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캔자스 (문단 편집) == 역사 == 교외 지역이라 부각될 게 별로 없는 캔자스가 [[미국사]]에서 딱 한번 중요했던 적이 있으니 바로 [[노예제]] 때문이다. 시작은 1840년부터 시작된 미국 대륙횡단철도의 건설이었다. 당시 최신 기술이자, 육상 물류의 혁신을 가져온 철도를 미국 대륙 전체를 가로지르도록 놓는 것은 연방에 가장 중요한 국책사업중 하나로 수많은 주들의 연방상원의원과 주지사,정치인들이 이 대륙횡단철도의 역을 유치하기 위해 움직였다. 문제는, [[루이지애나 매입]]이후 미국이 가져온 루이지애나의 북쪽지역이었던 지금의 캔자스, 네브래스카 지방이 그시절에도 그렇고 지금도 미개발지역인 거대한 황무지였다는 것이다. 당시 기술로서는 여기를 거치지 않으면 [[골드 러시]]로 이주한 대륙횡단철도의 종점인 [[캘리포니아]]까지 한번에 가는 것이 불가능한데, 미국 정부로서는 대륙횡단철도 노선의 20% 이상을 먹고 있는 이 지역을 그대로 황무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 버려두고 있던 캔자스 지방을 어떻게든 준주로라도 편입시켜서 개발을 시작해야할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프랭클린 피어스]] [[미국 대통령]](재임 1853~1857년) 시절 대륙횡단철도의 건설이 본격화되면서 북쪽의 [[네브래스카]]와 함께 새로 연방에 준주로 승격(1854)되었다. 그러나 캔자스는 지리적으로는 남부였으나 '미주리 협정'에 따라서 36도 30분선 이북으로 노예주 금지지역이었고, 그 땅에 정착하고 개척한 사람들은 대부분 북부 출신이거나 남부 출신이더라도 노예제에 반대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남부와 북부의 수적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는 (남부 노예주들 입장에서는) 캔자스가 노예주가 되어야 하는 상황이었고, 결국 북부 일리노이 연방상원의원 [[스티븐 A. 더글러스]]가 타협하여 이들을 투표로 부치자는 "캔자스-네브래스카 법"(1854년)이 통과되었다. 결국 이곳을 자유주로 하나 노예주를 하냐를 두고 주민 투표를 해야되는데, 문자 그대로 황무지 깡촌인 캔자스에 투표권을 가진 미국 시민이 채 1천명도 안되는 상황이다보니, 이 주를 차지하기 위해 미 전역에서 수많은 [[위장전입]]을 포함한 이주자들이 쏟아졌고, 그 투표권을 가진 자들이 투표에서 승리하기 위해 싸우던 중 끝내 [[유혈사태]]가 발생했다. 이른바 "[[https://ko.wikipedia.org/wiki/%ED%94%BC%EC%9D%98_%EC%BA%94%EC%9E%90%EC%8A%A4|유혈의 캔자스(Bleeding Kansas)".]] 표결에서는 일시적으로 노예파가 승리하였으나, 무차별적인 외부유입으로 이뤄진 강제적 표결이었기에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이때 그 문제의 [[존 브라운]]이 캔자스에서 당시 도망노예법을 집행하던 남부출신 추노꾼(Posse) 5명을 끔살하는 사건을 일으켰다. [[프랭클린 피어스]] 대통령은 노예제 찬성파가 소집한 의회를 승인하고, 노예제 반대파가 토피카에 만든 '그림자 주정부'와 기본법(토피카 기본법)를 불허하였다. 후임 [[제임스 뷰캐넌]] 대통령 역시 노예제 찬성파들이 만든 기본법(르컴튼 기본법)을 승인하였으나, 르컴튼 기본법은 스티븐 A. 더글러스도 반대할 만큼 막장인 법률이었다. 결국 연방 의회가 캔자스의 재선거를 명령하였고, 외부 유입된 극렬 노예제 찬성파들이 그 재선거를 보이콧 함으로서(...) 노예제 폐지자들에 의한 와이앤도트 기본법이 캔자스의 헌장으로서 승인되었다. 과연 외부 유입이 사라진 캔자스 내부 표결로는 찬반이 2:1이었다고. 이 사태가 실질적인 남북전쟁의 시작이라고 보기도 한다. 특히 이때 피어스,뷰캐넌 등 대통령부터 연방보다는 노예를 우선으로 하는 정책에 우호적이었고, 이에 반발하는 북부 시민들이 노예제 폐지에 미온적인 연방을 믿을 수 없다라는 분노를 표출하면서 이제는 더이상 미봉책으로 수습할 수 없어진 단계가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1861년 1월 19일 자유주로 승격되었고, 그해 4월에 벌어진 [[남북전쟁]]에도 북부로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