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퀸(밴드) (문단 편집) === 미국 시장 === 대중들, 특히 국내에서는 퀸이 미국 시장에서 처참하게 실패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성기 시절 퀸은 미국 시장에서 실패한 밴드가 절대 아니였으며, 오히려 성공했던 밴드였다. [[A Night at the Opera]]를 시작으로 퀸의 전성기 때 발매된 앨범들은 상업적으로 실패했던 [[Jazz(음반)|Jazz]]를 제외하고 전부 [[빌보드 200]]에서 5위권 이내에 들었다. 심지어 이 Jazz도 빌보드 200에서 6위라는 고순위를 차지했다. 이러한 퀸의 성적은 1960년대 중후반 [[브리티시 인베이전]]을 주도했던 밴드 중 하나인 [[더 후]]의 빌보드 200 성적과 맞먹을 정도이다. 또한 [[빌보드 핫 100]]에서도 1위 곡을 2개나 가지고 있다. 차트 뿐만 아니라 앨범 판매량만 봐도 알 수 있다. 미국에서만 300만 장 이상이 팔린 [[A Night at the Opera]]를 시작으로, [[News of the World(음반)|News of the World]]와 [[The Game]]은 미국에서만 400만 장 이상이 팔렸다. 인기가 없었다는 [[A Day at the Races]]와 [[Jazz(음반)|Jazz]]도 미국에서만 100만 장 이상이 팔렸다. 무려 [[브리티시 인베이전]]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밴드들인 '''[[롤링 스톤스]]'''와 [[더 후]]의 최전성기에 나온 [[Sticky Fingers]]와 [[Who's Next]]가 미국에서 각각 300만 장, 370만 장이 팔렸음을 고려하면, 이들과 비슷한 음반 판매량을 기록했던 퀸이 최전성기 당시 미국에서 실패한 밴드가 절대 아니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사실 퀸의 음악성만 보더라도 퀸은 미국 시장에서 실패할 밴드가 전혀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대중들과 평론가들은 퀸이 주로 추구한 음악은 [[비틀즈]]와 [[레드 제플린]], 그리고 [[데이비드 보위]]의 스타일이 섞인 [[하드 록]]이라고 평가하며, 퀸 본인들 또한 이 세 음악가들이 자신들에게 가장 영향을 많이 준 음악가들이라고 밝혔다. 이 중에서 영국 스타일이 짙은 데이비드 보위를 제외하면 비틀즈와 레드 제플린은 미국 시장에서 크게 성공했던 밴드였다.[* 역사상 딱 다섯 아티스트만이 1억 장 이상의 미국 내 인증 판매량을 기록했는데, 그 중에서 비틀즈와 레드 제플린만이 영국 출신 아티스트이다. 나머지 세 아티스트는 [[엘비스 프레슬리]], [[가스 브룩스]], [[이글스(밴드)|이글스]]로, 전부 다 미국 아티스트이다.] 즉 퀸은 영국인들의 입맛에 맞는 데이비드 보위 풍의 브리티시 [[하드 록]] 및 [[글램 록]]을 추구함과 동시에 미국인들의 입맛에 맞는 레드 제플린 풍의 정통 [[하드 록]]도 추구하면서 미국에서도 인기를 얻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퀸이 미국 시장에서 실패했다는 이미지가 있는 이유는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로 퀸의 전성기 시절에는 전 세계적으로 인기가 말 그대로 넘사벽 급인 [[레드 제플린]]이 활동했으며[* 여기서 ‘넘사벽’이라는 표현은 한국을 제외한 것이며, 이는 현재진행형이다. 레드 제플린의 여전한 세계적인 인기는 [[그레타 반 플릿]] 등의 음악가들이 현재에도 인기를 끌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핑크 플로이드]]와 [[롤링 스톤스]]처럼 미국에서의 인기가 어마어마했던 영국 밴드들이 대거 활동했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비틀즈]]의 전 멤버들 또한 미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레드 제플린은 앨범만 냈다 하면 1,000만 장 단위의 판매량을 기록하고[* 3집을 제외한 1,2,4,5,6집 모두 '''인증 판매고'''만 1,000만 장을 훌쩍 넘긴다. 3집 또한 추정 판매고는 1,000만 장을 넘긴다.] 빌보드 200에서 1위를 차지했으며, 심지어 음악적 역량이 떨어지기 시작한 1970년대 후반에 발매한 앨범인 [[Presence]]와 [[In Through the Out Door]]마저 빌보드 1위를 달성하였고 수백 만 장 단위의 음반 판매고를 기록했다. 롤링 스톤스 또한 1971년 [[Sticky Fingers]]를 시작으로 빌보드 200에서 밥 먹듯이 1위를 차지했으며, 심지어 롤링 스톤스 3대 침체기 앨범이라고 불리는 음반들마저 빌보드 200에서 1위를 차지하였다. 또한 롤링 스톤스는 다른 영국 밴드들은 한 번 만들기도 힘든 [[빌보드 핫 100]] 1위곡을 1970년대에만 3곡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리고 [[The Dark Side of the Moon]]과 [[Wish You Were Here]], [[The Wall]]로 대표되는 핑크 플로이드는 말 할 필요도 없다.[* 이 세 앨범의 추정 판매고만 합쳐도 '''약 1억 장''' 가까이 된다. 특히나 [[The Dark Side of the Moon]]의 경우 전 세계에서 2번째로 많이 팔린 앨범이며 이 앨범들은 전부 [[빌보드 200]]에서 1위를 차지했다.] 즉 동시대에 활동했던 이러한 초대형 밴드들과 퀸의 빌보드 200 성적이 비교되면서 “퀸은 전성기 때에도 미국에서만은 실패했다!”라는 낭설이 나오게 된 것이다.[* 다만 [[월스트리트 저널]]의 통계 산출에 의하면 대중음악사에서 인기로만 따지자면 퀸 이상인 밴드는 [[비틀즈]]와 [[레드 제플린]]밖에 없다. 즉 전 세계적으로가 아닌 미국에서는 핑크 플로이드와 롤링 스톤스의 인기가 퀸보다 더 높았다는 의미이다.] 두 번째로 퀸의 전성기 당시 상술한 영국 밴드들 뿐만 아니라 미국 본토 출신의 밴드들 또한 미국 내에서 큰 인기를 끌었기 때문이다. 1960년대 브리티시 인베이전이 일어난 당시에는 미국 아티스트들은 영국 아티스트들에게 밀려서 상대적으로 인기가 저조했으나[* 물론 [[밥 딜런]]이나 [[재니스 조플린]], [[지미 헨드릭스]], [[도어즈]] 등의 예외는 있었다.], 1970년대 초반 당시 미국 음악계는 자립에 성공한 상태였다. 보통 브리티시 인베이전을 가리킬 때 1960년대가 1차, 1970년대가 2차라고 하는 경우가 있지만, 1970년대에 빌보드 차트를 '''문자 그대로 씹어먹었던''' 영국 밴드는 상술한 세 밴드와 [[폴 매카트니]]의 [[윙스]] 정도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2차 브리티시 인베이전’이라는 사건을 주장하는 학자는 없다.] 1970년대의 미국 음악계에서는 [[이글스(밴드)|이글스]]같은 [[컨트리 록]] 밴드들이나 [[레너드 스키너드]], [[올맨 브라더스 밴드]] 등의 [[서던 록]] 밴드들, 그리고 [[에어로스미스]], [[보스턴(밴드)|보스턴]], [[KISS(밴드)|KISS]], [[밴 헤일런]], [[Foreigner|포리너]] 등의 아메리칸 [[하드 록]] 밴드들도 위의 세 밴드 만큼의 큰 인기를 누렸다. 즉 위의 영국 밴드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미국 밴드들도 퀸과 동시기에 활동하면서 퀸은 미국에서 실패했다는 이미지가 형성된 것이다. 세 번째로 [[Hot Space]]의 대실패 이후 퀸이 미국에서의 활동을 줄여나갔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1984년부터 퀸은 미국에서 투어를 중단해 버렸다. 사실 1970년대 까지 영국과 미국 모두에서 성공을 거두어 멤버들은 이미 떼부자가 되었는데, Hot Space가 크게 실패한 이후에 굳이 미국인들의 입맛을 맞출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또한 [[I Want to Break Free]]에서의 코믹스러운 여장 뮤비가 보수적인 미국인들의 심기를 건드려 [[MTV]]에서 이 뮤비를 방송 금지시켜버렸던 사건도 있었다. 그리고 이 시기부터 미국 대중음악은 [[마이클 잭슨]]과 [[프린스(음악가)|프린스]]를 필두로 한 댄스 및 흑인 음악, [[밴 헤일런]]과 [[본 조비]] 등을 필두로 한 [[글램 메탈]] 쪽으로 기울게 되면서 [[하드 록]]을 주로 추구하던 퀸의 입지는 더더욱 줄었다. 이러한 일들이 겹겹이 일어나면서 밴드의 리더 격인 프레디 머큐리는 "앨범이 크게 성공하지 않는 한 미국 투어를 진행하지 않겠다"고 말했으며, 상술했듯이 이 이후로 정말 투어를 진행하지 않았다. 이렇듯 이 시기부터 퀸은 미국 시장 재건을 위한 의지를 보이지 않았으며, 자연스럽게 미국의 언론이나 라디오의 관심에서 멀어져 갔다. 그렇기에 이때부터 퀸은 북미를 제외한 유럽이나 남미, 일본 등에서 여전히 큰 인기를 얻으며 활약했다. 11집 투어는 북미를 제외한 유럽, 남미, 남아공, 일본을 모두 돌며 투어를 진행했다.[* 여담으로 이 남아공 공연은 당대에 어마어마하게 욕먹었는데, 이유인 즉슨 당시 남아공이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으로 백인 우월주의 정책을 마구 펼치던 때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당시 음악가들은 다른 곳들은 전부 투어를 가도 남아공만은 가지 말자는 불문율이 있었으나, 퀸은 그냥 남아공까지 투어를 간 것. 물론 퀸이 인종차별 지지 차원에서 공연을 간 것은 아니며, 오히려 그 곳에서 음악을 통한 인종 화합을 시도하고자 했다고 한다. 애초에 리더 격인 프레디 머큐리부터가 흑인 음악의 대표적인 아티스트 중 한 명인 [[마이클 잭슨]]과 친분이 있었고, 심지어 이란계 영국인이라 본국인 영국에서 소수 민족에 속했는데, 인종 차별을 지지한다는 것이 말이 안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