공격을 할 때보다 훨씬 적었을 것임은 분명하다. 실제로 계산해보면 같은 인력을 소모시킨다고 가정했을 때, 통상 공격보다 카미카제로 격침시킬 수 있었던 군함의 숫자가 얼추 4~5배가 더 많다. 문제는 4~5배 많은 숫자가 47척 정도라는 거고, 이 정도는 대전시기 750척에 가까운 함정을 뽑아낸 미군에겐 별 타격도 안 된다. 카미카제의 명중률은 숙련 조종사가 소규모로 동원되었던 1944년 말 [[필리핀]] 전역(戰域)에서는 40~50%, 카미카제로 쓸 숙련 조종사마저 고갈되어 카미카제에 동원할 목적으로 속성으로 육성시킨 조종사들이 대규모로 투입했던 1945년 [[오키나와 전투]]에서는 14%의 명중률을 기록한다. 350기의 함재기가 출격하여 '''220기가 격추되고 명중탄은 단 1발'''밖에 기록하지 못한 1944년 6월의 필리핀해 해전과 비교해 보면, 자살 공격은 당시 압도적인 미 해군의 방공망 상대로 확실히 나은 결과를 보여주었다. 오키나와 전투에서는 총 1,465대의[* 자료별로 상이. 단, 2004년 발간된 2차대전 미 해군 피해 보고서에 따르면 1,465대라고 기록되어 있고, 과거 숫자는 미군 프로파간다에 의한 숫자이므로 미 해군 보고서를 기준으로 함] 특공기가 돌입해 33척의 미 해군의 군함과 미 상선단 소속 수송함을 격침시켰다.[* 다만, 자료에 따라서 차이가 있으나, 기록을 대조해 봐도 최소 30척 이상의 미 해군 군함과 최소 3척 이상의 미 상선단의 수송선이 오키나와 전투에서 일본군의 자살 공격으로 침몰하였다.] 그 밖에도 368척의 미 해군 군함에 다양한 규모의 피해를 주었다.[* 다만 지근 타격이나 부수적 피해를 제외한 최소 소파 이상의 기록만 고려하면 숫자가 크게 줄어들어 50대 정도이다.] 물론 [[이오지마 전투]]와 [[오키나와 전투]]는 당연하게도 특공기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순수하게 특공기만으로 이루어진 편대를 조직했다면 당연히 돌입하기도 전에 모조리 격추되었을 것이다. 때문에 폭격기를 호위하는 전투기 편대처럼 특공기를 호위하기 위한 편대도 출격했고, 자폭이 아닌 통상 폭격을 위한 항공기도 출격했다.[[http://www.b-29s-over-korea.com/Japanese_Kamikaze/Japanese_Kamikaze12.html|#]] 과거 특공기와 호위기를 합친 전체 일본군의 손실은 오키나와에서만 모두 7,830대 이상의 항공기를 손실했다고 알려졌었다.[* 미군이 [[구레 군항 공습|일본군의 잔존 군함 거의 전부를 격침시키기 위해]] 출격시킨 소티는 1,747소티이다.] 그러나 이는 미군의 예상치로, 전후 일본군의 기록과 크게 차이가 있다. 당시 수 개의 부대에서 올린 전과를 모두 합산함으로 인해 중복된 전과가 포함되는 바람에 크게 과장된 수치이며, 실제로는 500대의 통상 항공기와 900대 이상의 특공기를 손실하여 약 1,430대 이상의 항공기를 손실하였다.[* 미 육군 제병협동본부에서 발행하는 밀리터리 리뷰의 편집자였던 Dennis Giangreco의 Hell to Pay: Operation Downfall and the Invasion of Japan(2009), p.91에서 발췌] 이는 미군이 손실한 768대의 항공기에 비하면 많으나, 당시 일본군의 열세와 동원된 특공기의 상당수가 훈련용 [[복엽기]]였음을 고려한다면 단순히 1:1 숫자로 비교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여담으로 전쟁 기간 동안 항공기는 독일군이 일본군보다 훨씬 더 많이 만들었다. 독일군이 총 119,307대, 일본군이 76,320대 정도. 그럼에도 대전 말기 독일군의 항공기 손실이 일본군보다 적었던 건 일본처럼 항공기를 적에게 들이박는 삽질을 하지 않았기 때문.] 오키나와 전투 당시 카미카제로 인한 대부분의 피해는 레이더로 적 공습을 감시하던 피켓함들이었고, 이 와중에 [[알렌 M. 섬너급 구축함]] USS 래피(DD-724)는 6번의 카미카제 직격을 받고도 살아남아 불침함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 외에도 많은 상륙정이 손상을 입었는데, [[오키나와 전투]]가 미군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한 것임을 고려하면 상당한 타격을 입혔다고 볼 수 있다. 그 외 인상적인 전과로는 당시 영국 태평양 함대 소속 [[일러스트리어스급 항공모함]] HMS 포미더블(R67)이 카미카제 공격을 받아 배 자체에는 큰 타격을 주지 못하였으나, 폭발과 화재가 발생하여 18대의 함재기를 손실하여 운용 능력이 대폭 저하되었다. 순전히 격침 전과만을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그나마 카미카제의 전과가 낮은 편인 오키나와 전투에서도 미 해군 소속 군함 1척을 격침하기 위해 평균 30대의 특공기가 소모되었는데, 이는 당시 일본 해군의 통상 공격에 의한 교전비에 비해 월등한 수치이다. 일본 해군의 공격기는 1945년 초에 이르러서는 자살 공격이 아닌 통상 공격으로는 그저 미 해군 함정 대공포병의 주말 외박 티켓용 불나방에 불과했다. 당시 미군 방공망이 얼마나 촘촘하고 무지막지하였냐면, 대공원형진을 짜고 있는 함대 1개가 [[미드웨이 해전]] 당시에는 '''분당''' 평균 14,500kg의 탄약을 소모했으며, 1944년쯤 되어서는 그 5배쯤 되는 '''분당 평균 73,500kg'''의 탄약을 소모하며 그야말로 하늘 위에 미칠듯한 '''탄막'''을 구사하고 있었다. 괜히 일본 해군의 통상적인 접근이 사실상 불가능했던 것이 아니었다. 더 무서운 점은 저 무지막지한 숫자의 탄약은 레이더에 의해 중앙화기관제가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오키나와 전투 기간 전사한 미군은 12,281명인데 이 중 4,907명이 카미카제에 의해 전사한 해군 함정 승조원, 항공 요원들이다. 결국 일본군은 최후의 발악으로써 그 만큼의 미 해군 인원들을 길동무로 데려간 셈이다. 더군다나 오키나와 전투에서 이렇게 대규모로 카미카제 공격이 동원된 덕에 노이로제가 걸린 미 해군은 카미카제를 대비하기 위해 [[함재기]]들이 함대방공에 힘써 오키나와의 공중 지원이 힘들어진 면도 있고, 비행장을 때리느니 차라리 공장이 산재해 있는 도시를 박살내는 게 더 낫다며 펄펄 뛰던 [[커티스 르메이]]를 여러 장성들이 간신히 제지하고 [[B-29]]의 도시 폭격 임무를 잠시 비행장 폭격으로 돌리기도 하였다. 이처럼 카미카제 공격은 미군에 대해 지속적인 피해를 입히며 미군을 지연시키는데 어느 정도 역할을 하기는 하였다. 그 외에 굳이 더 의미를 찾자면, 미 해군 장병들 중 후송되는 [[PTSD|전투피로증]] 환자를 조금 늘렸다는 정도다. 물론 이러한 부분은 미 해군의 전체적인 운용에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오키나와에서 일본군의 분전하여 미군에게 큰 피해를 준 것이 오히려 미군으로 하여금 본토 진출이 아닌 일본을 끝장내버릴 [[원자폭탄|최후의 카드]]를 쓰게 만들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중론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