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미카제 (문단 편집) === 역사적 배경 === 일본은 고유 종교인 [[신토]](神道)를 일본 정체성의 초석으로 고수했다. 사실 신토를 재발명했다. 전통 신토는 다양한 정령과 신령, 귀신에 대한 믿음이 뒤섞인 애니미즘 신앙이었다. 모든 마을, 신사(shrine)가 그들만의 정령과 관습을 갖고 있었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에 일본은 국가 공인 신토를 만들면서 수많은 지역 전통을 억압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국가 신토'에는 '''민족성'''과 '''인종'''이라는 대단히 근대적인 사상이 주입됐다. 이는 일본 엘리트가 유럽 제국주의에서 따온 요소였다. 불교와 유교, 사무라이 봉건 윤리 등에서도 국가에 대한 충성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모두 가져다 뒤섞었다. 그 위에다 세울 정점에 이전까지는 허수아비에 불과했던 덴노를 끼워넣어, 천년 넘게 사라졌던 덴노에 대한 절대적 숭배를 최고 원리로 신성시했다. 이들은 일본의 황제를 태양신 아마테라스의 직계 후손이자 살아 있는 신으로 간주했다. 얼핏 이 이상한 신구의 조합은 급속한 근대화 과정에 착수한 국가로서는 부적절한 선택처럼 보인다. 살아 있는 신(現人神)? 애니미즘 정령? 봉건 윤리? 이는 근대 산업 열강이 아니라 신석기 족장 이야기처럼 들린다. 하지만 그것은 마법처럼 통했다. 계기야 어쨌든 힘과 힘이 충돌하던 제국주의를 겪은 그동안 스스로를 각자의 고향이나 영지사람으로 생각하던 일본 열도의 백성들에게 일본 제국이라는 근대국가로 통합할 수 있게하는 구심점 역할이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뭉쳐진 일본의 중앙권력이 체질을 개편한 [[메이지 유신]]으로 일본은 숨가쁘게 근대화했고, 동시에 국가에 대한 광신적인 충성을 이끌어냈다. 유럽 밖의 세계에서 [[이슬람 원리주의]]나 [[힌두트바]]처럼 종교가 국민국가 개념을 심은 케이스가 있는가 하면, 중국이나 한국처럼 정치 이데올로기에 국가개념을 섞어 국민성을 만든 케이스는 있지만, 일본은 이 두개가 혼합된 보기 드문 국민국가 형성원리가 적용되었다. 나치 독일이 [[V2(로켓)|V-2]] 로켓 발진을 시작하려던 무렵에 이미 일본은 연합국 군함 10여 대를 '''정밀 유도 미사일'''로 격침했다. 이 미사일이 바로 가미카제이다. 오늘날 정밀유도 무기에서 방향을 유도하는 일은 컴퓨터가 하지만, 가미카제는 일반 항공기에 폭탄을 싣고 인간 조종사가 편도 비행의 임무를 수행하는 식이었다. 이런 결의는 죽음을 각오한 희생정신의 산물이었는데, 바로 국가 신토(神道)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이처럼 가미카제는 첨단 기술과 전근대적인 종교적 교리 주입의 결합에 의존했다. 일본 해군은 [[진주만 공습]]으로 미 해군의 태평양 함대를 크게 약화시켰고, 이후 지속적인 공세를 유지하여 [[산호해 해전]]에서 미 해군을 상대로 전술적 승리를 거두면서 태평양에서 미 해군을 몰아내어 미국을 협상 테이블로 끌고 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후 미 해군을 전멸시키기 위해 야심차게 준비한 [[미드웨이 해전]]에서 압도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미 해군이 분투하여 일본 해군은 항공모함 4척 가운데 3척[* [[카가(항공모함)|카가]], [[아카기(항공모함)|아카기]], [[소류(항공모함)|소류]], [[히류]] 4척 가운데 앞의 3개가 순서대로 급강하 폭격기 부대에 치명타를 입고 가라앉았다.]이 5분 만에 모두 격침됐다. 일본 해군이 자랑하던 기동부대 전력이자 [[진주만 공습]]의 주역이던 항공모함들이 한순간에 녹아버렸다. 그 이후 일본군은 공세 능력을 상실하여 점차 수세에 몰렸다. 거기에 더불어 미국이 [[진주만 공습]] 이후 빠르게 체계를 정비하고 기술 개발과 생산에 힘을 쏟자 격차는 점점 벌어져서 일본 해군이 도저히 미 해군을 따라갈 수 없을 만큼 전력의 격차가 벌어졌다. 당연히 일본 해군이 미 해군을 공격하는 것도 점점 효력이 사라졌다. 미군이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이라고 부르는 1944년 6월 [[필리핀 해 해전]]에서 일본 해군은 항공모함 기동부대가 그나마 남은 베테랑 파일럿 한 줌과 함께 괴멸했건만, 미 해군은 고작 [[사우스다코타급 전함]] USS 사우스다코타(BB-57) 한 척이 소파되는 피해를 입음에 그쳤을 뿐이었다. 이렇게 일본 해군은 단순히 수세에 몰리는 정도가 아니라 통상적인 공격으로는 도저히 미 해군에게 의미 있는 타격을 줄 수가 없는 지경에 처해 결국 방어전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일본군이 파죽지세로 밀려오는 미 해군, 미 해군의 지원을 받는 미 해병대의 상륙을 막으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결국 이러한 상황에서 압도적인 수세를 막을 길이 없자, 일본군 내 여기저기서 자살 공격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NHK]]에서 방송한 <일본 해군 400시간의 증언> 이라는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첫 카미카제 출격이 있기 이미 1년 전부터 해군 군령부에서 논의가 있었고 [[가이텐]]과 [[MXY-7 오카]], [[신요 보트]]와 같은 자폭 병기가 적어도 1944년 4월 이후부터 건조 방침을 구체화했다. 1944년 7월 21일, 일본 군령부는 '대해지 제431호'에 의거하여 특공작전을 정식으로 채용하였다. 같은 해 10월 5일 군령부는 지시하지는 않겠지만 현장의 자발적 공격은 반대하지 않겠다면서 자살 공격을 사실상 정식으로 허가했다. 첫 정식 카미카제 공격은 일본 해군 중장 오니시 타키지로(大西瀧治郞)가 시행했다. 마리아나 제도를 상실한 후 오니시는 제5기지 항공부대를 지휘하기 위해 루손 섬에 도착하였으나, 자신이 운용할 수 있는 비행기가 100대도 채 되지 않음을 확인하였다. 1944년 10월 19일 필리핀 방어전을 준비하고자 마발라캇 기지에서 자신이 지휘하는 제201해군항공전대의 인원들을 차출하여[* 이때까지는 그래도 기존 대원 중에서 자발적인 지원자를 뽑았으므로 나중의 사례들과는 다르다.] 이튿날 자살특공부대를 최초로 조직하였다. 이들은 [[A6M]] 제로센에 250Kg 폭탄을 적재한 채로 적함에 들이받도록 훈련받았다. 같은달 25일 [[레이테 만 해전]]에서 최초로 카미카제를 시행하여 미 해군 77.4 임무전대 ''Taffy-3'' 소속 [[카사블랑카급 호위항공모함]] USS 세인트 로(CV-63)를 격침하고 USS 칼리넌 베이의 갑판 일부, 구축함 3척을 손상시켰다. 카미카제 공격이 당시 통상적인 방법으로는 불침이나 다름없어 보이던 미 해군에 타격을 입힌 결과를 내자, 일본 대본영은 고무되어 이러한 방식으로 승기를 다시 되찾아올 수 있다는 헛된 망상을 품고 본격적으로 자살 공격 위주로 전략을 구상했다. 심지어 1945년 1월 최고 전쟁 지도 회의에서 '''특공을 주축'''으로 하는 일본열도 방위계획 논의가 있었음이 밝혀지는 등, 카미카제가 본격적으로 명목상으론 '자원'이지만 국가가 강요한 정신나간 자폭 공격 계획으로서 시행되었다. 항복 직후에는 전범 재판에 대비해 '특공은 수세에 몰려 어쩔 수 없이 일선 부대에서 자발적으로 시행하였지 강요가 아니라고 증언하라.'는 지침서를 만들어두기까지 했다. 주로 태평양 전선에서 실시되었으나, 만주 쪽에서도 [[소련군]]을 상대로 간간이 실시했다는 말도 있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쿠릴 열도에 상륙하는 소련군을 지원하는 소해정을 대상으로 돌격한 전투기도 있었고, 이는 일본군 최후의 카미카제 전과로 기록되었다.[[http://m.blog.naver.com/minjune98/221374913487|#]] 자폭공격으로 격침되었다고 확인된 마지막 미군 함선은 1945년 7월 28일, 오키나와 근해에서 [[https://ja.wikipedia.org/wiki/九三式中間練習機|93식 중간연습기]]에 공격받은 [[플레처급 구축함]] DD-792 캘러헌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